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9화
칼의 요청에 모로 남작이 에드가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은 평온하고 찢어진 바지 너머로 보이는 다리에 부상은 없었으나 자리에서 일어나기 불편한 상태 같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도 이 정도면 천운일지 모른다.
남작은 에드가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칼만큼이나 사색이 되어 마차뿐만 아니라 의사도 바로 수소문해 오겠다고 대답했다.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여기서 집까지는 두 시간 정도면 충분하니 돌아가서 주치의나 만나면 돼.”
“아…….”
돌아가는 시간을 마석마차를 기준으로 계산하는 에드가 앞에 남작이 한참 우물쭈물하더니 대답했다.
“각하, 마석 마차를 타고 돌아가실 생각이시군요.”
“당연히.”
에드가의 눈이 가로로 길어졌다. 모로 남작의 반응을 보니 마차를 제대로 준비해 오지 않은 눈치였다.
한밤중에 도달한 소식에 깜짝 놀라 수색대를 꾸렸을 테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은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밤새 고생한 루비카가 마석마차가 아닌 일반 마차를 탈 거라고 생각하니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말이 모는 마차는 아무래도 마석마차보다 덜컹거림이 심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의자를 푹신하게 만들어도 한계가 있다.
“그런 것도 제대로 준비 안 했나?”
바보 같은 부하 때문에 아까부터 아내 앞에서 체면이 잔뜩 구겨졌다. 흥분한 그의 상태가 만천하에 알려지는 건 부끄럽지 않았으나 이건 창피했다.
세상을 다 얼릴 것 같은 에드가의 목소리에 모로 남작의 등골이 서늘해 졌다.
막중한 임무를 맡고 이 일만 잘 해결하면 출세가도를 달릴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오히려 귀족 명부에서 제외될 위기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당장 마석마차를 가지고 오라고 연락하겠습니다.”
“경, 바보인가?”
“네?”
“지금 연락하면 내일 아침에야 마차가 올 텐데?”
얼빠진 표정을 짓는 남작 때문에 에드가의 가슴에서 불이 났다.
호위하라고 붙인 놈은 부인을 납치하지 않나, 잘 보살펴 주라고 붙인 놈은 부인을 제치고 자신을 우선으로 삼질 않나.
그래도 좀 눈치가 있고 머리가 굴러간다고 생각해 일을 맡겼던 놈은 이렇게 점수를 딸 기회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됐고, 근방에 부인이 쉴 만한 곳이 있나?”
“이 근방 말입니까? 영주관과는 거리가 멉니다만…….”
남작이 우물쭈물하자 칼이 대신 대답했다.
“사제관이 그나마 가깝습니다. 마님이 쉬시기에는 많이 누추하지만 그래도 씻고 식사 정도는 하실 만합니다. 저는 마님께서 입을 만한 옷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어느새 칼은 동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의 망토를 가져와 루비카에게 내밀었다.
마침 잠옷 차림이 부끄러웠던 그녀는 칼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기꺼이 망토를 둘렀다.
살뜰히 루비카를 챙기는 모습에 어젯밤까지만 해도 집사에게 단단히 화가 났던 그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일단 거기로 가지.”
“네. 준비하겠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수색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제관에 연락하고 공작 부부가 탈 만한 마차를 준비해 오기로 했다. 다들 에드가가 다리를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크게 다친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애써 그의 상태를 둘러댈 변명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간단히 요기하십시오.”
그사이 칼이 인근 민가에서 고소한 옥수수 냄새가 나는 따뜻한 스프 두 그릇을 준비해 왔다.
냄새를 맡자마자 루비카는 벼락같은 허기를 느꼈다. 밤새 말을 타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그를 부축해 동굴까지 왔다.
긴장 때문에 허기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숟가락을 받자마자 허겁지겁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그 모습을 흐뭇하니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그래도 칼이 집사라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돌아가면 칼에게 두 번 다시 어제처럼 그를 말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 내고 공작가의 집사로 계속 일하게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더 먹어.”
그녀가 스프 한 그릇을 뚝딱 비우자 그가 제 몫의 그릇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건 당신 몫이잖아.”
말은 그리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스프 그릇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고작 스프 한 그릇으로 배가 찰 리가 없다.
“난 오기 전에 든든히 먹었어.”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 새벽에 밥을 먹고 올 사람이 어디 있는가. 루비카도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마님, 각하께서 이곳으로 오시기 전에 제가 야식을 챙겼습니다. 안심하고 드십시오.”
칼이 그의 거짓말에 동참했다. 그제야 루비카가 그의 그릇을 건네받아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공작가로 돌아가자마자 칼에게 보너스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라고 할 때는 제대로 하는 집사였다.
옥수수 스프를 두 그릇이나 해치웠더니 루비카의 배도 슬슬 불러 왔다. 그녀는 볼록해진 배를 만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굴을 가린 나뭇가지는 어느새 치워졌다. 양쪽에서 서서 동굴 앞을 지키고 있는 수색대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대부분 그녀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평소에 보던 호위대랑 다르네.”
수색을 전문으로 준비한 이들이라 클레이모어 호위대의 화려한 군장 차림과는 거리가 먼 검은 복장이었다.
“따로 준비시킨 자들이야. 추적을 전문으로 하는 수색대야.”
“수색대를 준비했다고?”
