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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80화 (180/212)

# 18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0화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습니까?”

루비카의 부름에 조금 피곤한 안색의 칼이 바로 달려왔다. 루비카는 사람을 물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에드가의 저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 다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각하께서 직접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이야기해 주긴 했지만…… 내가 걱정할 만한 내용은 뺀 것 같았어.”

에드가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았다. 잠시 칼은 침묵했다. 루비카에게 진실 그대로 고한다면 분명 에드가가 시퍼렇게 변한 얼굴로 자신을 다그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마님에게 진실을 숨기는 게 옳은 일일까? 지금 당장은 괜찮아도 후일 분명 문제가 될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루비카의 예상대로 칼은 그녀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대답했다. 심지어 이야기에 심취한 칼은 그녀가 묻지 않은 점까지 장황히 늘어놓았다.

단 몇 십분 만에 루비카는 에드가가 태어날 때의 상황은 물론 마석이 고갈되어 가는 세리토스 왕국의 기밀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결국 적절하게 칼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음, 칼. 어쨌든 저주는 진행 상태라는 거지?”

“……네.”

칼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대답했다. 루비카는 한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칼을 부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가에게 물었다면 분명 이사실을 숨기거나 축소해서 말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역시 단순히 마석이 고갈되서만이 아니었어.”

“하지만 제가 봤을 때 이제 그 무기를 굳이 개발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내가 봐도 이오스는, 그래, 스텔라까지는 필요하지 않아 보여.”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알 수 없는 드래곤을 떠올리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라는 큰 도박을 하는 것보다 이오스를 어떻게든 잘 꼬여 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럼 황금 평원을 사용하지는 못해도 지나갈 수 있도록 육로만 열어도 왕국의 숨통을 어느 정도 트일 것이다.

“사실 지금 회의에서 스테판…….”

습관적으로 ‘경’이라는 호칭을붙이려던 칼은 재빨리 숨을 골랐다.

“그놈에 대한 문제보다 이오스 님 일이 더 문제입니다. 대체 어떻게 해서 드래곤이 나타난 건지 모두 난리입니다. 일단 각하께서 기밀사항이라고 입막음을 해 둔 상태입니다.”

조심성 없이 사람들 앞에서 본모습을 드러낸 이오스 때문에 루비카는 양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일단 에드가의 임기응변으로 급한 불은 껐으나 이후가 문제였다.

“대책을 세우려면 국왕 전하를 뵈어야겠지? 나도 가야겠어.”

“각하께서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미 에드가는 그녀를 만나고자 하는 국왕의 제의를 몇 번이나 거절했다. 루비카도 어렴풋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국왕 전하는 결국 언젠가는 만나야할 사람이잖아. 계속 이렇게 피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할 거야. 스텔라를 개발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해.”

“동감합니다.”

국왕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거나 그래도 무기를 개발하라고 명령할지도 모른다.

루비카는 에드가에게만 힘든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용기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칼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갑작스레 맞부닥뜨린 상황에 절망하기보다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을 찾아 전진하려 들었다.

“미노스는 내가 가진 푸른 반지의 보석이 이베르의 눈물로 만든 거라고 했어.”

“북쪽 산맥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 말입니까?”

“그래. 혹시 뭔가 아는 게 있어?”

칼은 고개를 젓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돌아가신 공작 각하께서 선대 마님을 처음 만난 것은 북쪽 산맥에서였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거기에 있던 거래?”

“각하의 경우는 마영석 발굴단 때문이었고, 선대 마님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지만 지푸라기를 몇 개 발견했다. 이베르와 님프는 무슨 사이였던 걸까?

하필이면 잠들어 있는 드래곤과 관련되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녀에게는 똑똑한 미노스가 있었고, 이오스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지만 있긴 했다.

“자칼 은행에 미노스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서신을 보내 줘.”

“네, 당장 보내지요.”

희망을 찾은 건 칼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힘이 느껴졌다.

“당장은 말고 칼, 지금 엄청 늦었잖아. 서신은 내일 보내도 충분해. 그만 자.”

“각하께서 깨어계신데 제가 잘 수는 없습니다.”

성실한 칼의 대답에 루비카는 조용히 미소 짓고 강요하지 않았다. 칼은 그녀야말로 잠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권유했다.

사실 아까부터 루비카의 눈꺼풀이 무겁게 깜빡이는 게 무척 신경 쓰였다. 거의 이틀 밤을 자지 못한 그녀였다.

하지만 에드가가 걱정되는 건 매한가지인지 루비카 또한 그를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앤, 마님이 기다리면서 쉬실 수 있게 의자를 가져오십시오.”

칼의 의도를 읽은 앤이 재빨리 흔들의자를 가지고 왔다. 푹신한 쿠션으로 꾸며진 의자는 루비카가 앉자마자 온몸이 나른해지는 안락함을 선사했다.

흔들리는 의자의 규칙적인 리듬감이 주는 평온함은 말로는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으음.”

뒤늦게 루비카는 집사와 시녀장의 꾐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몰려드는 피로와 수면 때문에 이제 돌이키는 건 불가능했다.

도저히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수마에 빠져 들었다.

* * *

지나친 긴장과 피곤 속에 놓여 있던 사람은 드디어 휴식 시간을 가져도 오래 쉬지 못한다. 몸이 긴장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루비카는 잠이 든 지 서너 시간 만에 눈을 떴다. 그사이에 옮겨 놓았는지 그녀는 침대 위였다.

