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6화
“미노스는 그냥 은행원이야. 하인처럼 부리면 안 돼.”
그녀는 엄격한 표정을 짓더니 문을 닫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에드가의 얼굴에 미노스는 위험을 감지했다.
그는 불똥이 튀기 전에 차 항아리를 들고튀었다. 홀로 남겨진 에드가는 욕설과 함께 애꿎은 베개를 던졌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주울 방도가 없다.
“배게는 어째서 여기까지 떨어졌지? 바람이 그렇게 세지 않은데…….”
미노스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인 대신 시중을 들러 온 종자가 그나마 평소 이미지 때문에 그 베개를 그가 던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게 유일한 위로였다.
* * *
미노스에게 차 항아리를 전달받은 칼은 잠시 비틀거렸다. 차마 눈부셔서 항아리 안을 확인할 엄두도 안 난다는 표정이었다.
“이거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 지…….”
“제가 한 건 없습니다. 다 마님이 하셨지요.”
미노스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호위를 하고 있는 기사들은 물론 사제관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고블린의 등장에 흥미를 감추지 못했다.
그 흥미는 호의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고블린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편이다. 그를 편견 없이 대하는 공작 부부가 특이한 편이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벌써? 미노스, 많이 배고플 텐데…….”
“아니요. 볼일이 끝났으니 저도 이만 가야지요.”
루비카가 깜짝 놀라며 만류했지만 미노스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같은 존재와 친근한 사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봤자 루비카에게 좋을 건 없다.
“음, 부인. 이 차가 어디에서 나는지에 대해서도 불문에 부쳐 주십시오.”
고블린이 그러한데 오랜 시간 인간과 반목한 드래곤과의 친분은 더욱 위험하다.
다행히 루비카는 미노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지금이야 이오스가 그럭저럭 귀엽게 굴지만 그는 원래 사납고 포악한 드래곤이다.
“따로 거래할 곳이 생겼다고 해 두지.”
“각하께서 계시니 별 걱정은 안 합니다.”
미노스는 말을 준비하겠다는 칼의 말에 자신은 땅을 통해 가는 게 더 편하니 가까운 밭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다른 기사들에게 미노스의 안내를 맡기기 불안했던 칼은 본인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마차는 30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네. 의사와 시녀님도 함께 온다고 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시녀는 분명 앤일 것이다. 도착하면 이곳이 떠들썩해지겠단 생각이 들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에드가에게 가져가는 게 좋을 듯싶어 주방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부인?”
주방에는 마침 사제가 아이들과 함께 빵을 반죽하고 있었다. 작은 사제관이니 요리사가 따로 없는 게 당연했다.
“잠깐 각하께 드릴 게 없나 싶어 왔네.”
“보다시피 준비된 음식이 없어 지금 만들고 있습니다.”
사제가 가리킨 오븐에서는 빵이 맛좋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루비카는 작은 주방을 둘러보았다.
오기 전에 대충 본 아이들의 수를 고려해도 식료품이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일손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팔을 걷어붙였다. 오랜만에 수도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도와줄게.”
“아.”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육체도 신분도 다르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과 고운 얼굴을 보며 사제는 낭패스런 얼굴을 했다.
고귀한 신분의 부인이 힘이 잔뜩 들어가는 빵 반죽을 해 봤을 리 없다. 귀족 부인이 하는 요리란 대체로 큰 힘이 들어가지 않는 섬세한 요리다.
편견은 사제에게 루비카가 도와주면 일이 더디어질 거라는 판단을 내리게끔 했다.
“그보다 아이들과 놀아 주시면 안 되나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방 식탁 아래에서 다섯 살 난 아이가 툭 튀어나와 외쳤다.
“그래도 되나요, 사제님?”
“아직 허락은 맡지 않았단다, 제프.”
사제가 친절히 타일렀지만 제프의 귀에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제프는 루비카에게 다가가 그녀의 치마를 잡고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요리하는 사제 옆에서 칭얼거리던 아이들의 반절 이상이 루비카에게 옮겨갔다.
갑자기 나타난 고운 얼굴을 한 부인은 그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만 신분이 높기에 괜히 얼씬 거리면 큰일 날까 참았을 뿐이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부인? 보다시피 애들이 제게서 떨어진 것만으로도 저는 한결 수월해져서요.”
주방에 있던 아이들은 도와준다는 핑계로 사제의 옆에 있었으나 사실은 방해꾼이었다. 한창 사람의 손을 그리워할 때라 내버려 뒀을 뿐이다.
“기꺼이 그래야지.”
루비카는 아장아장 걸어오는 세 살 난 아이를 양팔로 번쩍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사제의 말대로 바깥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게 주방에 남아 일을 도와주는 것보다 효율적인 것 같았다.
“참, 그이에게…….”
“각하께서 드실 음식은 지금 바로 보내지요.”
공작 부인답지 않는 소탈한 모습에 감격한 사제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어차피 마차가 오기 전까지는 30여분밖에 남지 않았다. 루비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과 놀아 주기로 했다.
“누가 내게 마당을 안내해 주겠니?”
“제가 할게요.”
“저요! 저요!”
“제가 잘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아이들이 앞다투어 마당으로 나갔다. 안내보다 달리기 시합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덕분에 마당으로 나가자고 실랑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게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참 밝네.’
