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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70화 (170/212)

# 17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70화

“한밤중에 연락을 받자마자 온 거잖아. 이정도면 거의 변경백 군대 수준의 군기이지.”

“그래?”

에드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체면을 구긴 줄 알았는데 활짝 펴지다 못해 구름을 지나쳐 태양까지 올라갔다. 그는 아내에게 좀 더 유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칼, 추격대를 보내 스테판을 쫓으라고 모로 남작에게 전하게. 다 지친 말 한 마리를 끌고 갔으니 멀리가지 못했을 거야.”

득의양양하게 명령하는 에드가에게 칼은 차마 모로 남작이 이미 추격단를 파견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모로 남작은 출세가도가 아니라 절망가도를 달릴 것이다.

칼은 기회주의자 같은 구석이 있지만 제법 일을 잘하는 남작의 앞날을 막고 싶지 않았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북동쪽으로 이동할 것 같더군.”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에드가가 자신이 목격한 스테판의 쌍둥이와 그 차림새에 대해서 설명했다.

간단하게 스테판의 출신지가 몇 군데로 추려졌다. 그것만으로 예상 도주로가 서너 개로 좁혀졌다.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던 루비카가 말을 보탰다.

“아마도 아마눈으로 갔을 것 같은데…….”

“왜 그쪽 방향이라고 짐작하는 거지?”

지난 삶에서 그가 왕국을 배신하고 결탁한 줄 알았던 나라이다. 설명을 하려던 루비카가 애매하게 웃었다. 입구에서 지키고 있는 호위 등 듣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에드가가 미소의 의미를 바로 눈치챘다.

“나도 아마눈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어.”

그가 대신 얼버무리고 칼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럴 때 에드가는 평소보다 날선, 처음 만났을 때의 차가운 느낌이 진하게 묻어났다. 아까는 그의 기분을 달래 주려 조금 오버를 했었는데 솔직히 좀 멋지다.

“참, 이오스는 어디로 간 거야?”

“몰라. 그 바보 같은 도마뱀은.”

주변 풍경을 볼 수 없었던 루비카와 달리 에드가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이오스의 행동을 목격했다. 그나마 미노스가 제법 쓸만해 보였으나 그는 힘없는 고블린이었다.

“힘이 다 빠져서 제 구역으로 돌아가서 도랑물에서 쉬고 있겠지.”

“그런 성격은 아닐 것 같은데…….”

이오스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고 그가 항의를 하려는 순간 모로 남작이 마차를 끌고 돌아왔다. 네 마리나 되는 말이 끄는 제법 고급 마차였다.

언제까지나 동굴 속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에드가는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따라 올라탄 루비카는 의자에 앉자마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 폭신해.’

피로가 싹 풀렸다. 대체 어디서 이런 마차를 구해 왔을까. 보기보다 모로 남작이 꽤 유능하다고 평한 순간 에드가가 볼멘소리를 했다.

“이 방석은 거위 털로 만든 게 아니지? 바닥에 깐 카펫도 양털이 아닌 것 같은데?”

“급히 준비해 오느라 부족했습니다. 많이 불편하십니까?”

“내 부인은 항상 최고급 물건만 썼어. 아무리 영지 외곽이라고 해도-.”

참다못한 루비카가 그의 입을 막았다.

“이렇게 좋은 마차를 구해 와서 정말 고맙네, 모로 남작.”

그리고 칼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뜻을 읽은 칼이 재빨리 문을 닫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부인의 기지 덕에 열심히 일한 남작이 혼이 나는 불상사를 간신히 막았다.

에드가는 능력이 뛰어난 만큼 기준이 높고 엄격해 부하들이 열심히 일해도 혼나기 일쑤였다.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공학자들은 그런 꾸지람에 행복해하기까지 했으나 가신들은 달랐다.

앞으로 루비카가 에드가의 단점을 고쳐 주거나 채워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제법 고무되었다.

“여긴 우리 저택이나 귀족들이 많이 사는 구역이 아닌 농촌 지역이잖아. 이정도 마차를 구해 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알아? 그런 분 앞에서 그렇게 화를 내면 안 돼.”

칼의 예상대로 마차 안에서 에드가는 루비카에게 한차례 혼났다. 물론 그는 그녀의 꾸지람에도 납득하진 못했다. 그녀가 언제나 제일 좋은 것만 사용하길 바란 게 뭐가 잘못되었나. 능력이 모자란 부하를 꾸중하는 건 응당해야 할 일이다.

“다음부턴 안 그럴 거지?”

하지만 그녀의 요구에 버텨 낼 재간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차마 넘어설 생각도 못했던 자존심의 벽이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졌다.

“안 그럴게.”

에드가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루비카가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따사로운 햇살 같은 그 미소를 볼 수 있다면 바보 같은 이오스에게도 세상에 너처럼 똑똑한 용은 못 봤다고 칭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가면 사제관이니까 힘내.”

마차가 덜컥거릴 때마다 에드가의 미간도 덜컥거렸다. 그녀가 최고급 물건만 써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작 여태껏 최고급 물건밖에 써 보지 못해 이런 상황이 제일 당혹스러울 사람이 그였다.

아마 이런 일반 마차를 타 본 건 그의 삶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괜히 안쓰러워진 루비카가 마차 안에 있는 서랍에서 손수건을 찾아 땀을 닦아 주었다.

“난 괜찮아.”

“고집부리지 마.”