“……당신이 스테판에 대해서 경고했잖아. 혹시 몰라 준비시켰지.”
“경고라니?”
루비카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에드가에게 스테판에 대해 경고한 적 없다. 애초에 스테판이 첩자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
뒤늦게 스테판이 그에게 연심을 품고 있으리라고 착각해 건넸던 조언이 떠올랐다.
세상에 어쩜 그런 착각을 할 수 있었던 걸까? 그를 노리고 있는 기사를 상대로 그런 착각을 했다니.
그녀가 틀림없이 임신을 했을 거라고 착각한 앤 못지않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볼이 달아올랐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루비카가 황급히 얼버무리자 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어떤 놈이야?”
“뭐?”
“어떤 놈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어? 설마 스테판 때문이야?”
무서운 남자다. 어떻게 스테판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걸 아는 거지?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진지한 표정과 달리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그 녀석에게 은근히 신경을 많이 썼지. 몰래 쳐다보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 저번에는 웃어 주기까지 했잖아.”
“내가 웃었다고? 언제?”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걸 구경하고 싶다고 한 날.”
벌써 꽤 오래전 일이다. 그녀는 그날 무얼 했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에드가는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이까지 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는 괜찮아졌지만 그날 그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심지어 손에는 상처까지 있었다.
‘설마 이거 질투?’
새삼스레 기억을 되살려 보니 그녀가 다른 사람을 향해 웃거나 칭찬할 때면 그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주변의 관심과 애정을 넘치게 받아 그런 데 무심해 보이던 남편이 예상보다 질투가 심한 타입인 것 같았다.
“아! 그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 거 당신이 한 짓이었어?”
“그래.”
뻔뻔스레 턱을 치켜들며 에드가가 대답했다.
가끔 그녀가 스테판의 꽉 잡힌 근육 같은 걸 흘겨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모른다.
혹시 저런 놈이 취향인 걸까? 얼굴로는 남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나 취향의 스펙트럼이란 다양하기 마련이다.
어떤 여인들을 얼굴보다 키와 몸매, 근육을 좀 더 본다. 그는 칼에게 아령을 준비하라고 시켜 몰래 집무실에서 운동까지 했다.
사실 그는 그녀가 청하기 전에 자신의 호위에서 스테판을 배제하기 시작했었다.
저놈이 아내가 좋아할 만한 얼굴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보기만 해도 밥맛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 주위에 잘생긴 놈들의 씨를 싹 다 말려 버리고 싶었다.
“바보야? 나를 납치하고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 놈 때문에 내가 얼굴을 붉히다니……. 그래, 내가 얼굴을 좀 밝히는 건 인정해. 그래도 그 정도는 아냐!”
난생처음 바보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그의 질투는 멈추는 법을 몰랐다.
“그럼 누구 때문에 그런 거야!”
“당연히…….”
스테판이 그를 좋아하는 줄 착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서라고 대답하려던 루비카는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만약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결국 스테판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거네!’ 하고 의기양양해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냐고 펄쩍 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 때문이지.”
“나 때문이라고?”
놀랍도록 빠르게 그의 화가 가라앉았다. 대신 목소리에 묘한 기대가 서렸다. 그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변명거리를 만들어냈다.
“그냥 지나치듯 한 말인데 어떻게 이렇게 수색대를 준비했나 싶어서 놀랐고, 역시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싶어서…….”
흘끗 곁눈질을 하니 그는 이미 반 이상 넘어온 눈치였다. 어쩜 이리 의심 하나 없이 쉽게 자신의 말을 믿는 걸까? 그는 정말 제국 최고의 두뇌가 맞는 걸까?
“새삼 멋지다고 생각했어.”
“그래?”
입에 발린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활짝 웃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세상의 어떤 화가도 그의 미소를 화폭에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리라.
그의 미소가 더 보고 싶었던 루비카는 작정한 듯 칭찬의 말을 쏟아냈다.
“응, 방금 남작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던 모습도 멋있었어. 여기가 어디인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마석마차로 돌아가려면 몇 시간이면 충분한지 어떻게 계산한 거야? 역시 당신은 똑똑하구나. 몇 마디 말로 순식간에 부하를 휘어잡는 것도 멋지고 그런 멋진 사람이 내 남자구나 싶어서 놀랍고…….”
“하하하.”
동굴 앞을 지키고 있던 수색대는 깜짝 놀랐다.
공작이 저리 큰소리로 웃는 것을 목격한 건 처음이다. 그들이 본 공작은 대체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거나 짜증을 내거나 그들의 멍청함에 한숨을 치다 못해 몸서리치는 모습이었다.
호위를 하며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했던 공작 부부의 사랑싸움에 돋았던 닭살이 다 사라질 정도였다. 그에 반해 칼은 침착했다.
‘모로 남작이 화를 면하겠군.’
평소에는 모시기 힘들 정도로 깐깐하고 기준이 높은 주인이었으나 부인과 관련되어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조금 전까지 한 시간 늦게 도착한 수색대 때문에 기분 나빴던 걸 까마득하니 잊은 것 눈치였다.
“나는 당신이 무기만 잘 만드는 줄 알았는데…….”
“사병들은 잘 다루진 못해. 지금만 해도 한 시간이나 늦게 왔잖아. 군기가 다 빠졌지.”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했다. 이 대목에서는 천하의 칼도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