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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79화 (179/212)

# 17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9화

정신을 차린 주치의도 돼지 내장을 거즈에 감싸 유산한 현장을 수습한 것처럼 일을 꾸미는 데 힘을 보탰다.

“집사, 집사.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명 좀 해 주시오.”

더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마차 바깥에서 아우성이었다. 에드가는 무서워 따라갈 용기가 나지 않으니 역시 이럴 때 제일 만만한 건 집사였다.

마차 문을 열기 전 칼은 마지막으로 표정을 점검했다. 사람을 속일 줄 모르는 앤을 가장 걱정했건만 웬걸, 시녀장은 그가 본 것 중에 가장 우울하고 슬픈 표정이었다.

“앤, 당신 연기력이 이렇게 뛰어날 줄 몰랐습니다.”

“분위기 깨는 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 필사적으로 내가 겪었던 모든 불행을 떠올리는 중이니까.”

앤의 입술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기 전 칼이 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눈길에 앤은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큰일났습니다. 아무래도 마님께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큰일이라니.”

“아무래도 크게 놀라셔서 유산을 하신 것 같습니다.”

주치의가 안고 나온 보자기 속 피에 젖은 물체를 본 사람들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루비카를 납치한 스테판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올랐다. 워낙 충격적인 일이었던지라 아무도 갑작스러운 유산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각하께서 그리 급히 부인을 안고 가셨군요.”

“당장 가서 부인의 상태를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나?”

말은 그리했지만 직접 쳐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사람들은 주치의의 등을 떠밀었다.

당황한 주치의가 칼을 쳐다봤다. 괜히 방문을 두들겼다 오붓한 시간을 침범한 방해꾼이 될까 두려웠다.

“가시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집사 또한 마찬가지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주치의는 절로 울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집사. 만약, 만약에 두 분이 방에서…….”

“각하는 그럴 분이 아닙니다.”

절대 안 그럴 것처럼, 세상에서 제일 금욕적으로 생겨 놓고 마차에서 그러지 않았냐고 대꾸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희생양을 된 기분으로 주치의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방문 앞에 서자 겁이 덜컥 났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락거렸던 방이 꼭 지하 고문실처럼 무서웠다.

“크, 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목청을 가다듬는 사이 옆에 있던 집사가 한발 앞으로 나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 순간 주치의에게 칼은 단순한 집사가 아닌 구세주였다. 그래, 집사가 어떤 사람인데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겠어. 괜한 의심을 한 것 같아 후회스러웠다.

“각하, 명령을 어기고 문을 두드려서 죄송합니다. 마님의 상태가 걱정되어 주치의를 데리고 왔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문 너머로 에드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앤은?”

“여기 있습니다.”

“……앤만 먼저 들어오게.”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칼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마님의 상태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남자가 아닌 시녀장님이 먼저 가서 상황을 살피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주치의가 땀을 닦으며 한마디 보탰다.

“각하께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셨군요. 마님께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무엇보다 안정입니다. 저희가 이 앞에서 진을 치고 있으면 각하도, 마님도 불편하실 겁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슬그머니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의 호기심만 앞세워 공작 내외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 중에 루비카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별채에 살고 있던 부인들 중 몇 명은 벌써 안됐다며 훌쩍였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마님을 살핀 뒤에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아래층에 내려가서 기다려 주세요.”

앤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람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난 다음에 공작 부인의 방에 들어간 앤은 눈앞의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닥에는 옷이 잔뜩 떨어져 있고 에드가는 녹초가 되어 의자에 앉아 있다. 이불로 몸을 가린 루비카가 그녀를 보자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설마 그 짧은 사이를 못 참고 방 안에서?

당치도 않지만 나름 타당한 의심을 하려는 순간 에드가가 일어나 앤의 손에 직접 바구니를 들려 주었다.

“앤, 당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깨달았어.”

“네?”

“……옷 좀 입혀 줘.”

바구니 안에는 옷핀과 끈을 비롯한 귀부인의 옷을 입히기 위한 도구들이 즐비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앤은 웃음이 치미는 걸 간신히 참았다. 에드가의 손가락 끝에는 바늘에 찔린 자국이 가득이었다.

루비카를 이불로 감싸고 바람같이 달려 공작 부인의 방까지 온 건 좋았다.

문제는 그녀의 옷은 혼자 입기 어려운 드레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직접 입혀 준다고 에드가는 나름 힘을 내보았지만…….

-거기 핀을 그쪽에 하면…… 아얏!

-찔렸어? 그 방향이 아니라 이쪽 방향이야?

-아앗!

세상에 이리 어려운 일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 알았다. 옷을 입히며 에드가는 이를 갈았다.

왜 이렇게 입히기 힘든가, 아무도 이 불편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난생처음 하지 못하는 일을 접한 그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님께서 가진 옷은 대부분 값비싼만큼 다루기 힘들지요. 저희도 노련한 하녀가 아니면 시키지 않는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올이 나가기 십상이거든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치우며 앤이 특유의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옷방으로 들어갔다. 그냥 꺼낸 옷 중 아무거나 입히면 안 되냐고 말하려는 순간 앤이 나왔다.

“그런데 각하,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지금 마님께서 입으시기 적절하신 옷은 이거예요.”

