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3화
“그래도 차 모임이 인기를 끈 덕에 차를 즐기는 다양한 방법이 나타난 건 기쁜 일이지요. 차에 우유를 타 드셔 보았습니까? 무척 고소합니다.”
차에 이것저것 첨가해서 먹는 건 칼이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일개 사제의 입에서 마님의 흉 비슷한 것이 나오는 건 싫다. 칼의 단호한 대답에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사제가 얼굴을 붉혔다.
“이제 찾는 사람이 늘었으니 무역량도 늘겠지요.”
차는 동제국에서도 한정적인 지역에서만 난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을 일은 없다. 하지만 칼은 고개를 뻣뻣이 들며 대답했다 .
“네, 방법이 나오겠지요.”
어느새 포악하고 사납기로 유명한 드래곤과도 친분을 쌓은 마님이다. 그 드래곤은 위험에 처한 루비카를 구한 것은 물론 스테판까지 잡아왔다. 하는 짓이 거의 루비카의 시종이나 다름없었다.
칼은 루비카가 진짜 자신의 실력을 숨긴 특별한 존재가 틀림없다고 믿었다. 어쩌면 아직은 에드가의 저주를 고쳐 주기 전 그를 시험하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믿어야지. 마님을 믿어야지.’
마님이 손대거나 조언하는 것들은 대부분 잘됐다. 다들 무시하던 세사르 경의 새로운 장미는 세리토스 왕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왔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칼의 마음속에는 루비카에 대한 존경심 비슷한 것이 생겼다.
에드가와 국왕 전하가 불철주야 걱정했던 세리토스 왕국의 식량 사정이나 마석 고갈에 대한 문제도 루비카가 어떻게든 해결해 줄 것 같았다.
차를 가져가는 칼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쟁반에는 평소 루비카가 요청하기 전에는 가져가지 않았던 우유와 설탕이 있었다.
만약 루비카가 칼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믿음을 알게 된다면 당장 그 믿음을 버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고 착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착각’ 덕에 골머리를 앓을 상황이었다.
“내가 원하는 걸 안 주면 정원에서 그놈이랑 무슨 놀이를 하고 있었는지 남편에게 다 일러바칠 거야.”
갑작스런 이오스의 말에 루비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오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통쾌하게 웃었다.
“놀이라니 무슨 소리야?”
“모른 척해도 소용없어!”
에드가는 방금 전 이오스가 ‘놀이’라는 말을 했을 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지 않기를 잘했다고 느꼈다. 그는 이 흥미로운 대화가 어디까지 가는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스테판과 놀이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 하지 마.”
“어쭈, 끝까지 모른 척을 하시겠다?”
단단한 이오스의 착각은 부서질 줄 몰랐다. 그는 루비카가 에드가 앞이라 끝까지 모른 척을 하는 줄 알았다. 인간에게 납치당하는 님프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끝까지 모른 척하면 네 남편한테 다 일러바친다? 증거도 들고 왔으니 발뺌하지 마.”
웬일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스테판을 붙잡아 왔나 했더니 협박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 였나 보다.
이오스의 두뇌를 보았을 때 거기까지 본인이 직접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비카는 미노스를 불렀다.
“이오스가 대체 뭘 착각하고 있는 건지 알려 줄래?”
“어허! 물어보는 척하면서 미노스에게 상황을 빠져나갈 꾀를 알려 달라는 거지? 미노스, 만에 하나 귓속말이라도 하면 내가 가만 안 둬!”
이오스는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미노스가 없으면 꾀를 낼 수 없다는 듯 굴었다. 대체 이 드래곤이 뭘 착각하고 있는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스테판과 자신이 ‘놀이’ 중이었다니……. 드래곤의 사고방식은 평범한 인간인 그녀가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정원에서 납치당하는 자신을 보고도 이오스가 도와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넌 어제 남의 정원에서 뭘 하던 중이었어?”
아무래도 이오스가 선선히 이야기 해 줄 것 같지 않아 그녀는 역공을 펼치기로 했다.
“어?”
뜻밖의 공격에 이오스가 우물쭈물했다. 협상이 결렬될 때는 대비해 미노스가 도주로를 만들고 있는 걸 도왔다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애초에 도주로를 만들겠다는 미노스가 이상했다. 상대는 자신이 기르던 식물과 리본을 아무 조건 없이 건네준 어딘가 얼빠진 님프였다.
“그냥 정원 구경하던 중이었어.”
“주인 허락을 받고 구경했어야지.”
가르치는 말투로 루비카가 이오스를 타일렀다. 얼빠졌긴 하지만 님프여서 그런지 이겨 먹기가 쉽지 않았다. 이오스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쨌든 남편에게 비밀로 해 줄테니 그거 줘.”
“그거라니?”
“전에 네가 줬던 거.”
“장미 말하는 거야?”
이오스가 고개를 적었다.
“리본?”
이번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루비카는 한숨을 참았다. 아까부터 벌어진 이 촌극이 리본 하나를 얻기 위한 것이었나.
김빠질 정도로 싱거운 이유였다. 그런 건 비밀을 알고 있니 뭐니 하지 않아도 원한다고 했으면 바로 줬을 거다.
오히려 이렇게 진을 빼니 대체 왜 그러는지 이
유를 알려 주기 전까지는 주고 싶지 않아졌다.
“그건 또 왜 가지고 싶은데?”
“나뭇가지에 달아서 장식하게. 꽃이 핀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어.”
“리본을 싹쓸이하기 위해 시장을 파괴하려는 걸 부인께 부탁하면 더 다양한 종류로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제가 간신히 말렸습니다.”
에드가마저도 미노스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시장 하나가 날아갈 뻔했던 걸 미노스가 막아 줬으니 뭐라도 사례하고 싶을 정도였다.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게. 단, 혹은 떼고 오게.”
