# 18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2화
“혹시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참지 말고 내게 말해.”
느긋한 루비카와 달리 에드가는 좌불안석이었다. 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구석이 없던 클레이모어 영지와 달리 수도에는 그에게 적대적인 귀족도 많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참는 성격은 아니잖아.”
처음 만났을 때, 귀족 명부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이름을 올릴 신분이었음에도 기죽지 않고 또박또박 제 의사를 전했던 그녀를 떠올리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선뜻 알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왕성 사람들은 당신이 여태까지 만난 사람들과 달라.”
안정적으로 영지를 꾸리는 게 최우선인 영지 귀족과 달리 수도 귀족은 권력의 향방에 따라 지위와 입장이 시시각각 바뀐다. 그래서 더 약고 술수에 능했다.
루비카는 수도와 거리가 먼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런 술수에 무지했다. 그녀가 귀족 간의 알력 싸움에 끼어 고통받지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하필이면 다음 날 바로 왕비와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알았어.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말할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분명 에드가는 밤새도록 당부의 말을 늘어놓을 것 같았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안심한 듯 에드가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왕비 전하는 좋은 분이지만 기분파야. 기분 나쁘면 미간을 이렇게 찡그려. 만약 이 표정이 나오면 그 말은 다시 꺼내지 마.”
무섭도록 기억력이 좋은 그는 왕비과 국왕도 모르는 그들의 버릇을 알았다.
“만에 하나 왕성에서 국왕 전하를 마주치게 된다면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니 뒷걸음쳐서 도망치거나 인사만 나누고 헤어져. 뭘 물어도 길게 대답하지 말고.”
탕트 백작 부인 때처럼 그의 속성과외가 시작되었다. 국왕와 왕비는 백작 부인보다 에드가가 더 자주, 오래 접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정보의 양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답답한 외출복을 입은 채 이야기를 듣다 밤을 샐지도 모른다.
“옷을 좀 갈아입어도 될까?”
“그래.”
루비카는 그가 당연히 자리를 비키고 하녀를 불러 줄 줄 알았다. 하지만 방을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루비카가 말을 꺼냈다.
“저…….”
“아, 당신은 이 저택이 익숙하지 않지.”
그가 성큼성큼 걸어간 쪽은 문이 아니라 옷장이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빼곡히 들어선 여성용 옷 중에서 하늘거리는 잠옷을 꺼냈다.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옷은 딱 그의 취향이었다.
“자.”
루비카는 일단 내민 잠옷을 받았다. 그러면 이제 그가 방을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멀뚱히 서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는가?
“에드가.”
울상이 되어 올려다보는 모습에 그가 뭘 깨달은 듯 혀를 찼다.
“그래, 당신은 남의 시중 없이는 옷을 갈아입을 수 없지.”
타고난 도련님 태생인 그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드디어 방을 나가겠구나 싶어 루비카는 활짝 웃었다.
“뒤돌아봐.”
“응?”
“어서.”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뒤돌았다. 잠시의 침묵 뒤 그가 등 뒤의 드레스 끈을 잡았다. 끈을 풀려는 그 행동에 그녀가 깜짝 놀랐다.
“뭐,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고 있잖아.”
태연한 대답에 그녀의 볼이 달아올랐다.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아니. 됐어. 하녀 불러 줘.”
“왜? 그냥 내가 할게.”
당당한 수준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나오니 할 말이 없다. 비록 첫날밤을 치르긴 했지만 아직 그녀는 변화에 대한 적응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볼이 헛헛하게 달아오르고 모든 게 낯설고 꿈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녀와 달리 에드가는 적응은 이미 오래전에 끝냈다는 듯 부부간의 깊은 스킨쉽을 무척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신이 무슨 옷시중이야. 벗기는 것도 입히는 것도 잘 못하잖아.”
남편으로서 곁에 있겠다는 에드가의 요구가 영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기에 루비카는 다른 핑계거리를 댔다.
지난번 마차에서 그는 드레스를 벗기지 못해 옷을 찢었다. 결국 앤을 부르고야 말았던 사건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젠 잘할 수 있어.”
“잘할 수 있다고?”
에드가가 퍽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못했던 것도 두 번째부터는 무조건 잘해. 다 기억하거든.”
그가 자신의 이마를 톡톡 치며 말했다.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는데 ‘아, 그러시구나.’라고 납득이 되는 이 기분은 뭘까?
어차피 말로 에드가를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반쯤 체념한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해서 중간에 하녀를 부르는 일이 생기면 내가 무척 부끄러울 거라는 건 알아둬.”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앤과 달리 수도 저택의 하녀는 모두 초면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에드가가 입꼬리 하나를 올렸다.
어두운 밤 조명 아래에서 음영진 입술이 더욱더 붉어보였다. 루비카는 숨을 참고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자.”
장담한 대로 이번에는 제법 매끄럽게 끈을 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오버 드레스를 벗기고 의기양양했던 에드가는 그다음 단계 앞에서 잠시 좌절했다.
“이건 어떻게 벗기는 거지?”
입히는 건 어려워도 벗기는 건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앞에 갑옷처럼 자리한 옷 조각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 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각종 보석과 자수, 커다란 리본 때문에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어 더 골치였다.
“그냥 이대로 확 벗으면 안 되나?”
“그럼 핀에 잔뜩 찔려서 엄청 아플 거야.”
“무슨 옷이 이렇게 입기도 힘들고 벗기도 힘들어.”
