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1화
“에드가, 깼어?”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귀에 속삭이자 에드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뭐가 그리 좋은 걸까? 루비카는 따라 웃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에드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도 눈을 뜨지 않으면 골려 줄 생각이다. 이불을 확 치우거나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워 줄까?
여러 방법을 떠올리며 반응을 상상하던 그때 그의 손이 불쑥 그녀의 목 뒤로 들어왔다. 그대로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겨 입 맞췄다.
“흐읍.”
깊은 키스를 나누며 그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보기 드물게 놀라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에 루비카야말로 당황했다.
“꿈인 줄 알았는데…….”
곧 그가 만개한 봄같이 미소 지었다. 평소에는 바다 같았던 푸른 눈이 햇살을 받아 초록색처럼 변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눈 색에 잠시 멍해졌던 루비카가 다급히 정신을 차렸다.
“에드가,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기 힘들어?”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키스 한 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동화 속에서나 가능했다. 루비카는 아쉬운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쓰며 발랄하게 말했다.
“식사를 가지고 올게.”
그녀가 나가려고 하자 그가 다급히 손을 잡았다.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
“잠깐 하녀만 불렀다가 올 건데, 뭐.”
그래도 싫다고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는 그의 모습에 당황했다. 결국 자리를 비우기 위해 그녀는 그와 포옹을 해야만 했다.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머리 위에 뺨을 비볐다.
‘원래 이런 남자였나?’
날이 갈수록 세지는 애정의 강도에 얼떨떨할 정도였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한 그녀가 모기같이 작은 목소리로 그만 놓아 달라고 말했을 때야 아쉬운 듯 팔이 풀렸을 정도였다.
차갑고 담백한 연애를 할 것 같이 생긴 사람의 속에 숨어 있는 불길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빨리 와야 해.”
달콤하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그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권력이라더니 반항 한번 하기가 쉽지 않다. 루비카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가 대기하고 있는 하녀에게 식사를 부탁했다.
십 분도 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음식을 실은 근사한 삼단 트레이가 도착했다.
하지만 에드가에게는 십 분도 지나치게 길었다. 주방을 교체하고 싶다는 말까지 나오자 루비카도 참지 못하고 포크를 빼앗았다.
“난 스티븐이 만든 음식이 좋아.”
결국 그는 항복을 선언하고 곱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간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흰 셔츠차림으로 식사를 하는 그를 보자 마음이 저절로 풀어졌다.
“이오스 문제는 어떻게 하기로 한 거야?”
식사를 다 끝낼 때쯤 슬며시 질문하자 떠올리기도 싫은 듯 에드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드래곤이 왜 나타난 건지 어떻게 된 건지 질문이 쏟아졌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어느덧 루비카의 납치 사건은 뒷전이 된 게 심히 불쾌했다. 그런 멍청한 도마뱀보다 중요한 게 내 아내라고 외치고 싶은걸 참았다.
“……일단 국왕 전하와 만나 의논하기로 했어.”
드래곤과 관련된 문제이니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게다가 황금을 뿌리며 나타난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여럿 되어 숨기는 것도 불가능했다.
루비카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으니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굳이 그렇게 요란하게 등장했어야 했나 싶어 아쉬웠다.
“미안해.”
“당신이 왜 사과를 해. 따지자면 스테판을 제대로 경계하지 않은 내 잘못이지.”
“그래도…….”
이오스가 자신을 ‘사촌 누나’라고 부르기로 해서 그런가. 진짜 말썽쟁이 동생이 사고를 친 것처럼 미안했다. 어쨌든 이오스를 끌어들인 건 자신이었다. 적어도 해명만은 하고 싶었다.
“국왕 전하께는 내가 설명할게.”
잠시 냅킨을 쥔 그의 손이 멈췄다.
“왜?”
“어쨌든 이오스를 끌어들인 건 나잖아. 내가 가서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루비카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에드가는 알 것 같았다. 문제는 선한 그녀와 달리 사람을 요리조리 요리해 대는 데 천재인 국왕 전하였다.
벌써부터 너구리 영감 같은 국왕의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 골이 아팠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선을 분명히 긋는 차가운 음성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상처받았겠지만 이제 루비카는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을 끝냈다.
언제나 문제를 혼자 도맡아 처리했던 그는 남의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와 짐을 나누자니 되려 부담스럽고, 자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겠지.
“사실 나 수도에 한번 가 보고 싶어.”
이럴 때는 정공법을 쓰면 그에게 부담감을 더 지우는 것밖에 안 된다. 철없는 척하는 게 최고다.
“궁전도 구경하고 싶고, 왕비 전하도 뵙고 싶어. 수도의 극장도 구경하고 싶은데…….”
역시 방금까지 결사반대를 외칠 것 같았던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는 결정적인 쐐기를 박기 위해 슬그머니 그의 한쪽 팔을 잡고 수줍게 웃었다.
“당신이랑 떨어지기도 싫고.”
결국 그녀의 유혹에 굴복한 그가 허락을 하고 말았다.
“구경만이야. 전하가 만나자고 하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해.”
그리 말했지만 그도 잘 안다. 국왕이 그녀를 만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건 거의 이루어지기 힘든 당부다. 또 그와 관련된 문제라고 하면 그녀는 결코 지나치지 않으리라.
