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1화
“나도 힘들어. 당신이 위험한데 가만히 있으라고? 그게 가능하겠어?”
투정 같은 대답이었다. 자신보다 머리가 둘 이상 작고, 무거운 물건 하나 제대로 들 힘이 없는 여인이 그를 지키기 위해 뭐든 하겠다는 말을 에둘러서 했다.
이상하게 그 사실이 뿌듯하고 기쁘지만 그는 엄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실력 좋은 호위대 뒀다 뭐 하겠어. 힘든 일 있으면 남 시켜. 당신이 하지 마.”
“당신을 납치한 게 바로 그 호위대 단장이었어.”
이번엔 그가 할 말이 없어졌다. 어떻게든 위험하고 힘든 일에서 그녀를 제외시키고 싶은데 협조를 안 해 준다.
“아무튼 안 돼.”
하는 수 없이 고집을 부렸다. 논리 없이 남에게 이렇게 떼를 쓴 건 3살 이후 처음이다. 루비카는 잠시 숨을 참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반쯤 웃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억지로 얻어 낸 대답이기에 그녀가 지키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고생한 만큼 행복하게 해 줄게.”
그녀의 지난 생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저릴 만큼 아팠다. 왜 아르망이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꽃이나 땄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면목이 있다면 감히 사랑을 말하지 못했으리라.
“당신은 날 고생시킨 적 없어.”
루비카는 짐짓 그의 애절한 표정을 모른 척하며 가볍게 볼을 잡아 흔들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다정한 말이었다. 그는 붙잡힌 볼에서 아픔이 아니라 달콤함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어떤 일이든 천국의 과실처럼 느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마차를 타고 도착한 사제관은 작은 고아원도 겸하고 있는지 마당에는 아이들 몇 명이 나와 있었다. 보기 드문 고급 마차와 수색대의 모습은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라는 사제의 말에도 아이들은 쭈뼛거리며 마당에 계속 남기를 원했다. 개중에 어떤 아이는 스리슬쩍 루비카에게 와 그녀가 두른 망토를 잡을 정도였다.
“부인, 정말 죄송합니다.”
사색이 된 사제가 간신히 아이를 떼어 내었다. 그녀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이들을 더욱 제어하기 힘들 것 같아 그만두었다.
생각과 다른 풍경에 에드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와 달리 그는 이런 곳에 온 경험이 없다. 여기가 정말 이 근방에서 그나마 제일 나은 곳이 맞느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 깔끔하고 좋은 곳이네. 이렇게 관리하려면 정말 고생이 많았을 텐데…….”
“감사합니다, 부인.”
하지만 루비카가 그리 칭찬하는 바람에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표정을 보니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녀가 칭찬한 곳을 감히 그가 흠잡을 수 없었다.
“이쪽입니다.”
사제가 안내한 방에는 두 사람이 누울 만한 나무 침대와 더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가 준비되어 있었다.
칼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누운 에드가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지나치게 충격을 받아 인상을 쓰는 것도 잊은 듯 보였다.
아마 이렇게 좁고 딱딱한 침대에 눕는 건 그의 인생에 처음일 것이다. 루비카는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네?”
사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비카는 침착하게 그녀가 다른 방에 가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옷도 갈아입어야 되고, 씻어야 할 것 같아서…….”
“여기서 씻으시면 됩니다.”
잠시 사제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지 못해 당황하는 사이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갈아입을 옷과 비누를 가지고 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루비카는 일단 반사적으로 받았다.
“저희 중에 목욕 시중을 드는 법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럼 편히 쉬십시오.”
사제가 루비카의 불만을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하고 사죄의 말을 조아리고 사라졌다.
칼이 잠시 눈치를 보더니 남작이 다른 의사를 데리고 오는 걸 막아야 한다는 둥 온갖 이유를 장황하게 들어놓더니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큭큭큭.”
에드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얼빠졌던 루비카의 얼굴이 새하얗게, 다시 빨갛게, 이윽고 파랗게 변하자 세상에 그리 재미있는 게 없다는 듯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아, 여기 정말 마음에 드네.”
간신히 웃음을 그친 그가 느릿느릿 말했다. 방금 전 딱딱한 침대를 보고 넋이 나간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그가 그녀를 머리에서 발까지 진득한 눈빛으로 찬찬히 훑었다. 땀에 전 몸을 깨끗이 씻기 위해서는 그 앞에서 옷을 벗어야만 했다.
당연하지만 욕조와 침대 사이를 가릴 만한 가림막 같은 사치품이 이런 사제관에 있을 리 없다.
루비카는 부부 생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아무리 남편 앞이라지만…… 아직 그에게 나신을 보여 준 적은 없다.
사제를 다시 불러 방을 따로 달라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금슬이 좋다는 소문까지 난 부부였다.
부끄러워서 그와 한방에서 씻을 수 없다는 말을 해 봤자 다들 웃어넘기겠지. 루비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에드가에게 명령했다.
“고개 돌려.”
“싫은데?”
이럴 때 그는 정말 악마처럼 웃는다.
“우린 부부잖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
어르는 듯한 말투가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다. 자신은 부끄러워 미치겠는데 그의 얼굴에는 미동도 없었다.
‘흥.’
그래 봤자 자신을 보고 흥분한 주제에. 오기가 발동한 그녀가 고개를 뻣뻣이 쳐들었다.
“그럼 보든가.”
어차피 그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니 그녀가 두려워할 것은 없다. 그래, 앞으로 쭉 살을 맞대고 살 사람인데 이 정도에 겁먹고 쩔쩔매야 되겠는가.
