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4화
“고모나 이모, 둘 중 하나 선택해.”
“그건 안 돼.”
이번엔 이오스가 반대했다. 이베르가 있는데 루비카를 그와 비슷한 호칭으로 부를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이베르가 잠에서 깨면 무척 섭섭해할 것이다.
“그럼 음……. 오촌 아주머니?”
“아주머니라니!”
이번에는 루비카가 반발했다. 아무리 긴 생을 살았어도 지금은 22살이다. 이 젊은 나이에 아주머니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반발에 에드가의 고민이 깊어졌다.
루비카는 ‘누나’라는 말을 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에드가가 상심할 것 같았다. 남편이 보기보다 독점욕이 강하고 섬세하다.
“사촌 누나는 어때?”
이미 종종 편지를 주고받는 사촌 동생인 안젤라가 있다. 사촌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히 아주 힘겹게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진 허락에 루비카는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좋아, 이오스 앞으로 누나라고 불러도 돼.”
“사촌을 꼭 붙여서.”
에드가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사촌 누나랑 누나랑 뭐가 다르지?’
이오스의 무식은 해구 수준으로 깊었다. 인간의 풍습이나 관계에 대해서 무지한 그는 ‘사촌’이란 말을 ‘위대한’이나 ‘곰을 때려잡은’ 같은 칭호의 하나로 해석했다.
이오스는 대충 누나 중에서 제일 강한 누나를 가리키는 말이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내 사촌 누나 아니야.”
“어차피 난 남자라서 네 누나 할 수 없다. 어쨌든 리본은 얼마나 필요하지? 원한다면 아예 기계를 만들어서 보내 주지. 사용법은 미노스에게 알려 주면 되려나.”
미노스는 활짝 웃었다. 아까와 달리 이제 대가없는 친절이 찝찝하지 않다. 신이 난 이오스는 미노스에게 예전 루비카와 계약한 종이를 찾아서 파기하기로 했다.
“넌 이제 내 가족이니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만 해.”
이오스의 장담에 미노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루비카는 이오스를 단단히 구워삶았다.
아마 그녀가 무슨 부탁을 하든 이오스는 ‘누나의 부탁이니까!’라는 이유로 들어줄 것이다. 그가 가장 아끼는 희귀 식물을 줄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도 이오스에게 가족이 되자고 제의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의 콩알만 한 담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필요한 거…….”
황금 평원을 좀 빌려 달라는 말을 해도 괜찮을까? 이오스가 혹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힐끗 시계를 보니 에드가가 차를 마실 시간이 조금 지났다. 루비카가 문을 열자 칼이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제대로 구색을 맞춘 티세트를 가지고 왔다.
칼을 따라온 하인 몇 명이 구석에 있던 탁자를 침대 가까이로 옮기고 칼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곧 사제관의 좁은 방이 향긋한 차향으로 가득 찼다.
“에드가가 좋아하는 차네? 이건 대체 어디서 구했어?”
“구한 게 아니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바쁜 때에 차를 챙겨 왔단 말이야? 집사의 엄청난 준비성에 루비카는 혀를 내둘렀다. 어쩜 이렇게 살 수 있는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어머, 우유랑 설탕도 있네?”
평소라면 먼저 청하기 전까지는 절대 챙기지 않았을 물건이다. 그래도 자신이 하루 종일 고생했다고 꼬장꼬장한 집사답지 않게 배려를 해 준 것 같아 감동스러웠다.
“고마워, 칼.”
“손님들도 드시겠습니까?”
이미 테이블 위에 네 명분의 티세트를 완벽히 세팅하고 질문했다. 이건 먹으라는 명령이나 다름없다.
미노스는 기꺼이 마시겠다고 대답한 뒤 의자 위에 올라탔다. 가여운 고블린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서야만 테이블의 잔을 잡을 수 있었다.
미노스는 눈치 빠르게 테이블의 잔 중 가장 싸구려로 추정되는 잔을 들었다.
“어린 새순만 곱게 따서 만든 좋은 차로군요.”
미노스의 말은 방을 나가려던 칼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어떻게 찻잎도 보지 않고 이미 우린 차를 마셨을 뿐인데 무슨 찻잎을 썼는지 정확히 알아맞힌 걸까?
