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5화
“그렇지 않아. 칼이 얼마나 차를 좋아하는데.”
“같은 잎인데 맛이 다르잖아.”
“자, 이것 봐. 잎 색이 다르지? 같은 나뭇잎이라도 어떻게 보관하냐에 따라서 전혀 달라지는 거야.”
칼이 그동안 워낙 옆에서 떠들어 댄 턱에 루비카도 차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나마 있었다.
대신 그녀는 칼처럼 어려운 용어로 설명하지 않고 이오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설명했다.
“그래서였군.”
너무 쉽게 납득해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루비카는 새삼스레 이오스가 걱정되었다.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같다.
어쨌든 찻잎이 대충 주머니에 꾸겨 넣고 다닐 정도로 이오스에게 흔한 것이라 할지라도 세리토스 왕국에서는 귀한 것이다. 루비카는 먼저 고마움을 전했다.
“이오스, 귀한 차를 선물해 줘서 고마워.”
“이게 귀하다고?”
이오스가 잠깐 팔짱을 끼더니 미노스를 불렀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미노스가 땀을 닦았다.
미노스는 그동안 이오스에게 차나무는 드래곤의 권역에서만 나는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찻잎을 챙겼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
“루비카가 아니었으면 네 녀석에게 끝까지 속을 뻔했네. 세상에 믿을 고블린이 없다더니!”
이오스가 미노스의 목을 잡고 탈탈 털었다. 그것만으로도 작은 고블린은 거위 소리 같은 비명을 질렀다.
좀 더 끝장나게 괴롭히고 싶었으나 루비카 앞이라 참았다. 님프가 폭력을 싫어한다는 말이 은연중에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차나무는 네 권역에서만 자라나 보지?”
차에 대한 미련이 뚝뚝 떨어져 여전히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칼을 내보내며 에드가가 물었다. 이오스는 불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태 어디서나 자라는 흔한 나무인줄 알았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네.”
“드래곤의 권역에서만 자라는 식물 중 하나였기에 동제국에서만 수입이 가능했나 보군.”
드래곤이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차를 그리 많이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근의 나라나 대륙의 몇몇 나라들이 차나무를 재배하려 했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지금 그 차 가격이 급등해 골치 아픈 중이야. 찻잎을 좀 우리에게 팔 수 없나?”
차 가격이 오르는 데는 바로 루비카가 주최한 차 모임이 한몫했단 사실이 에드가는 못내 신경 쓰였다.
국왕 전하가 은근히 그녀를 보고자 하는 의중을 비추었다. 혹여나 루비카가 이 일로 꾸지람을 듣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싫은데?”
“흔하다면서?”
“나한테는 흔하지만 너희한테는 귀하다며?”
이오스가 삐딱하게 나왔다. 흔히 자라는 줄 알았을 때는 미노스에게 그리 쉽게 내주었는데 귀하다는 사실을 알자 그동안의 억울함이 몰려왔다.
“돈을 지불하지.”
“인간의 돈 따위 나한테는 휴지 조각이야.”
팽팽한 긴장감이 이오스와 에드가를 감쌌다. 평소에는 그리도 말을 잘하고 협상도 잘하던 남편이 지금은 이오스와 비슷한 수준의 말싸움을 벌였다. 루비카는 일단 에드가를 진정시켰다.
“이오스가 싫다면 강요할 수 없지.”
잠시 입가의 근육이 씰룩였지만 에드가는 곧 ‘그래.’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흥분해도 루비카가 말리면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 상황에서 민망해진 건 이오스였다. 눈에 거슬렸던 에드가와 싸울 핑곗거리가 생겼다고 기뻐했는데 상대가 물러서는 바람에 이쪽만 부끄러워졌다.
“흥, 그런데 차는 왜 필요해?”
이오스가 의자에 앉으며 손톱을 보는 척했다. 관심 없는 척하지만 관심 있는 티가 제법 났다. 루비카는 이오스가 자신에게 가지는 호감을 이용하기로 했다.
“내가 유행시킨 모임 때문에 찻값이 너무 올라서 곤란한 상태야.”
“곤란하다고?”
“이대로라면 다들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욕할 거야.”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는 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루비카가 싫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아까와 달리 이오스는 제법 진지하게 팔짱까지 꼈다. 그 돌변한 태도에 에드가의 속이 탔다.
저 드래곤이 뭐라고 제 아내의 일에 저렇게까지 참견하고 해결하려 드는지. 주제넘다는 표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사촌 누나가 곤란하다면 내가 도와줘야지.”
이젠 사촌이라는 말을 붙여도 누나라는 표현이 거슬렸다.
“고마워.”
루비카가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자주 느끼지만 아내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너무 친절하다.
이 일이 루비카와 관련되지 않았다면 에드가는 진작에 훼방을 놓았을 거다. 그는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냈다.
“나도 고맙네. 덕분에 아내의 걱정이 덜어졌네.”
평소처럼 루비카라고 부르지 않고 ‘아내’라고 호칭했다. 사촌 누나보다 남편이 훨씬 더 가깝고 유일무이한 존재다. 은연중에 뻐기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이, 억지로 웃지 마.”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 이오스가 그의 표정을 지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또다시 말싸움이 시작될 기미에 루비카가 끼어들어 중재했다.
“필요한 양은 미노스에게 말하면 될까?”
돌아가면 이오스에게 어떤 방식으로 혼날지 벌벌 떨고 있었던 미노스가 환히 웃었다. 루비카가 그에게 구명줄을 내려줬다.