앤의 손에 들린 옷은 잠옷이었다.

‘빌어먹을, 지금은 한밤중이지.’

에드가는 처음으로 자신이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는 그의 뇌가 정확한 상황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마저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옷장에서 지금껏 산책용 드레스만 줄곧 꺼냈다. 솔직히 말해서 창문 너머로 훔쳐보기만 한 살구꽃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앤, 밖에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던데 나가 봐야 하지 않을까?”

루비카의 의문에 앤이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지금 마님이 유산한 줄 알고 있어요. 건강한 모습을 보이시면 오히려 의심을 살 거예요.”

“유산?”

루비카는 뒤늦게 상황 설명을 들었다. 입을 옷이 없어 급히 뛰쳐나오긴 했지만 마차 안의 상황을 꾸밀 시간은 됐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에드가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답했다.

“경황이 없어서…….”

완벽한 남편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의아해하는 루비카와 달리 앤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때론 천재도 바보가 된다.

“이해합니다. 이해해요.”

“집사와 시녀장을 잘 둔 덕을 보았군.”

무뚝뚝하지만 확실한 칭찬이다.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앤이 활짝 미소 지었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지금 에드가는 신혼 다음 날의 새신랑처럼 얼굴이 빨갛다.

그답지 않는 실수까지 저지르고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차가워지기 전의 그를 다시 만난 것 같아 기쁘기까지 했다.

“어쨌든 아래층에 내려가서 상황을 수습해야겠군.”

“네,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가야 하지 않을까?”

에드가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당신이 무슨, 지금 얼마나 힘들 텐데……. 여기서 푹 쉬어.”

‘얼마나 힘들 텐데…….’ 부인을 걱정하는 남편이라면 응당 할 수 있는 말이건만 루비카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렇게 힘들지 않아.”

“그러지 말고 쉬어.”

“그래요. 스테판 때문에 고생하시고, 많이 쉬지도 못하고 마차를 타셨잖아요.”

뒤늦게 루비카가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고대했던 첫날밤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자신이 유산한 줄 알고 걱정하고 있을 텐데 이게 무슨 추태인가. 루비카는 손가락을 볼에 올려 열을 진정시켰다.

“열이 나?”

“아, 아니.”

하지만 에드가의 눈빛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아내가 주변을 생각하는 마음에 때때로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다고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대었다.

“열나잖아.”

갑작스레 치고 들어온 다정한 스킨쉽에 놀라 루비카는 그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고 대답도 못했다.

“주치의를 불러 살피게 해.”

“네, 각하.”

“따뜻한 물이랑 음식도 챙기고.”

“네.”

침대를 떠나려는 그의 손을 그녀가 잡았다.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수심 깊은 얼굴이 왜 이리 뿌듯하고 기쁠까? 에드가가 귀 밑으로 삐져나온 머리를 넘겨주며 웃었다.

“앤이 한 말 들었지? 어쨌든 당신은 유산한 산모야. 날 그런 부인을 고생시키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지 말아 줘?”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녀가 고마웠다. 하지만 이제 그만 고생시키고 싶었다.

바로 곁에서 그녀를 지키고 보호하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했다. 에드가의 의중을 읽은 루비카는 결국 고집을 꺾고 물러섰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에드가는 못 참겠다는 듯 이마에 또 입을 맞췄다.

“그, 그만.”

계속되는 스킨십에 결국 루비카도 참지 못하고 항의했다. 그녀를 더욱더 부끄럽게 만드는 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자신을 보는 남편의 눈이었다.

“앤도 있잖아.”

작게 항의의 말을 속닥거렸는데 그걸 들었는지 앤이 활짝 웃었다.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네요. 하지만 각하, 마님께서 부끄러워하시니 사람들 앞에서는 자제하세요.”

“……알았네.”

말은 그리하면서 미련을 떨치지 못했는지 에드가는 한참 동안이나 루비카의 손을 놓지 못했다.

보다 못한 앤이 등을 떠밀었다. 문을 닫고 나가는 와중에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편이 걱정되는 건 루비카도 마찬가지였다. 별 이상 없다는 주치의의 진찰이 끝나자 앤이 이불을 덮고 그만 누워 잘 것을 권했지만 루비카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야기가 많이 길어지는 것 같은데…….”

“스테판 경의 처리 문제부터 처리해야 할 문제가 많은 것 같네요.”

다들 모여 회의실에서 의논을 하는 눈치였다.

‘낮이 되면 저주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수 없으니 지금 한 번에 처리하려는 걸 거야.’

진찰을 하는 동안 주치의가 에드가가 어째서 갑자기 걸을 수 있게 됐는지 루비카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충 잠깐 다리가 마비되었던 것 같았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에드가가 대략 이야기해 주긴 했으나 분명 그녀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 몇 가지 사안은 축소시켰으리라.

“앤, 칼을 좀 불러 줄래?”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자나 깨나 공작 생각밖에 없는 칼이다. 그는 적어도 루비카가 걱정으로 뜬 눈을 지새울까 염려해 낙관적으로 말할 리 없다.

오히려 에드가를 좀 살려 달라고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상황을 최대한 비관적으로 말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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