낯선 고블린에게서 나는 고수의 향기는 칼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맞습니다. 정확하게 아시는군요. 차를 즐기십니까?”
“……네, 좋아하긴 합니다.”
미노스가 켕기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체 뭘 숨기고 싶은 거지?
칼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이오스가 차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깜짝 놀라 확인해 보니 심지어 그가 들고 있는 잔은 칼이 일부러 에드가 쪽에 놓은 가장 고급스런 잔이었다.
바보나 다름없는 놈의 입에 들어간 값비싼 차 때문에 칼은 가슴 한쪽이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더 없어?”
심지어 뻔뻔하게 한 잔 더 요청하기까지 했다.
“내 걸 마시게.”
에드가가 고작 한 모금 마셨던 자기 몫의 차를 이오스에게 내밀었다. 루비카를 만난 후 나날이 넓어져만 가는 그의 배려에 칼은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이오스는 인상을 썼다.
“내가 거지야? 왜 먹던 걸 줘?”
“이오스, 에드가는 널 생각해서 권유한 거야.”
설탕과 우유를 듬뿍 탄 차를 홀짝이며 루비카가 말했다. 놀랍게도 이오스는 역정을 내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먹던 건 싫어.”
그리고 칼에게 빈 잔을 내밀며 아주 당연하다는 듯 요구했다.
“한 잔 더 타 줘.”
그때는 차분하다 못해 칼로 찔러도 표정의 변화가 없을 것 같았던 칼마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차는 마님과 각하가 드실 이틀분밖에 없었습니다.”
“이틀분? 오늘 하루 먹었으니 내일분으로 타면 되겠네.”
“이 인분의 이틀 치면 사인분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해 줬는데도 계산이 되지 않는지 이오스는 멀뚱히 서 있었다. 보다 못한 미노스가 이오스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차가 다 떨어졌다고 말한 겁니다.”
“그래?”
아쉬운 듯 이오스는 빈 잔을 보았다. 한 입에 탁 털어 넣은 태도와 달리 기묘하게도 차 맛을 알다 못해 중독된 자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럼 내 거 줄 테니까 타 줘.”
이오스는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파릇파릇한 잎을 한 움큼 꺼내 칼의 손에 쥐여 줬다.
아무래도 바보 같은 용이 아무 나뭇잎이나 꺼내 차를 우려 달라고 우기는 것 같아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려다본 칼은 깜짝 놀랐다.
그가 알고 있는 찻잎은 대부분 검은색으로, 우리면 붉은빛이 나는 차였다. 책을 읽고 상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찻잎은 원래 녹색을 띤다고 들었다.
하지만 녹색 차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사막을 지나 오랜 항해를 거쳐 들어온 차는 이동 과정 동안 발효가 일어나 자연스레 검게 변한다.
그런데 이오스가 그에게 건넨 차는 녹색이었다. 혹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다시 보고 향기까지 맡아 봤지만 그건 틀림없는 찻잎이었다.
“이 귀한 건 어찌 구했습니까?”
잘 훈련된 기사가 반나절 이상 말을 달려야 겨우 오는 거리를 겨우 몇십 분 만에 오갈 수 있는 드래곤이다. 그 뛰어난 이동 속도로 멀리 동제국에서 차를 구해 온 걸지도 모른다.
“귀한 거라고? 이게?”
이오스는 정말 황당한 말을 다 들어 본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 우리면 좋은 향기가 나긴 하지만 이건 나뭇잎이잖아. 매해 지고 새로 나는 별로 예쁘지 않는 나뭇잎.”
“분명 나뭇잎이긴 하나 귀한 나뭇잎입니다. 그리 흔한 거라면…… 더 구해 주실 수 있습니까?”
차를 향한 열망은 칼이 겁을 상실하게끔 만들었다. 책을 통해서 읽은 녹차의 실물을 영접하니 이제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오스가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질 심산이었다.
“인간 주제에 내게 부탁을 하는 거야, 지금?”
이오스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어이없게도 그는 칼에게 부탁받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루비카는 황급히 제 몫의 차를 다 마시고 이오스를 달랬다.