루비카는 그의 허세에 간단히 응수하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부드러운 손길에 에드가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익숙한 솜씨군. 아까 나를 부축할 때도 능숙해서 놀랐어.”

“수도원에서 일했었어. 그래서 환자를 다루는 법을 좀 배웠어.”

그가 미리 받은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수도원에서 일한 적이 없다. 이 생의 경험이 아닌 다른 삶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에드가는 호기심을 참지 않고 계속 질문했다.

“왜 수도원에서는 일했지?”

“전쟁이 났었어. 살 곳을 찾아 남쪽을 향해 도망치다 수도원에 정착했어. 거기는 다른 곳보다 안전했어. 계속 머무르고 싶으면 일을 해야 한다기에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서 수도원에서 일하는 걸 선택했어. 덕분에 이것저것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어.”

“가족들은?”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폭격 때문에 다 죽었어.”

그녀는 최대한 씩씩하게 말했다. 그때의 충격과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지금 안젤라는 건강히 아론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있고 비록 밉긴 하나 베르너 부부도 별일 없다.

“스텔라 때문인가?”

“……응.”

“미안해.”

“당신 때문이 아니야.”

루비카가 고개를 저었다. 한때는 그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조국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았다는 소문을 믿었다.

하지만 그를 직접 만난 뒤 그게 말도 안 되는 누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루머 자체가 이상했다. 왜 타국과 손잡은 그가 납치를 당한 걸까.

“스테판에게 끌려가면서 차라리 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만약 당신이었다면…… 난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야.”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미래를 알기에 더 무섭고 두려웠다.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루비카의 표정에 에드가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를 되찾기까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대꾸하고 싶었다. 그녀가 사라지면 남은 인생을 대체 어떻게 살았을지…….

그녀의 안전을 담보로 스텔라의 설계를 요구하면 당연하다는 듯 그 모든 정보를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면 그녀는 아마 평생 자신을 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난 그럼 언제쯤 만났어? 수도원에서 봉사할 때?”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그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의 질문에 그녀가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미치도록 귀여웠다.

‘젠장.’

이러니 질투를 하지 않고 못 배기지. 에드가는 저절로 뾰족해지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었다.

“그때도 잘생겼나 보지?”

“어? 아니. 그냥 평범했어.”

기분이 상했는지 루비카가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아무리 얼굴을 밝혀도 외모 때문에 사람을 좋아하거나 그러지 않아.”

그건 그렇다. 처음 에드가를 만났을 때 그녀는 퍽 흥미롭게 그를 관찰하긴 했으나 그를 싫어했다.

지금 그녀가 이렇게 그의 옆에서 땀을 닦아 주고 있는 게 기적 같을 정도였다. 어떻게 얼어붙은 땅 같았던 그녀의 마음을 녹였는지 그가 생각해도 신기했다.

“내 생각에…… 고문을 당해서 외모가 변한 것 같아. 눈도 그때 먼 게 아닐까?”

이후 그녀는 지난 삶에 들었던 그와 관련된 소문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알려 줬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어이가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계산할 수 있었다.

“스테판이 내가 스텔라 설계를 완성하길 기다렸다 납치를 했나 보군.”

딱 그가 설계를 끝냈으리라 예상한 시기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 아마 스텔라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그도 납치해 눈을 못 쓰게 만든 것 같았다.

바로 코앞에서 뻐꾸기를 키우고 있었다니……. 역시 똑똑한 것과 현명한 것은 궤를 달리한다.

“스텔라 같은 건 개발하지 말자.”

그녀의 요구에 그는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왜 망설이는지 그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무기로 먹고사는 나라라고 해도 수천 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스텔라’는 시기 상조였다.

“그런 걸 만들지 않아도 세리토스 왕국은 충분히 먹고살 수 있잖아.”

“……세리스 산맥에 매장된 마석이 곧 고갈될 거야.”

하는 수 없이 그간 국왕과 함께 숨겨 왔던 기밀을 그가 털어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마석이 없다면 세리토스 왕국은 존립하기 어려웠다. 마석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만큼 마석 없이는 당장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

“스텔라는 황금평원을 얻기 위해 만든 무기야. 드래곤과 싸우려면 그 정도 무기를 만들어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어.”

“이오스랑 싸우는 데 굳이 스텔라까지 필요할까?”

그녀의 질문은 지극히 정당했다. 이오스는 힘 하나만 믿고 설쳐 대는 멍청이다. 스테판은 그를 완전히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기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기전은 지략만으로 이기기 힘들었다.

모든 병사들이 스테판 정도의 실력을 가질 순 없다. 이오스가 일으킨 모래폭풍과 바위비는 너끈히 수천의 군대를 몰살하고도 남았다.

“그 드래곤은 지나치게 멍청해서 오히려 끝장을 봐야 할 타입이야.”

“하지만 당신을…… 님프라는 존재를 두려워하는 눈치였어.”

루비카는 이오스가 장미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일을 설명했다. 모습을 바꾸는 건 물론 시간을 멈추게 하는 마법 등 이오스는 예상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루비카가 이오스를 속여 넘겨 간신히 위기를 넘긴 대목에서 에드가의 낯빛이 검게 변했다.

이오스가 놀라울 정도로 멍청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그녀의 목숨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있으면 내게 꼭 말해.”

“응.”

“나를 구하겠다고 괜히 어려운 일에 나서지 말고.”

“당신도.”

의외의 대답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루비카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힘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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