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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68화 (168/212)

# 16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8화

“뭐?”

“나한테 무척 중요하거든.”

가끔 그가 구름 위의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냉철하게 일을 처리하거나 놀라운 발명품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거나. 하지만 어떤 때는 정말 구제불능의 어린애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다.

“둘 다 똑같은 사람이잖아.”

“달라! 당신에게는 똑같은 사람일지 몰라도 나는 달라. 당신이 날 보며 아르망따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날 사랑했으면 좋겠어.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남자를 좋아했는지 몰라. 지금 옆에 이런 보석 같은 남자를 두고!’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아르망인데 왜 내가 아르망을 좋아한 걸 후회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면 좋겠어.”

에드가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용서를 빌어도 부족한데 이상하게 자꾸 그녀에게는 투정을 부리고 싶어진다. 그녀의 속이 쓰렸던 만큼 자신도 속이 쓰렸고,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의 원인을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하소연하고 싶었다.

“에드가,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건 결국 한 사람이잖아.”

기묘한 패러독스 앞에서 루비카가 그를 달래려 들었다.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데도 아직 아르망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는 그녀에게 그는 못내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다. 자신도 안다. 유치한 거.

“그래서 나야! 아르망이야?”

그런데 듣고 싶다.

“……당신이지.”

누워서 절 받기나 진배한 대답에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천사 같은 미소에 루비카의 마음도 사르르 녹았다. 하필이면 얼굴을 밝히는 자신에게 대륙 최고의 미남을 점지해 주다니. 이래서는 평생 남편에게 지고 살아야 하잖아.

“나도 당신을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해. 아니, 당신만을 사랑해.”

그가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새삼스럽게 고백했다. 묘하게 평소보다 그의 향내가 더욱 짙어진 느낌이다. 사내다우면서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향, 그 향을 맡으면 숨이 가빠지고 볼이 발그레해진다.

“저기, 에드가.”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숨소리가 섞여 귀가 못내 간지러웠다. 맞닿은 상체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내 체온도 평소보다 높겠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좀 더 빈틈없이 그녀를 안고 싶었다. 좀 더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좀 더……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아까부터 말이야. 뭔가 단단한 게 다리를 찌르는데.”

그러나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 손을 풀었다. 만약 다리가 멀쩡하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구석으로 숨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에드가와 달리 루비카는 그에게서 떨어지기는커녕 좀 더 가까이 몸을 밀착시켰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껴안았다.

“이건 왜 가라앉지 않는 걸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루비카는 부끄러워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숨겼다.

“그건 다, 당신이 너무 예쁘니까.”

그의 대답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드가가 그런 말을 하니 영 설득력이 없다. 둘이 서 있으면 사람들이 홀린 듯이 바라보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일 거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 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 눈이 삔 거라고 불같이 화를 내겠지.

“어떻게 하면 가라앉아?”

“당신이 안 보이면 금방 가라앉아.”

그는 대답하고 후회했다. 아마 그녀가 원하던 대답은 이런 현상 보고 같은 말이 아니라 좀 더 대담한 요구였을 것이다.

부부로 산 지 몇 달이 흘렀건만 아직 제대로 관계를 치르지 않았기에 이런 일에 면역이 없었다. 남들은 대체 어떻게 서로를 유혹하고 기적 같은 일을 치르는 거지?

“에드가.”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 큰 결심을 끝낸 표정에 그의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런 누추한 곳에서 첫 관계를 치르고 싶지 않았기에 잘 돌려 거절할 계획이었지만 역시 기대되었다. 그녀가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았다.

“각하아아아아, 마니이이임!”

그러나 멀리서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동굴 안의 후끈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에드가는 욕설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디 계십니까아아아.”

어느덧 동굴 입구에 드리워진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짧아졌다. 본격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는지 개 울음소리가 들렸다.

루비카는 황급히 그를 껴안던 팔을 풀고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필, 왜 지금 이럴 때 수색대가 온 것일까.

“자를까?”

