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2화
말은 그리하였으나 몸은 흥분 상태를 감추지 못했다. 한창 혈기왕성한 때가 아닌가.
그녀가 원한다면 그는 그곳이 어디든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됐다. 하지만 그도 그녀도 경험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첫 경험은 그녀만큼이나 그에게도 소중했다. 이왕이면 사랑하는 여자에게 만족을 안겨 주고 싶은 것이 그의 욕심이었다.
“에드가.”
그녀가 그의 뺨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가 무얼 겁내고 무얼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게 두렵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럼 내게 이러지 말아야지.”
여전히 몸을 밀착한 상태에서 그가 씁쓸히 웃었다. 아무리 해도 떨어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까 애 태운 벌이야. 어차피 지금은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도 할 수 있어.”
열망이 사라지지 않는 몽롱한 얼굴로 그녀가 대꾸했다. 애를 태우려다 도리어 애가 타게 생겼다. 참지 못하고 그가 그녀에게 거칠게 키스했다.
하지만 그리한다 해서 흥분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를 제어하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려 했다.
호흡이 곤란할 때쯤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모자란 산소를 들이마시는 그녀와 달리 그는 무척 평온한 대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오고 있어.”
이상한 위화감과 압박감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무언가 강한 존재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그는 상체를 일으키고 그녀에게 벗어 둔 재킷에서 총을 꺼내 올 것을 부탁했다.
“여차하면 도망쳐.”
“도망은 안 쳐.”
“그럼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그는 문을 향해 총을 장전하고 상대를 기다렸다. 하지만 덜컥하고 열린 것은 문이 아니라 창이었다. 깜짝 놀라는 바람에 에드가는 하마터면 곧장 총을 쏠 뻔했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이오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열린 창문으로 남자 둘이 휙 던져졌다. 얼굴이 피멍이 들다 못해 퉁퉁 부어올라 누구인지 알아보기 곤란한 정도였다.
곧이어 미노스가 던져졌다. 작은 고블린은 몸을 둥글게 말아 안정적으로 몇 번 구른 다음 벌떡 일어났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한 솜씨였다.
“이런, 저희가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군요.”
침대 위에 있는 루비카와 에드가를 보고 미노스가 멋쩍은 듯 웃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루비카가 황급히 에드가에게서 떨어지며 외쳤다.
“오붓하긴!”
“그래. 별로 오붓해 보이지는 않는데?”
이오스가 창문 안으로 마저 들어오며 맞장구를 쳤다. 변한 에드가의 안색에 미노스는 앞으로 공작의 마음에 들 일은 물 건너갔음을 예감했다.
“낭떠러지로 떨어진 사람을 버려 두고 간 이유가 저것들 때문인가?”
“조그마한 녀석답게 어찌나 쏙쏙 잘 도망치는지 덫을 설치하고 잡느라 좀 늦었어.”
이오스가 내심 자랑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앞뒤 생각 없이 미련하게 공격해 대서 실패한 것을 그는 모두 상대가 작았던 탓에 일어난 일로 치부했다.
어쩜 저렇게까지 자신에 대한 긍지로 가득 찰 수가 있는 걸까? 자아성찰을 할 정도로 똑똑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그쪽을 어떻게 이길지 고민한 내가 바보 같군.”
“네가 날 어떻게 이겨. 부인 믿고 너무 도발하지 마.”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고작 이런 놈 때문에 아까 위화감을 느꼈단 말인가? 힘만 세지 이오스의 두뇌는 세 살배기 아이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어쨌든 아까 구해 줘서 고맙네.”
“구해 주다니?”
낭떠러지에 떨어지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땅을 다루는 이오스의 힘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오스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럼 우리가 어찌 되든 말든 스테판을 잡으러 간 건가.”
“네 부인이 있는데 내가 뭐 하러 걱정해. 이놈이 네 부인이랑 무슨 놀이를 하고 있었는지 알면 잡아 온 내게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할 거다.”
이오스는 여전히 스테판과 루비카가 서로를 납치하고 괴롭히는 놀이 중이라고 알고 있었다.