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모든 위험과 문제를 모르게 만들고 싶었다.
겨우 어제 위험에서 구한 사람이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그저 행복하게만 있어 주길 바라는 건 지나친 걸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너구리라는 동물은 사람을 속여도 잡아먹지는 않잖아.”
달래듯 말하는 루비카의 손을 매만지며 그는 어설프게나마 미소를 만들었다.
그녀를 위험으로부터 떨어뜨리고 싶다고 말하지만 본심은 그저 그녀를 가두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이 독점욕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그녀는 틀림없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왜 이리 불안한 걸까.
‘정신 차려.’
그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녀가 자신에게 해 준 ‘꽃’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자기 안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를 구속하고 소유하려 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누구보다 고통스러웠던 게 자신 아닌가. 그녀에게 그런 기분을 선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감정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끝없는 환희를 줄 정도로 눈부시고 아름다운 감정이었지만 질척거리고 어두운 감정과 불안을 그림자처럼 가져왔다.
그 불안에 지는 순간 고통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함께 사랑하기에 나락에 빠지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는 이기적인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뇌해야만했다.
* * *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인사를 받을 시간도 없이 루비카는 에드가와 함께 수도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했다.
앤은 무척이나 함께 올라가고 싶어 했지만 자리를 비우는 동안 시녀장으로서 공작가를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물러났다.
“왕비 전하는 좋은 분이지만 귀가 얇은 편이에요.”
에드가는 최대한 왕실 사람들과 그녀를 만나지 않게 만들고 싶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첩자에게 납치당했다 돌아온 공작 부인을 위로하고 싶다는 왕비의 편지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칼, 차는 챙겼지?”
바람처럼 수도에 가 필요한 일만 하고 돌아오는 에드가와 달리 루비카는 챙길 것이 많았다.
왕비가 그녀에게 클레이모어 식 차모임을 제의했기에 루비카는 이오스에게 받은 차를 선물하기로 했다.
“네. 몇가지 선물도 더 챙겼습니다.”
장미와 리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이를 외국에 알린 왕비의 공이 꽤 컸다.
루비카는 자신이 만든 리본으로 꾸민 구두를 카나 의상실의 이름으로 선물 목록에 넣는 데 성공했다.
사교계의 유명 인사는 탕트 백작 부인을 비롯해 몇 명 만나 보긴 했다. 하지만 왕비 전하는 그들과 궤를 달리하는 진짜 거물이었다.
루비카는 몇 번이고 선물 목록과 준비한 드레스가 왕비의 눈 밖에 나지 않을지 확인했다.
‘앤을 데려갈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수다스럽고 활동적인 그녀가 수도 저택에 가면 에드가의 비밀이 들통날 확률이 높았다. 대신 떠나기 전까지 루비카는 앤에게서 최대한 많은 조언을 듣기로 했다.
“미노스에게서 연락이 없어?”
“이오스 님이 키우는 나무 하나가 요즘 아파서…… 약을 대신 구하느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연통이 왔습니다.”
물을 다 주자마자 리본을 받으러 올 것 같았던 이오스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너무나도 그다운 이유라 할 말이 없다.
어쩌면 나무 앞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휘말려 열심히 약초를 구하고 있을 미노스가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 많이 바쁘구나.”
“그렇지 않아도…….”
칼이 다음 말을 하려다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는 모른 척 넘어가려 했지만 루비카는 이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말해 봐.”
“그, 음…….”
“어서.”
이상하게 루비카의 명령을 어기기가 쉽지 않았다. 에드가는 루비카에게 말할 필요 없다고 했으나 어디 그녀의 말을 들어 안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미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에드가를 배신하고 루비카에게 미주알고주알 고해 바쳤던 칼이다.
“이오스 님과 자칼은행이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요즘 자칼은행에 상담하러 오는 자들이 넘쳐난다고 합니다.”
“이상하네? 드래곤이랑 관련되어 있으면 피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게, 이오스 님의 머리에서 떨어진 황금을 목격한 사람이 꽤 되는 바람에…….”
칼이 우물쭈물하며 루비카의 눈치를 봤다. 차마 그 드래곤이 마님을 구해줬다는 소문이 났다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잘돼서 다행이네. 그래도 미노스가 이오스 때문에 고생한 보람이 있어.”
“……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미노스를 봤으면 좋겠어. 일이 해결되는 대로 왔으면 좋겠다고 전해 줘.”
아마 아픈 나무가 다 나으면 이오스에게 멱살이 잡혀서라도 올 것이다. 칼 또한 이오스를 다시 만날 날을 기대됐다. 그의 목적은 당연하지만 이오스가 가득 가지고 있는 파릇파릇한 차였다.
깊은 밤이 되어 도착한 수도의 저택은 영지 저택의 사분의 일도 되지 않는 크기였지만 루비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최소한의 일손만 있었지만 시끄러운 친척들이 사는 별채가 없다는 것도 꽤나 큰 이점이었다.
‘생각보다 신경 썼었구나.’
있을 때는 너무 당연해서 몰랐는데 없으니까 알겠다. 친척은 멀면 멀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