“감사합니다.”
님프의 마음에 들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도움은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오스는 바로 눈앞에서 에드가가 자신을 ‘혹’이라고 표현했는데도 그것이 자신을 비난하는 말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너는 리본을 얻고 싶으면 네가 본 것 전부, 루비카가 스테판과 뭘 어떻게 놀았는지 말해.”
“호오.”
이오스가 루비카를 향해 활짝 웃었다.
“끝까지 모른 척해서 남편 앞에서 망신당하게 생겼잖아.”
걱정해 주는 척하지만 황금색 눈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님프가 반려 앞에서 망신당하는 꼴을 구경하는 건 이오스가 바라는 바였다.
덤으로 리본까지 얻을 수 있다니 이오스에게 이익만 남는 장사였다. 님프는 지혜롭다더니 사실은 덜떨어진 종족이 틀림없다.
“서로 납치하고 괴롭혀 주기 놀이는 하는 것 같았어. 안됐네. 이상한 취미를 가진 님프가 부인이라서.”
세상에 착각을 해도 어쩜 저리 황당하기 짝이 없는 착각을 할까. 이미 수많은 착각에 당해 무덤덤해진 루비카였지만 이번만은 몸서리 칠 수밖에 없었다.
“아냐!”
“계속 발뺌하네.”
“진짜 납치당하는 중이었어.”
“개풀 뜯어 먹는 소리 하지 마. 님프가 고작해야 인간에게 납치를 당한다고?”
자칫 잘못하면 루비카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들킬 위기였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 이오스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변태라고 오인받고 싶지 않다. 리본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오스의 끔찍한 착각을 깨트릴 방법을 찾지 못해 루비카는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부탁한 거야.”
보다 못한 에드가가 끼어들었다. 부탁이라니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그의 침착한 눈빛에 루비카의 마음도 덩달아 진정돼 입을 닫았다.
“부탁? 부인을 납치해 달라고 부탁했어? 이거, 부부가 쌍으로 변태였구나.”
“스테판이 수상하니 혹 당신을 납치하더라도 참아 달라고 했어.”
에드가의 대답에 미노스는 감탄했다. 그 짧은 사이에 상황을 판단하고 어떻게 저런 시의적절한 대답을 내놓은 걸까. 무척 똑똑한 사람이라는 소문은 역시 틀린 게 아니었다.
반면에 이오스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님프를 단단히 망신 줄 기회라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가 멍청한 착각을 했다고 망신을 당했다.
“그래도 리본은 내놔!”
결국 이오스는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안 주면 항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하는 짓이 여섯 살 난 아이와 다름없다.
대체 이오스는 인간으로 치면 몇 살에 해당하는 걸까? 루비카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그를 달랬다.
“줄게, 준다고. 남편에게 비밀을 밝히겠다고 하지 않아도 네가 달라고 하면 줬을 거야.”
“대가는?”
“없어.”
또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뇌 대신 데리고 다니는 미노스도, 권속들도 이오스의 편의를 봐주거나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황금을 비롯한 대가를 가져간다.
그런데 이 님프는 왜 매번 아낌없이 그에게 원하는 걸 주는 걸까. 오래전에 잠든 이베르가 생각나 이오스의 기분이 술렁거렸다.
“이상해. 가족이 아니면 대가를 주는 게 당연하다고 그랬는데…….”
루비카는 네가 사고를 치지 않는 게 대가라고 대꾸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이오스는 제멋대로고 걸핏하면 화를 내지만 잘 구슬리면 충분히 온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미노스가 그를 돌보기는 했지만 일개 고블린이라 잘못된 행동을 해도 제제를 취하거나 따끔히 꾸중을 할 수 없어 그랬던 건 아닐까.
“그럼 가족하지, 뭐.”
가족이 되면 그녀가 님프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도 좀 봐주지 않을까?
그녀가 꺼낸 뜻밖의 제안에 이오스는 화들짝 놀랐다. 썩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 게 제안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하지만 에드가의 얼굴은 잔뜩 구겨졌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드래곤과 가족이라니?”
“평범한 인간은 끼어들지 마!”
“이봐, 나는 루비카의 남편이야. 네가 루비카의 가족이 되면 나한테도 가족이 되는 건데 충분히 끼어들 자격이 있지.”
현재 그는 사실상 루비카의 유일무이한 가족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거기에 이오스 같은 불청객이 끼는 게 싫다. 에드가는 저 시한 폭탄 같은 존재를 어떻게 해서든 그녀에게서 떨구고 싶었다.
“누가 너랑 가족 한대? 나는 루비카랑만 가족 할 거야.”
하지만 돌머리에게 논리적인 설득이 먹혀들 리 없다. 이미 이오스는 루비카와 가족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럼 그녀가 조건 없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가족이면 나와도 가족이다.”
이오스는 에드가를 무시하고 루비카의 옆으로 갔다.
“그럼 이제 뭐라고 부를까? 엄마?”
“그건 절대 안 돼!”
에드가가 등 뒤에 있던 베개를 이오스에게 던졌다. 시커멓게 다 큰 남자, 아니 드래곤이 루비카에게 엄마라니 그건 절대 용납 못한다. 자신도 이오스 같은 아들은 원하지 않는다.
“아, 쟤는 뭘 먹었길래 이렇게 아프냐.”
얼굴에 베개를 정통으로 맞은 이오스가 투덜거렸다. 분명 푹신한 베개일 텐데 돌을 맞은 것처럼 아프다. 님프도, 그녀의 남편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그럼 뭐라 부르지? 누나?”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마보다는 낫지만 누나는 너무 가까운 존재다. 게다가 이오스를 처남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