“응? 아, 허리에 묶인 밧줄 때문에 그래? 이건 그냥 내가 손으로 풀면 될 것 같아.”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칼 말이야. 전부터 당신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아 눈에 거슬렸어. 스테판이 당신을 납치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당신 주위의 방비가 소홀하기 때문이기도 했어. 이 기회에 자를까?”

“무슨 소리야? 칼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지금도 이렇게 우릴 구하기 위해 달려왔잖아.”

그래, 마침 이 타이밍에, 누구보다 열심히. 조금만 더 늦게 와도 되는데 말이야.

에드가는 이를 갈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키스 이상의 스킨쉽을 요구하면 거절하겠다고 다짐했던 건 이미 까마득하지 잊었다.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려먹게 만든 칼이 원망스러웠다.

“당신 다리는 음, 다쳤다고 둘러대자. 그리고…… 이건 어떻게 가라앉혀 봐.”

만약 이 상태 그대로 수색대가 그들을 발견하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축축한 동굴에서 남편은 다리를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뺨이 또 달아올랐다. 루비카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그건 불가능해.”

그녀의 간절한 간청을 그가 딱 잘라 거절했다. 심지어 그에게서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럼 내가 밖에 나가 있을 테니까…….”

“가지 마.”

에드가가 나가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깐 떨어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섭섭한데 아예 안 보이는 데 있겠다니. 깊은 밤 그를 깨게 한 상실감이 떠올라 괴로울 정도였다.

“이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우린 부부야.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당신 체면이…….”

“내가 언제 체면 걱정하는 놈이었던가?”

루비카가 입을 앙다물었다. 실제로 에드가는 발명가답게 체면보다는 실용을 따지는 사람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부부 사이 금슬이 좋은 건 자랑거리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 이런 모습이라니 주변의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다.

“쭉 곁에 있어 줘.”

손을 뿌리치고 나가려는 순간 그가 애절하게 말했다.

“앞으로 아침에 눈 뜨면 내 집무실로 와 주면 좋겠어.”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의 눈은 평소와 달린 불안정했다. 날개를 다쳐 길을 잃은 천사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루비카는 새삼 남편의 모습에 감동했다.

“당신이 앉기 좋은 의자를 들여 놓으라고 할게. 심심하면 뜨개질이나 자수를 해도 좋아. 당신 라떼를 좋아하지? 개 한 마리 정도는 데리고 와서 놀아도 괜찮을 거야.”

그는 필사적이었다. 집무실에서 일하는 종종 그녀가 보고 싶었다. 두 다리가 멀쩡했다면 벌떡 일어나 규방에 가 괜히 바느질하는 데 참견하거나 함께 산책을 가자고 졸라댔을 것이다.

둘은 부부였으나 그는 내내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모든 것이 밝혀진 바 그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보상받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까 옆에 있어 줘.”

대답 없이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황급히 덧붙였다. 그녀가 오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모든 것은 그녀의 마음에 달렸다. 하루 종일 그녀를 볼 수 있다면 어떤 대가도 다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도 참.”

수색대에서 푼 개 짖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벌써 지척에서 들렸다. 그러나 그녀에게 시선이 고정된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대체 자신이 뭐라고 이 남자는 초조하게 이리 대답을 재촉하나. 세상에 못가질 것이 없는 그가 지극히 평범한 자신에게 매달린다. 꼭 자신이 여왕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으나 그보다 더 기쁘고 뿌듯한 것은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가야지. 나는 당신의 아내잖아.”

그녀의 대답에 그가 눈부시게 웃었다. 그동안 얼음왕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쩜 저렇게 햇살같이 웃을 수 있을까. 심장이 떨리다 못해 멈출 것 같았다.

오늘 그의 모습은 그녀가 봤던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 순위 중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물론 제일가는 충격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였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가 존재하나 싶어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멍멍!”

“어머나, 라떼!”

그들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평소 에드가를 무척 따랐던 강아지 라떼였다. 라떼는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에드가에게 달려들어 그의 어깨와 뺨, 머리에 침을 묻히며 핥아 댔다. 덕분에 에드가의 흥분이 잦아들었다. 루비카로서는 참 다행이었다.

“각하, 마님!”

