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8화
루비카가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게 져 주는 아내가 못내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평소에 그녀가 그를 아무리 가지고 놀고 무시하든 이 순간 그의 말에 따라 준다면 기꺼이 심장을 짓이겨 달라고 발아래에 바칠 용의가 있다.
“에드가.”
따뜻한 욕조물에 옷이 젖기 시작해 그녀의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둥그스름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몸은 그의 단단한 몸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같은 인간인데 어쩜 이리 다를 수 있는 걸까?
“서두를 필요 없어.”
그녀에게 하는 말일까?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어쨌든 그녀 앞에서 서투른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에드가는 침착하게 욕조의 물을 잠그고 비누를 꺼냈다.
“내가 해 줄게.”
그녀가 그에게 다가갔다. 욕조 밖으로 물이 흘러 넘쳤다. 찰방거리는 물소리가 한없이 낭만적으로 들렸다.
그녀가 그의 손에서 비누는 빼앗아 가 거품을 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비누 거품 때문에 손가락의 촉감이 더욱 매끄러웠다.
“너무 하는군.”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다. 비누는 또 하필 그가 평소에 애용하는 것이 아니라 루비카가 자주 사용하던 것이다. 전신에 그녀의 향이 퍼져 참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루비카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참아, 깨끗이 씻어야지.”
언제는 참지 말라더니 지금은 참으란다. 방금 부끄러워 눈을 가린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수도원의 수사도 이보다 심한 시험을 맞닥뜨리지 못했으리라.
에드가는 그녀가 깨끗한 물을 그에게 끼얹는 동안 간신히, 정말 간신히 욕망을 참았다.
“자, 다 했…… 엇!”
마지막으로 발끝의 거품까지 씻어 내는 순간 그가 욕조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항의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침대로 직행했다.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놀리는 것도 정도껏이여야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가 위로 올라와 속삭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정염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불꽃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 뜨거움에 그녀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아까는 유혹하더니 지금은 또 모른 척하기야?”
“그, 그건…… 당신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사람이 피가 몰려 죽을 뻔한 광경을 보고 그녀는 재미었단 말인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에드가가 웃음을 흘렸다.
“날 놀렸으니 대가를 받아야겠어.”
이렇게 화가 난 에드가를 본 적이 없다.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좀 심하게 놀리긴 했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에 영혼까지 꿰뚫린 것 같아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가 다가오자 그녀는 두려움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닿은 것은 그의 뜨거운 입술이었다.
호흡까지 앗아갈 정도로 그는 깊게 키스했다. 강한 자극에 그녀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놀린 대가로 이런 키스를 할 줄은 몰랐다.
“무서워?”
격렬한 키스를 할 때는 언제고 그는 이번에는 이마를 조심스레 매만지며 물었다. 잠시 고민했으나 루비카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긴장되지만 무섭지는 않다.
“심장 소리가 쿵쿵 크게 들려.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이 뜨겁고 정신없어. 하, 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아.”
그녀의 생애 누군가를 이렇게 욕망해 본 적이 있었던가. 이곳에서 그를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의 남자로 만들고 싶다.
“나도.”
에드가가 낮게 속삭이며 천천히 그녀의 옷을 묶은 끈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능숙히 끈을 풀고 싶은 마음과 달리 끈은 점점 꼬여 가더니 급기야는 매듭이 단단해지고 말았다.
“킥킥.”
결국 루비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새삼스레 그 또한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얼마나 긴장되고 떨릴까?
“우리 오늘은 그만…….”
그 순간 그가 옷을 찢었다.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농밀해졌다.
그의 손이 스칠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에 당황스러웠으나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그녀가 고마웠고 사랑스러웠다.
“무서우면…… 많이 무서우면 말해.”
본인이 경험이 많다면야 모르겠지만 에드가 또한 이 모든 일이 처음이었다. 도저히 그녀에게 ‘무섭지 않게 할게.’ 같은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섭다고 하면 그만둘 거야?”
그녀가 조금 달뜬 얼굴로 새침하게 말했다.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사라니까.’
그는 항상 오만한 표정을 짓고, 차갑게 명령을 내렸으나 상식의 선을 넘은 적은 없다.
“그럼 내가 무서워도 무섭다는 말 못하잖아. 에드가, 너라면 다 괜찮으니까…….”
이럴 때 항상 먼저 용기를 내는 건 그녀였다. 에드가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천천히 하나가 되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쁨이었다.
“루비카.”
“응.”
그녀를 눈 한가득 담은 그가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의 부름에 기꺼이 대답했다.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그녀보다 훨씬 큰 그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 그녀는 그의 너른 등을 팔로 감쌌다.
“사랑해.”
이 순간, 그녀를 가득 채운 행복을 표현하기에 그 말처럼 적당한 것은 없었다.
* * *
실종된 공작 부인을 납치한 자가 하필이면 실력 좋기로 유명한 호위대장이었기에 저택의 모든 사람들은 어제부터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제나 저제나 무사하다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때 공작 내외를 태운 마차가 한밤중의 저택에 도착했다.
“각하!”
휘황찬란하게 커진 저택의 불 덕에 주변은 한낮과 같았다. 마차가 서자마자 연구소의 소장은 물론 호위대의 부단장이 뛰어갔다.