에드가는 ‘놀이’라는 표현이 무척 신경에 거슬렸지만 바보 드래곤에게 물어보자니 자신 역시 바보가 되는 것 같아서 관뒀다. 차라리 미노스를 통해 알아내는 게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일 것 같았다.
“그럼 땅을 부드럽게 만든 건 네 능력이 아니란 말인가.”
왜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이오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루비카를 향해 음흉하게 웃었다. 이제 불륜의 증거물을 가져왔으니 그녀는 순순히 이오스가 원하는 걸 내놓아야 했다.
자신이 님프를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니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존재가 된 것 같아 퍽 기분 좋았다.
“어쨌든 저놈들을 잡아 줘서 고맙네. 피 떡이 될 정도로 때려 준 것도 고맙고.”
“아, 저건 때린 건 아냐. 미노스가 설치한 덫 때문이지.”
대체 무슨 덫이길래 사람이 저지경이 된 걸까. 공손한 태도로 웃고 있는 미노스가 이오스보다 더 무서운 강적일지도 모른다. 에드가는 일단 후처리를 위해 칼을 불렀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오스가 스테판을 잡아 왔네.”
“이오스가 아니라 이오스 님이야! 이거 아무리 님프의 남편이라지만 너무 버릇없는 거 아냐?”
에드가가 이를 꽉 깨물었다. 용인지 비단뱀인지 아까부터 시끄럽다.
“나는 국왕 전하 이외의 사람에겐 모두 편하게 말하네.”
“난 국왕인지 뭔지 하는 일개 인간보다 훨씬 높고 대단한 존재거든?”
자신보다 대단한 존재는 이 지상에 님프밖에 없다. 바로 눈앞에 그 님프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이오스가 빡빡 우겼다.
“이봐, 네 남편 버릇 좀 고쳐 봐. 오냐오냐 해 주니까 끝도 없이 기어오르잖아.”
심지어 루비카 옆으로 쪼르르 가 이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은 큰 누나에게 버릇없는 막내 동생을 혼내 달라고 조르는 모습 같았다.
정말 기묘한 드래곤이다. 이 녀석이 그녀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돌변할까? 그나만 다행힌 것은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해서 속여 넘기기 쉽다는 거다.
“부부는 동등한 존재야.”
“뭐?”
이오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말투에 반발했던 그녀가 떠올라 에드가는 피식 웃었다.
잘못 비위를 거스르면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는 존재 앞에서도 한결같은 그녀가 좋았다. 자신도 가지지 못한 담력이다.
“인간과 네가 동등하다니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휴신의 성서에 나와 있어.”
“아, 진짜!”
이오스가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며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그는 꿍한 얼굴로 입을 꼭 다물었다.
“음, 일단 이 방은 좁으니 스테판 경은 포박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시체와 진배없는 상태니 도망치지는 못할 것 같군요.”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마. 교활하게 그동안 자신의 진짜 힘을 숨긴 사내야.”
“걱정 마. 저놈이 도망치며 내가 바로 눈치챌 테니까.”
귀를 파며 이오스가 대답했다. 님프와 거래할 때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될 증거물이나 다름없는 사내였다. 필요한 조치는 이미 해 뒀다.
“그렇습니까? 대단하군요.”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는 에드가와 달리 이오스와 스테판의 답답한 싸움을 목격하지 못한 칼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덕분에 이오스는 우쭐해졌다.
“인간도 뭐, 나쁜 존재들을 아닌 것 같네. 꽃을 잘라서 구경한다는 점만 빼면.”
“자른 꽃을 싫어하십니까?”
“그래. 꽃은 자연 상태 그대로가 제일 예쁘단 말이야.”
대화가 샛길로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에드가가 끼어들었다.
“칼, 모로 남작에게 스테판을 이미 잡았다고 파발을 보내.”
“네. 괜히 수색대가 힘 빼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칼은 에드가의 말에 바로 정신을 차렸다. 역시 잘 훈련된 집사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사람을 시켜 사제관의 골방으로 스테판을 옮긴 다음 사제에게 봐 줄 것을 요청했다.