“칼은 네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부탁을 한 거야. 널 무시해서가 아니라 대단해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인간 따위가…… 인간 따위가 내게 부탁을 했다고! 이 드래곤을 뭘로 보고!”
“사람들은 신에게도 부탁을 해. 기도 같은 거 말이야. 네가 신에게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야.”
살살 치켜세우는 말을 해 주자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 이오스의 기세가 수그러졌다.
“날 무시한 게 아니야?”
“그래. 부탁은 아랫사람에게 하는 명령 같은 게 아니야. 싫으면 거절하면 되고, 마음이 내키면 들어주면 되고.”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칼이 먼저 사과하자 이오스가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괜찮아. 누나가 설명해 줘서 내가 오해한 걸 알았으니.”
“사촌 누나!”
에드가가 호칭을 하나 빠뜨렸음을 지적했지만 이오스는 무시했다.
“어쨌든 넌 차를 맛있게 끓이니 이걸로 한 잔 더 타 와.”
“네.”
미노스는 깜짝 놀랐다. 말투는 저렇지만 이오스가 인간을 칭찬하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이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공작 부부가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정말 대단하구나. 천하의 이오스 님을 저리 순하게 만들다니.’
여태까지 이오스를 잘 다루는 방법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그저 비위를 맞추는 방법을 알았을 뿐이다. 행동을 교정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이오스는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데 깊은 긍지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드래곤으로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말에도 자신을 무시하냐며 벌컥 화내기 일쑤였다.
그런 이오스가 루비카의 충고만은 별 의심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니 자신에게 해가 되는 말을 할 리 없다고 믿는 듯싶었다. 이오스를 다루는 데 이렇게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이오스 님, 저랑도 가족 하실래요?”
“내가? 너랑? 왜?”
미노스는 큰 꿈을 안고 이오스에게 제의했으나 바로 좌절했다. 루비카가 이오스와 가족이 되는 데 성공한 건 조건 없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서였다.
이오스의 말을 잘 듣긴 하나 그가 떨어뜨리는 황금을 지금 이 순간에도 놓치지 않고 줍는 미노스는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다.
“농담입니다, 농담.”
“이오스가 차를 좋아할지 몰랐어.”
미노스를 감싸기 위해 루비카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차는 동제국에서만 나서 구하기 힘들 텐데…….”
“내 권역에는 잔뜩 나는데?”
미노스는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지 않았던 비밀 하나가 들통났다.
차나무는 드래곤의 권역 깊숙한 곳에서 무성히 자란다. 보통의 인간은 거기까지 갈 수 없기에 알려지지 않았다.
“잔뜩 난다고?”
역시나 루비카는 흥미를 보였다. 이제 이오스에게서 찻잎을 얻어 저 멀리 동제국에서 온 귀한 것이라고 속여 몰래몰래 파는 일은 물 건너갔다.
“그래, 왜? 필요하면 줄까?”
차 모임 때문에 찻값이 급등한 건 루비카도 아는 사안이었다. 이오스에게 어찌 대답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칼이 차를 내왔다.
이오스가 한 주먹 가득 찻잎을 줬기 때문에 거뜬히 네 사람분의 차를 우리고 칼이 몰래 한 잔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 나왔다.
녹차의 맛은 꿈에서 마셨던 맛 이상이었다. 남은 차를 고급 도자기에 담으며 아까워서 저걸 어찌 먹을까 고민할 정도였다.
“이오스 님의 사촌 누님께서도 맛보셨으면 해서 준비했습니다.”
사실 귀한 녹차를 에드가가 맛보았으면 해서 더 준비해 온 거지만, 사촌 누나를 강조하는 칼의 말에 이오스는 너그러워졌다.
“그래, 뭐든 다 같이 먹는 게 맛있으니.”
그리고 칼이 가져온 차를 또 한 입에 털어 넣은 이오스가 인상을 썼다.
“아까 먹은 거랑 맛이 다르잖아! 이씨, 너 날 골탕 먹이려고 그런 거야?”
이오스는 찻잎의 상태가 다르니 차 맛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기초적인 상식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