먼젓번에 온 소식에 에드가가 다리를 다쳤다고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각하께서 놀라겠습니다.”
하인용 마차에서 내린 칼이 그들을 말렸다. 칼의 뒤를 앤과 주치의가 따랐다. 그들은 출발하기 전에 스테판 때문에 놀라 마님이 유산한 것으로 하기로 미리 에드가와 입을 맞췄다.
“저택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약속한 대로 마차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칼이 눈짓으로 앤을 준비시켰다.
이제 허둥대는 각하의 목소리가 들리면 둘이 재빨리 마차로 뛰어 들어가 꾸며진 현장을 발견하고 놀란 척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앤은 제대로 호들갑을 떨 것이다.
“각하, 각하, 각하?”
하지만 두 번 부르고, 세 번 부른 뒤 마차 문을 두들겼는데도 반응이 없다.
이 지경이 되자 당황한 건 칼이었다. 마차가 이동하는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각하가 아무리 마님과 단둘이 있고 싶다고 말해도 시종 하나 정도는 남겼어야 했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각하, 문 열겠습니다.”
“기다려!”
그때 급박하게 들린 에드가의 목소리에 칼은 안도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에드가는 못하는 일이 없었는데 연기와 밀고 당기는 기술마저도 그런 것 같았다.
‘이제 각하께서 주치의를 부르고…….’
그러나 약속과 달리 문이 먼저 열렸다. 놀랄 새도 없이 에드가가 뛰어나왔다. 그는 꽁꽁 둘러싼 이불을 안고 있었는데 이불 아래 살짝 나온 발은 틀림없이 루비카였다.
“가, 각하?”
다리를 다친 척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두 다리 멀쩡하게 나와 계시면 어쩌나, 칼이 당황하는데 에드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외쳤다.
“따라오지 마!”
서슬이 퍼런 명령에 칼은 얼음이 되었다. 그건 돌아온 에드가를 환영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저택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에드가는 정말 따라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그들을 노려본 후 빠른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총총 사라지고 말았다.
“어, 어찌해야 하나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사람들 중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린 앤이 칼에게 물었다.
“일단은…….”
칼은 에드가의 눈빛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그가 여태 본 공작의 눈빛 중 가장 사납고 매서웠다.
“각하께서 명하신 대로 쫓아가지 맙시다. 필요하면 부르실 겁니다. 저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차 안을 먼저 확인해 보지요.”
영민한 분이니 이유 없이 저런 행동을 할 것 같지 않았다. 칼의 판단에 앤이 동조했다.
그녀는 방금까지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못한다는 환자가 일어섰단 현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주치의를 끌고 함께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은 겉보기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욕조의 물이 넘쳤는지 카펫이 젖어 있었고, 침대도 물기 때문에 좀 축축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에드가는 그들과 먼저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그의 서슬에 모두 겁을 집어먹어 셋을 제외하고 아무도 마차에 들어올 생각조차 못하고 있으니 일을 꾸미기에 늦지 않을 성싶었다.
“앤, 돼지 피와 창자를 넣어 둔 상자는 어디 있습니까?”
“이쯤일 거예요.”
앤이 침대 아래에 숨겨 둔 상자를 꺼냈다.
“뭔가 손에 걸리는데? 칼, 옷가지 같아요.”
“일단 꺼냅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공작 내외의 안전이다. 칼은 침대 아래에 어떤 미지의 물건도 두고 싶지 않았다. 마찬가지였던 앤이 손에 잡힌 것을 쭉 꺼냈다.
“어머나!”
낯부끄럽게도 그것은 방금 전까지 루비카가 입고 있었던 드레스였다. 도저히 다시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드레스는 찢겨 있었다. 앤은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달아오른 볼은 진정시켰다.
“이, 이 옷이 왜 이럴까요?”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세 사람 모두 정답을 안다.
“아아, 그렇군요. 그래. 제가 마님께서 입으실 여분의 드레스를 미처 챙기지 않는 바람에…….”
나오려고 보니 루비카가 알몸이다. 그래서 에드가가 그녀를 이불로 꽁꽁 감싸 안고 뛰었던 것이다.
“제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아니, 여기까지 오는데 고작 몇 시간 걸린다고 그새를 못 참으시나.”
루비카와 에드가가 벌써 오래전에 부부 관계를 치룬 줄 아는 앤이 드레스를 잘 접어 숨기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광대는 결국 솟아오르고 말았다.
“한창때지요, 한창때. 서로 눈만 마주쳐도 불이 붙는. 각하의 마음 이해는 합니다.”
“흠흠.”
아까 했던 말과 정반대의 말을 꺼내는 게 아무래도 시녀장의 정신이 마차를 떠나 밀밭으로 가 버린 것 같아 칼이 적절하게 헛기침을 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침대에 돼지 피를 뿌립시다. 경께서는 각하께서 너무 놀라 그러신 것 같다고 잘 이야기해 주십시오.”
“네? 네!”
칼의 부름에 주치의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의사라 아무래도 임기응변이 부족하다. 이럴 때 믿을 만한 건 역시 노련한 칼뿐이다. 앤은 그가 시키는 대로 먼저 침대에 피를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