공작가에 차를 옮기는 일을 맡으면 적어도 이오스가 혼을 낼 때 그의 겉은 멀쩡하게 내버려 둘 확률이 높다.
역시 돌아가면 미노스부터 털 생각이었던 이오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내가 하면 안 될까?”
“산수 잘해?”
이오스는 고개를 저었다. 잘할 리가 없다. 또 잘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여태 어렵거나 머리 아픈 일은 미노스에게 다 맡겼다.
어쨌든 그의 두뇌로 몇십 년간 일한 고블린이다. 많이 챙겨 가면 이오스가 화를 낼까 두려워한 덕분에 그간 미노스가 챙긴 차의 양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이쯤에서 그를 공포에서 놓아주기로 했다.
“미노스, 이번에도 속이면 이 황금가루 주을 일은 두 번 다시 없다는 걸 명심해.”
“맡겨 주십시오, 이오스 님. 제가 차에 눈이 멀어 실수를 저지를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항아리 가져와.”
충성 맹세를 하고 있는 와중에 생뚱맞게 내려진 명령이다. 하지만 미노스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방 안에 있는 빈 항아리 하나를 가져왔다.
“이건 너무 작잖아. 저거.”
어른 머리만 한 항아리를 가져오자 이오스가 뒷주머니에서 차를 꺼내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지 항아리 하나를 다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저 주머니 안에 어떻게 저런 양이 들어갈 수 있었지?’
뒷주머니는 이오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납작했고, 지금도 납작하다.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이 정도면 하루치로 충분하려나?”
일 년을 먹고도 남을 녹차였다. 흔하다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냥 홍차도 아니고 녹차이니 사고자 하는 사람이 줄을 설 것이다.
국내의 수요만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외국으로 수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비카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렜다.
“이오스, 리본으로 나무에 장식을 하고 싶다고 했지?”
이오스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었던 루비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리본을 꺼내 꽃 모양으로 묶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파란 꽃 모양 리본이 완성되었다.
“어때?”
이오스가 시장에서 본 리본은 비교적 단순한 모양이었다. 공예처럼 섬세한 리본에 이오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명의 향기가 없는 물체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식물의 그림자가 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님프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존재가 틀림없다.
“이걸 달면 한겨울에도 꽃이 핀 것처럼 보이겠네.”
권역의 중심부는 사시사철 푸르렀지만 힘이 덜 미치는 외곽 지역은 어쩔 수 없이 계절의 흐름을 탔다.
겨울이 되어 잎과 꽃이 다 떨어진 나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아팠던가.
“당장 가서 달아야겠어.”
이오스는 루비카의 손에 있던 리본을 뺏다시피 낚아채더니 창문을 열었다.
“몇 개 더 만들어 줄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오스가 사라졌다. 바람처럼 등장하더니 바람처럼 사라진다.
진짜 천방치축 남동생 하나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것도 다 큰 남동생이 아니라 이제 갓 다섯 살 정도 된 남동생 같았다.
“다시 돌아오겠지?”
“아니오.”
미노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걸 나무에 달다가 지난 밤 내내 여기 있느라 물 주는 걸 깜빡했다는 걸 깨달을 겁니다. 아마 오늘 하루 종일 나무에게 물만 줄 걸요?”
“그렇구나. 그럼 집으로 돌아가서 이오스에게 줄 리본을 만들면 되겠다. 얼마나 필요할까?”
에드가가 루비카의 손을 잡았다. 작고 가녀린 손은 상처투성이였다. 왼손의 중지와 약지는 심지어 손톱이 깨져 있었다. 어젯밤 그녀는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당신이 직접 하지 마. 손 좀 봐. 아까 리본을 묶을 때도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이 장식은 아직 나만 만들 수 있는데…….”
“침모에게 한번만 시범 보여 줘. 이 정도도 못 따라하면 다들 공작가에서 월급 받을 생각 말아야지.”
말은 그렇지만 이오스가 그녀가 만든 리본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다.
돌아가서 리본을 만들어도 침모에게 그녀가 시범으로 보인 것을 잘 숨겼다가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이를 예정이다.
“손이 아프긴 한데…….”
그의 검은 속내도 모르고 루비카는 그가 마냥 자신을 걱정해 준 게 고마워 얼굴이 빨개졌다.
제 손이 이렇게 상처투성이인 줄 그녀도 몰랐다. 그는 얼마 전부터 신경 쓰였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발목에 난 생채기부터 시작해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다. 에드가 쪽을 보지도 못하고 치마만 매만지던 그녀가 갑작스레 외쳤다.
“참, 지금쯤이면 마차가 도착하지 않았을까? 칼에게 물어볼게!”
그리고 후다닥 방을 나갔다.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다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고 유혹하던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진한 모습이었다.
에드가는 또다시 뻐근해지려는 아래를 필사적으로 가라앉혔다.
“아 참.”
하지만 방금 나간 루비카가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통에 그의 노력은 소용없어졌다.
문틈 사이로 살짝 나온 얼굴이 지나치게 귀엽다. 왜 자꾸 그러는지, 자신을 말려 죽일 속셈이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미노스도 이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네. 아, 차 항아리는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루비카가 방 안에 다시 들어오길 무척 부끄러워한다는 걸 눈치챈 미노스가 나섰다.
루비카는 그의 친절이 달가웠으나 에드가는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루비카.”
에드가는 이를 꽉 깨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그녀를 불렀다.
“칼에게 마석마차가 언제 올지 알아보는 것도 미노스에게 시키고 당신은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