옷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에드가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본격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천을 당기는 손과 가슴을 바라보는 시선에 루비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그의 손길은 아무리 닿아도 적응이 안 되는 걸까? 이대로라면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하녀를 불러야 할지도…….”
“그건 안 돼.”
차라리 처음부터 불렀으면 몰라. 옷을 반쯤 벗은 모습을 남에게 보여 주기가 심히 부끄러웠다.
에드가는 그저 옷을 갈아입혀 주려다 실패한 거지만 이를 목격한 하녀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여기에 고정 핀이 꽂혀 있어. 이걸 뽑으면 돼.”
“아하.”
그녀의 설명에 그제야 구조를 파악한 그가 핀을 뽑았다. 장식을 이용해 잘 보이지 않는 쪽에 핀을 꽂았기에 찾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간신히 스토마커를 다 벗겼을 때 그는 만세라도 외치고 싶었다.
“하녀들은 월급을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
이제 슈미즈와 스커트, 코르셋 정도만 남았다. 코르셋 끈을 푸는 건 자신 있다. 앞서 오버 드레스의 끈도 쉽게 풀었던 그다.
에드가는 제법 휘파람까지 부는 여유를 부려대며 끈을 풀기 시작했다.
“봐. 뭐든 두 번째부터는 잘한다니까.”
그 순간 ‘북’ 하고 옷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끈을 푸는 데 집중하느라 지나치게 세게 잡아당긴 게 문제였다. 섬세한 레이스가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다.
“하하하, 두 번째부터는 잘한다고?”
에드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삶을 살며 이렇게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
“당신도 못하는 게 있네. 후훗.”
“연습을 해야겠어.”
“연습?”
마네킹에 옷을 입혀 연습하려던 에드가는 발그레진 얼굴로 반문한 루비카의 모습에 계획을 취소했다.
마네킹이라니, 눈앞에 이렇게 귀엽고 예쁜 아내가 있는데 뭣 하러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내가 못하는 게 있는 건 안 돼.”
찢어진 코르셋을 마저 벗겨 내며 그가 말했다. 순식간에 스커트와 파니에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람이 못하는 것도 있어야지.”
“안 돼. 내가 용납 못해.”
이제 그녀가 입은 건 얇은 슈미즈 달랑 하나였다. 사실상 잠옷이나 다름없었다. 얇은 옷 너머로 아련히 그녀의 속살이 비쳤다.
‘굳이 잠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을까?’
달아오른 그와 달리 루비카는 무슨 생각 중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 벗기는 걸 어떻게 연습해? 사람이 입는 거랑 달라서 옷걸이에 걸어 두고 하는 건 도움이 안 될 텐데…….”
“글쎄, 칼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해 볼까?”
눈치 없이 구는 그녀가 원망스러워 던진 농담이었는데 뜻밖에도 무척 재밌었는지 어깨를 들썩거리면 ‘깔깔깔’ 웃었다.
들썩이는 몸을 따라 옷이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그는 손이 못된 짓을 저지를 걸 막기 위해 공연히 침을 꿀꺽 삼켰다.
“자, 이제 눈 좀 감아 줘.”
마지막으로 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그녀가 웃음을 참으며 요청했다. 그런데 당연히 요청을 받아들이고 눈을 감을 줄 알았던 그가 오히려 델 것처럼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아니, 안 감을 거야.”
“뭐?”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인데 팔짝 뛰며 놀라는 아내의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럽다.
에드가는 한 발 다가가 슈미즈 자락을 잡았다. 얇고 부드러운 천의 촉감도 그녀의 피부만큼 기분 좋진 않았다.
“한번 시중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악마 같은 속삭임이었다. 그 끝이 단순히 잠옷을 갈아입히는 걸 가리키는 게 아님을 그녀도 알았다.
“내일을 위해서, 아, 아까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에 대한 설명을 마저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끝나고 들어도 돼.”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뒷걸음질 쳐 도착한 곳은 침대 모서리였다. 그 끝에 걸터앉아 그녀는 항변인지 애원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어제 많이 했잖아.”
“하, 중간에 자 버린 사람이 할 말이 아닌데?”
“그건…….”
어느새 그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셔츠에 감싸인 탄탄한 팔과 단단히 짜인 가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제 그녀는 그 근육에 어떤 식으로 땀이 맺히고 흘러내리는지 가장 가까이서 생생이 목격했다.
“당신이, 당신이 너무 오래…….”
“나는 부족해.”
잘은 모르지만 남편의 체력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 같았다. 아, 맞아. 인간이 아니지.
“싫어? 하지 마?”
계속 말을 돌리는 그녀가 답답했는지 조금 저돌적으로 그가 질문했다. 음영진 얼굴은 초초함을 숨기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기쁘고, 들떠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아니.”
결국 다음 날 태양이 뜰 때까지 루비카는 국왕과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 * *
평소에 비해 훨씬 늦게 일어난 루비카는 칼을 도와 에드가를 3층 집무실로 보내고 아래층에서 치장을 시작했다. 왕비 전하와의 만남이 오후 2시쯤으로 예정되어 있기에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잘할 수 있을까?”
“잘하실 거예요.”
앤 대신 그녀를 따라온 엘리제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지만 어제 그만 이성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에드가의 맞춤 과외도 듣지 못했다.
아는 거라고는 ‘왕비가 미간을 좁힐 때는 입을 다물어라.’와 ‘국왕을 보면 무조건 피해라.’뿐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대외적으로 슬픈 일을 겪은 지 얼마 안 되어 위로를 위해 마련된 자리라는 게 다행이었다. 아무리 왕비라도 유산한 부인 앞에서는 조심스러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