“숨은 붙어 있습니다. 뭘 먹인 건지 기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군요.”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요?”
“네, 다친 곳 모두 급소가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환자가 아프지 않았을 거란 소리는 아닙니다.”
사제는 신분을 잊고 세상에 이렇게 기술 좋게 때리는 사람도 다 있냐는 소리를 할 뻔했다. 어쨌든 그는 신에게 귀의한 사람답게 스테판을 치료하기로 했다.
“정신을 차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악독한 자입니다.”
“그럼 기절하게끔 한 약은 나중에 해독하라 이르지요.”
그다음에 모로 남작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스테판을 잡았다는 소식에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친 모로 남작은 의외로 아쉬워했다.
그가 스테판을 잡아 온 사람이 누구인지 무척 보고 싶어 해서 진땀을 뺐다. 지금 각하가 방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다고 말하자 다행히 남작은 순순히 물러났다.
그 뒤 불필요할 정도로 다양한 물건을 구해 달라고 남작에게 부탁해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마차에는 주치의까지 태워 달라고 했으니 마을 의사를 만나는 일까지는 없겠군.’
이 기회에 마님의 임신 소동을 처리하면 좋을 것 같았다. 스테판이 아마눈의 첩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그자를 직접 공작의 호위대로 보낸 국왕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왕권의 힘이 약해지길 바라는 호사가들은 두고두고 이 일을 입에 올릴 것이다.
이는 에드가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임신한 부인을 납치해 금품을 요구한 사건으로 꾸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놀란 부인이 유산을 했다고 하면 스테판에게도 적절히 죄를 물을 수도 있다.
“돼지 피와 창자를 구해 오거라.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네.”
이래저래 해야 할 일을 처리하니 시간이 훌쩍 갔다. 시계를 확인한 칼은 아차 싶었다.
“각하께서 차를 드실 시간이 지났구나.”
유능한 집사는 주인이 어디에 있던 집처럼 편안히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흐름이 깨지지 않게 준비해야 한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에드가가 차를 즐길 수 있도록 소량의 밀봉된 차를 가지고 다녔다.
“사제님, 커피 잔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각하와 마님이 많이 피곤해하시니 커피를 드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커피가 아니라 차를 타려고 합니다.”
집사의 말에 사제가 깜짝 놀랐다.
“그 귀하고 비싼 걸 가지고 계십니까?”
“네. 각하께서 각별히 좋아하시는 음료라…….”
사제는 놀랍게도 커피용이 아닌 차를 마시기에 적절한 잔을 꺼냈다.
처음 커피를 대륙에 퍼뜨린 사람도 사제였고 세리토스 왕국에서 그나마 차를 즐기는 사람도 사제였다.
보기 힘든 찻잔을 시골의 사제관에서 발견하는 것도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두 세트밖에 없군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손님이 계셔서…… 나머지는 커피잔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사제는 부엌에서 바로 나가지 않고 칼이 차를 우리는 동안 옆에 있었다. 부러운 듯 입맛을 다시고, 물이 지나치게 식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에서 칼은 그가 자신과 같은 차 애호가임을 느꼈다.
“제대로 우렸는지 한잔 드시겠습니까?”
칼의 호의를 사제는 냉큼 받아들였다. 영혼까지 맑아지게 하는 깨끗한 향이 입 안과 코끝에 맴돌았다.
칼이 우린 차는 최고급 찻잎과 능숙한 솜씨가 어우러져 사제가 평생 마셨던 차 중에서 단연코 최고였다.
“차를 정말 잘 우리시군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미노스와 이오스에게 줄 차를 커피잔에 대충 따르며 칼이 대꾸했다.
“각하께서 차를 좋아하셔서 매일 우리다 보니 실력이 늘었을 뿐입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는 차를 매일 마신다지요?”
“네.”
“부럽습니다. 안 그래도 비싼 차인데 요즘 귀족들 사이에 차 모임이 유행해 가격이 폭등하는 바람에 구하기가 쉽지 않아 예전에 구입해 놓은 차를 아껴 가며 먹고 있던 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