사랑과 정성으로 사제가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언제 어디든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 일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이런 좋은 곳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그녀는 다음 축제일에 이곳에 적지 않은 성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와아.”
루비카가 앞마당으로 가자 이미 거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도 그녀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치맛자락이 더러워졌지만 루비카는 신경 쓰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 아이들의 콧물을 닦아 주었다.
“이 꽃은 작년에 심은 거예요.”
“이건 단맛이 나는 꽃이에요.”
화단에 가득 핀 깨꽃 하나를 아이가 내밀었다. 깨꽃을 받아 든 루비카의 눈에 아이의 가슴에서 팔랑거리는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네 가슴에 그건 누가 달아 줬니?”
“제가 달았어요.”
루비카의 질문에 아이는 발그레진 얼굴로 대답했다. 새삼스레 그녀가 주변 아이들을 둘러보니 모두 가슴에 리본을 쪼르륵 달고 있었다.
물론 귀족들이 다는 비단 리본과는 한참 거리가 먼 면직물로 만든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옷차림이 화사해졌다.
“꼭 공주님 같구나.”
칭찬의 말을 건네며 깨꽃을 쪽 빨았다. 향긋한 꽃내음과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하인 대신 따라붙은 호위가 식은땀을 흘렸지만 루비카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도 어릴 때 자주 했던 일이다.
“얌전하게 말 잘 들으면 사제님이 나중에 비단 리본을 사 주겠다고 했어요.”
칭찬에 마음이 풀어진 아이가 묻지 않았는데도 이것저것 쫑알쫑알 이야기했다.
“비단 리본은 비싸지 않을까?”
“가슴을 장식할 정도는 열심히 일하면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럼 정말 공주님 같을 거예요.”
루비카는 조금 형연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비단으로 만든 옷 한 벌은 평민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비싸다.
거기에 보석으로 장식된 스토마커는 대저택의 하녀로 일해야 마나님의 것이라도 한번 만져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일반 평민들은 귀족에게는 잠옷 수준인, 아무 장식 없이 린넨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평생 산다. 그렇듯 옷차림에서부터 귀족과 평민의 경계는 명확했다.
하지만 비단 리본 하나 정도는 살 만했고, 보석이나 자수와 달리 옷 한 벌을 꾸미는 데 많은 돈과 품도 들지 않았다.
옷핀으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점도 장점이었다. 공주님 놀이를 할 때 흙으로 만든 왕관을 쓸 필요가 없다.
비단 리본 하나를 달면 그 아이가 공주였다. 비록 옷의 재질이 고급스럽지는 못해도 충분히 분위기와 느낌을 낼 수 있다. 귀족과 평민의 옷차림에 큰 차이가 사라진 것이다.
“돌아가면 내가 선물로 리본을 보내줄게.”
“정말요?”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할 리 있니?”
루비카는 한창 정원에서 소박한 드레스를 입고 뛰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흙이 잔뜩 뭍은 옷에 면으로 된 리본을 단 옷이었지만 무도회나 차 모임에서 보는 화려한 드레스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자신이 만든 리본을 자랑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 뿌듯했다.
‘그냥 귀족들의 드레스에 다는 걸로 한때 유행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리본은 여태 드레스를 장식하는 데 쓰던 다른 어떤 장식들과 달리 재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귀족들은 비단으로 리본을 만들지만 평범한 천으로도 얼마든지 리본을 만들 수 있고, 요령만 알면 다섯 살 난 아이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간단했다.
식탁보를 장식하는 데도 쓸 수 있고, 커튼을 묶을 때도, 머리를 장식할 때도 사용 가능하다.
애초에 서민인 크리스가 발명해 낸 간단한 매듭으로 출발한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편하고 간단하고 예쁜 것.’
루비카는 뒤늦게 자신이 무얼 발견해 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찾아낸 건 한순간 유행하고 말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건 영원이다. 그리고 그건 귀족이 아닌 평범한 백성의 삶에 스며들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폭넓은 드레스도, 거추장스러운 코르셋도, 레이스를 잔뜩 쓴 아가장트 소매도 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바뀌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에 스며든 리본은 다를 것이다. 불필요하지만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좀 더 튼튼하고 오래 가는 면직물이 생산되면 좋겠어.”
아이의 옷에 뚫린 구멍을 보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요즘은 좀 더 화려하고 광택이 나는 천이 없는지 고심하느라 수입 천 항목을 찾았다.
“옷 만드는 데 드는 품도 줄면 이 사람들도 좀 더 좋은 옷을 입겠지.”
에드가에게 바느질하기 쉬운 발명품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는 카나의 손을 조금 덜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귀족의 드레스는 섬세한 작업이 요구된다. 아마 기계를 발명해도 많은 작업의 절반 이상을 손으로 해야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내 옷은 기계 따위로 만들지 말라고 명령할 것이다.
하지만 서민들이 입는 옷은 다르다. 루비카는 어떤 디자인으로 해야 직접 바느질을 하는 작업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직선을 살리되 입기 편해야 한다.
‘이왕이면 한 번에 혼자 힘으로 입을 수 있는 게 좋을 텐데…….’
드레스 뒤에 끈을 묶어 고정하는 스타일은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힘들다. 옷을 묶거나 고정하는 장치가 앞에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끈도 시간이 지나면 풀리기 일쑤이니 좀 더 편하고 간편한 장치가 좋다.
‘맞아, 단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