얼굴에 눈물자국이 가득한 칼이 라테를 쫓아 동굴에 도착했다. 칼은 미노스의 설명을 듣자마자 모로 남작가의 추척단과 함께 밤새 말을 달렸다.

놀라운 이오스의 능력을 목격했기에 별일 없이 스테판이 잡히고 공작 부부도 무사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옥수수 밭에서 그가 본 풍경은 기겁할 만한 것이었다. 클레이모어 영지 내 가장 큰 옥수수 생산지였던 밭은 절반 이상이 날아갔고 곳곳에 꽂힌 바위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 드래곤의 능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혀를 내두르며 공작 부부를 찾고 있던 그는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기진맥진 쓰러진 말을 발견하고 사색이 되었다.

아무래도 별일이 생긴 것 같다. 설마 낭떠러지로 떨어진 걸까? 그 뒤로는 정신이 하도 없어서 기억이 드문드문 난다.

바로 절벽으로 내려가는 걸 모로 남작이 죽을 생각이냐고 소리쳤고, 안전한 길로 내려가는 도중에 목이 쉴 정도로 각하와 마님을 불렀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고 신에게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모른다.

“무사, 무사하십니까?”

제일 먼저 칼의 눈에 들어온 것은 루비카였다. 다행히 그녀는 조금 초췌할 뿐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반쯤 제정신이 아닌 칼은 무사함을 목격하고도 질문했다.

하늘 같은 마님이 아니라면 몸에 손을 대어 환상인지 아닌지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응, 괜찮아. 칼.”

“각하는……!”

뒤늦게 에드가를 발견한 칼이 기겁했다. 라떼가 에드가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의 얼굴을 없애 버릴 기세로 핥아 대고 있었다.

그가 아는 에드가는 라떼의 저런 애정 공격을 절대 좌시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설마 낭떠러지에 떨어질 때 잘못되어 팔도 못 가눌 상태가 되었나?

그의 평소 성격을 보았을 때 루비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쿠션으로 삼고도 남았다. 그는 거의 에드가 앞에 쓰러지다시피 하여 울부짖었다.

“억, 억!”

어찌나 놀랐는지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언제나와 똑같으니 호들갑 떨지 마.”

인상을 찌푸린 에드가가 차갑게 말했다. 칼이 오해할 만도 했다. 그 낭떠러지는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높이였으니까. 평소와 똑같은 에드가의 목소리와 차분한 루비카의 모습에 칼도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각하, 다리는?”

“밤이 되면 괜찮아질 거야.”

“칼, 내가 체크해 봤을 때 신경이나 근육이 손상된 부분은 없었어.”

공작의 바지는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릴 정도로 다 찢어져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지자마자 루비카가 에드가의 상태를 확인해 본 것 같았다. 안심과 함께 걱정스러웠다.

“저, 혹시…….”

“왜 그런지 알아.”

마님에게 진실을 밝히길 차일피일 미루던 공작이 드디어 절벽 끝에서 고백한 눈치였다. 얼마나 많은 것을 밝혔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예상대로 마님은 포용하기로 마음먹은 눈치였다.

정작 사랑에 빠진 각하는 마님이 얼마나 이해심이 넓은지 몰라 그간 전전긍긍하느라 귀한 시간을 다 까먹었지만 말이다. 스테판의 행동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마님, 감사합니다.”

각하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각하!”

뒤늦게 쫓아온 모로 남작과 수색대도 동굴 앞에 도착했다. 에드가는 남작을 보자마자 대뜸 지금 몇 시냐고 물었다. 남작은 황급히 회중시계를 꺼내 대답했다 .

“한 시 정도입니다.”

“늦어! 적어도 정오에는 도착했어야지. 이래서 스테판을 잡을 수 있겠어?”

“아, 그, 죄송합니다!”

공작은 평소처럼 깐깐하기 그지없었다. 모로 남작은 절벽으로 내려오는 길을 찾느라 그랬다는 대답을 삼키며 일단 사죄했다. 만약 그런 말을 했다가는 클레이모어 영지의 지도도 다 외우지 못했냐는 불호령이 떨어질 눈치였다.

“모로 경, 마차를 불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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