계속 함께 살다 보면 서로의 벗은 몸을 봐도 아무렇지 않는 상태가 올지도 모른다.
‘어차피 뭐, 에드가는 내 야한 잠옷 차림도 봤고.’
욕조의 더운 물이 그녀를 유혹했다. 더는 찝찝한 잠옷 차림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에드가는 없는 거라고 주문을 외우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만!”
고작 겉옷 하나 벗었을 뿐인데 그가 소리쳤다. 역시 이런 일에 약한 건 그였다.
그런데도 느긋하게 웃으며 여기가 정말 마음에 든다는 소리까지 했단 말이야? 루비카는 보란 듯이 옷을 벗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에드가가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루비카는 일부러 욕조에 들어갈 때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냈다. 그녀가 물을 퍼 올려 몸에 끼얹을 때마다 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칠흑 같은 그의 머리카락이나 섬세한 턱선에서는 여성을 홀리고 마는 퇴폐적인 향이 나 깜빡했다만 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숙맥이었다.
거기에 지금은 침대에 꼼짝 없이 누워야 하는 입장이다. 그녀에게 선처를 부탁해도 모자라는 주제에 끈적한 눈빛이나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단 말이지.
“에드가, 물이 정말 시원해. 당신도 같이 씻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택에 돌아가면 같이 씻을까?”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우린 부부잖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
모로 누운 그의 등에서 ‘끄응’ 하는 앓는 소리가 났다. 소소한 복수에 성공한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얄미운 웃음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마음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어디 두고두고 부끄러워할 일을 저질러 보자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의 두 다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자극하고 유혹하는 그녀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속도 모르고 천천히 목욕을 끝낸 그녀는 사제가 준비한 옷을 입었다. 공작저에서 입었던 드레스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목면으로 만든 가벼운 드레스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소박하고 간소한 옷은 추억을 자극했다.
“에드가.”
옷을 다 갈아입은 그녀가 침대께로 가 그를 불렀다. 그가 고개를 돌리면 아까 놀려서 미안하다고 뺨에 뽀뽀라도 하며 화해를 요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나 옷 다 갈아입었어.”
혹시 여전히 옷을 벗고 있는 줄 아나 싶어 설명을 보냈건만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미동이 없었다.
‘많이 화났나?’
지나치게 놀리긴 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약한 그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우쭐해 정도를 지나친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저주 때문에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을 사람이었다.
“에드가, 저기. 미안…….”
우물쭈물하던 루비카가 용기를 내어 사과의 말을 하며 그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순간 강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당겼다.
정신을 차리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 누운 채로 그녀는 자신을 내리누르는 그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중압감과 숨 막힐 듯한 공기는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꼭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미안한 줄은 알아?”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선을 따라 그리며 그가 속삭였다. 붉은 입술이 무척 매혹적이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그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을 있는 대로 애 태우고, 왜 그래?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미쳐 있는지 알면서.”
그가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짜릿한 쾌감이 척수를 타고 뇌관을 찔렀다. 그녀는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루비카.”
그는 그녀의 귓가에 바로 입술을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소름이 돋는 건 그의 뜨거운 숨 때문인지 목소리에 젖어 든 열망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내가 당신을 원하는 걸 알지?”
모를 리가 없다. 지나치게 잘 알아서 탈이라면 탈이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조개처럼 입술을 꽉 다물었다.
애가 탔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이 긴장 때문이라는 걸 안다. 그녀가 그의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에도 뜻을 읽을 수 있듯이 그 또한 알았다.
“당신은 날 안 원해?”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어깨를 살살 만지며 속삭이자 그녀가 스르륵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 맑았다. 욕망으로 얼룩진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깨끗함이었다.
“원해.”
심장이 술렁거렸다. 어쩜 저런 말을 저리 순진하게 내뱉을 수 있는 거지. 그가 원하다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는 끝끝내 대답하지 못하다 자신을 원하냐는 말에 날름 그렇다고 대답하는 간극이 더욱 그를 자극시켰다.
“당신은 정말.”
어깨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날 미치게 만들어.”
쇄골 아래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에 그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여린 속살을 침범하는 손길에 면역이 없는 그녀는 난생처음 느끼는 감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무서워?”
하지만 그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눈물이 날 정도로 당황하고 수치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하니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그저 처음이라 당황했을 뿐이다.
“계속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솔직한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분명 겁이 날 텐데도 물러서지 않는 면모는 분명 루비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일 것이다.
“루비카.”
그리고 에드가는 의외로 자신이 겁쟁이에 원칙주의자라는 걸 알았다.
“나도 당신을 원해. 하지만…… 이런 데서 당신을 안지 않을 거야.”
말은 그리하는데 손은 여전히 그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가쁜 숨이 그를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번 그녀의 육체를 알게 된 몸은 이성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쯤에서 그녀가 자신을 거부해 주기를 바랐다.
그녀가 ‘싫다’라든가 이런 건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면 얼마든지 멈출 수 있다. 그의 뇌조차도 지배하지 못한 육체는 오직 그녀의 명령만을 따랐다.
“에드…… 가.”
그녀가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눈을 촉촉이 적신 것은 눈물이 아니라 열망이었다.
“서로 사랑하는데 장소가 무슨 상관이겠어.”
그녀는 단 한 번도 그가 예상한 대답을 해 준 적이 없다.
“안 돼.”
그가 다급히 속삭였다.
“날 말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