‘역시 그 의자는 계략이었어!’

루비카는 침대에서 발딱 일어났다. 창문이 푸르스름한 걸 보아 어느덧 새벽이다. 주변이 조용한 게 이제 회의도 끝났고 사람들도 돌아간 눈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은 그녀의 곁에 없다. 언제나처럼 집무실로 간 것이다.

‘많이 힘들 텐데…….’

섭섭한 마음보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이 남자는 대체 쉬기는 하는 걸까?

‘하루 정도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내 방에서 쉬어도 되지 않을까?’

격무에 시달려 온 남편이었다. 복잡한 연구나 정치처럼 머리를 아프게 하는 모든 걸 내려놓고 하루쯤은 휴식할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그의 사정은 봐주지 않고 달려들 사람은 많았지만 그쯤은 칼과 함께라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

식사도 그녀가 직접 전해 주겠다고 하면 하녀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그렇게 하루 종일 단둘이 함께 있고 싶다. 좁은 침대가 아니라 넓고 안락한 침대에서…….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안 돼, 안 돼.”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떨치려 애썼다. 사실은 생각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나는 에드가가 무리하지 말고 편안히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의 너른 가슴과 등, 강인한 팔뚝이 떠올랐다. 내내 그녀를 주시하던 짙고 푸른 눈동자는 이미 각인되듯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쓰다듬던 손도…….

“짐승!”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그에게 하는 말인지 루비카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한참 머리를 감싸고 감정을 추스른 다음 하녀를 부를 겸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인! 어떤 놈이 쳐들어왔습니까?”

시커먼 남자 둘이 문이 열리자마자 칼을 꺼내며 외쳤다. 심지어 그들은 호위가 일반적으로 입는 정복이 아닌 갑옷 차림이었다. 그 서슬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 그냥 잠이 깬 거네.”

“그렇군요. 하녀는 저희가 부르겠으니 기다려주 십시오.”

그사이에 경비가 강화된 것 같았다. 하지만 꼭 이렇게 갑옷을 입은 기사를 배치해 둘 필요가 있을까?

루비카는 바로 엊그제 자신이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좀 지나친 것 같지만 며칠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이때의 그녀는 이게 앞으로 평생 일어날 일이란 사실을 몰랐다.

다행히 새벽녘에도 하녀는 금방 왔다. 대충 세수를 하고 실내복을 입은 다음 루비카는 집무실로 갔다.

설마 칼이 나올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졸린 눈을 하면서도 칼이 나왔다. 그는 에드가보다 더한 일중독이었다.

“각하께서 방금 막 잠에 드셨습니다.”

“칼, 이만 가서 쉬어.”

“하지만…….”

“내가 볼게.”

잠시 고민하더니 칼이 그녀에게 열쇠를 넘겼다. 밖에서 여는 열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루비카는 에드가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갔다.

어찌나 곤히 자는지 문을 여는 소리가 제법 났음에도 그는 미동도 없었다.

“깨었을 때 마님이 계시면 기뻐하시겠군요.”

에드가의 소원을 아는 칼은 제법 감동스러웠다. 그는 침대 옆에 루비카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따뜻한 빵과 물도 준비했다.

배가 고팠던 루비카는 앉자마자 빵을 뜯었다. 갓 만든 듯 고소한 향내가 퍼졌다.

“마님, 옛 동화에 나오는 저주의 조건에는 그런 것이 많지요. 진실된 사랑의 키스가 저주를 풀 거라는.”

집사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녀는 눈치챘다.

“음, 하지만…….”

희망을 빼앗는 건 같아 망설여졌지만 그녀는 솔직히 말했다.

“우린 키스도, 서로 사랑한다는 말도 진작에 했어.”

“네. 하지만 어제 처음이지 않으셨습니까?”

집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처음’이 뭔지 루비카는 듣자마자 깨달았다.

원래 집사란 존재는 주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는 법이다. 특히 칼은 다른 집사들과 경우가 다르다 해도 좋을 정도로 에드가와 깊은 사이였다.

“칼, 나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않는가. 루비카의 싸늘한 말에 칼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마님, 죄송합니다.”

“됐어. 나도 이제 좀 익숙해졌으니까.”

에드가를 비롯한 클레이모어 가문의 사람들은 한 가지 생각에 빠지면 그것만 보는 기질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바로 곁에서 오랫동안 일한 덕분인지 집사와 하녀들마저 비슷했다.

루비카는 어차피 그와 자신은 부부 사이라고, 이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마음을 달랬다.

“자는 모습은 천사네.”

달아오른 맘을 진정시키고 새삼 남편을 보니 잘생겼다.

“아니, 평소에도 천사 같지. 정확히는 님프지만.”

처음 만났을 때 ‘저게 인간이란 말이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인간이 아니었다.

신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그녀는 빵을 뜯으며 그를 감상했다. 상아 같은 피부며 짙은 속눈썹까지 매일 보는데 새롭다.

“진짤…… 까?”

칼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저주는 사랑하는 사람과 첫 관계를 하면 풀리는 걸까?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는 그걸 그대로 표현할 수 없으니 첫 키스라고 순화한 게 아닐까?

세상에 그렇게 쉽게 풀리는 저주가 어디 있냐고 생각하면서도 슬금슬금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으음.”

아름다운 얼굴을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드디어 정오가 되자 그의 미간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깰락 말락 하는 몸짓에 그녀의 마음도 간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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