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67화 (167/212)

# 16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7화

“이렇게 마구잡이로 만지는 게 무슨 테스트야!”

“그럼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 근육이 굳지 않도록 마사지하는 거.”

“괜찮아! 다리는 저녁이 되면 멀쩡해질 거야!”

“어떻게 확답해? 자, 고집부리지 말고.”

그녀의 손길이 허벅지에서 점점 올라와 서혜부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난생처음 머릿속이 표백되는 경험을 했다.

어떤 압박에도 져 본 적이 없건만 그녀의 공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에드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매번 그랬으니까!”

“매번 그랬다고?”

루비카의 손이 딱 멈췄다. 뒤늦게 에드가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다리가 이렇게 마비되었다가 저녁이 되면 멀쩡해지는 일이 흔하다는 거야?”

“아니, 이건 그냥 말실수야.”

“칼은 낮 동안 당신의 집무실에 누가 들어오는 걸 지나칠 정도로 경계했지.”

“그건 내가 예민해서 방해될까 그랬던 거야.”

“그러고 보니 낮에 걷는 걸 본 기억이 없어. 항상 밤에 만났고 수도에 갈 때도 새벽에 마석마차에 타서 이동했으니까…….”

최대한 얼버무리려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에드가는 그녀에게 자신이 아르망이라는 사실을 밝혀도 저주까지 말할 자신은 없었다.

아직 푸는 법에 대한 단서를 찾지도 못했다. 지난 삶에 자신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은 그녀에게 또다시 무거운 짐을 지게 할 수는 없었다.

“에드가, 솔직히 말해 줘.”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감쌌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그녀의 지나친 억측이고 착각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보석 같다고 마음속으로 칭송해 마지않는 적갈색 눈을 보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번에 거짓을 고하면 이 관계는 끝장난다.

“저주야.”

그녀에게 끝끝내 숨기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이타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녀에게 미움받는 걸 선택했겠지.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자신을 떠나는 걸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저주?”

“내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건 거짓말이야.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정을 목격하고 그분의 목숨을 거두셨어. 그리고 내게 두 번 다시 햇살 아래에서 걷지 못한다는 저주를 내렸어.”

머릿속이 팽팽 돌다 못해 아파 왔다. 처음 만났을 때 이오스가 자신을 무척 특별하고 강한 존재로 취급했던 것이 떠올랐다.

복잡한 퍼즐이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맞춰지려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지독히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움직였다.

“어머니의 정체는?”

“님프.”

짤막한 대답이었다.

거기까지.

거기까지만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의 경고와 달리 마음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럼 날 찾아온 건 저주 때문이었던 거야?”

일순 그의 얼굴에 고통이 지나갔다. 때때로 자신을 경멸하지 말아 달라고 그가 애원했던 게 기억났다. 정말 그가 그저 저주를 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자신을 찾은 걸까?

‘괜찮아. 상관없어.’

동기야 어쨌든 그가 자신에게 보여 준 사랑은 진짜였다. 그는 그런 감정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저주를 풀 수 있어? 나, 뭐든 할게.”

어떤 사심도 담기지 않은 적갈색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여태껏 누군가에게 이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왜 그녀는 그동안 자신을 속인 거냐고 따져 묻지 않는 걸까. 어째서 자신은 이런 사람을 두고 경멸받을까, 사랑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느라 진실을 숨겼던 걸까.

“저주에 걸렸을 때 어머니의 편이었던 유모가 유품을 남겼어. 그건 직접적인 단서는 아니었지만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특별한 도구였어. 당신을 만나기 일주일 전에 유품이 사라지고 당신의 이름을 적은 쪽지가 그 자리에 대신 있었어. 그리고 그 글자는 틀림없이 내 필체였지.”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특별한 도구, 그의 필체로 남겨진 그녀의 이름.

설마와 억측이라는 단어가 교차했다. 머릿속이 꼭 심장처럼 뛰었다. 루비카는 고개를 떨구고 이마를 짚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질문했다.

“그 유품은…… 설마 반지였어?”

말을 하는 목소리가 꼭 풀피리와 같았다. 그녀는 그가 이 이상한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응, 가운데에 내 눈동자와 같은 푸른 돌이 박힌.”

그러나 그는 알아듣고 심지어 대답했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고개 숙인 그녀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래, 아르망의 가슴에서 항상 흔들리고 있었던 반지는 꼭 지금 에드가의 눈과 같은 푸른색이었지. 매일 아침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확인했으니 확실하다.

-각하의 풀 네임을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집사가 지나가듯 한 말에 에드가의 기나긴 이름이 적힌 책자를 읽어 본 적이 있다.

인명사전과 같은 이름 속에 적힌 ‘아르망’이란 글자를 그녀는 너무나 쉽게 지나쳤다. 그 이름은 너무 흔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눈이 먼…….’

눈은 나중에라도 멀 수 있다. 그녀의 청에 이 주를 매달려 값싼 비누를 발명한 아르망과 다른 일들을 다 제쳐 두고 리본 기계나 재봉 기계를 개발하는 데 매달린 에드가의 모습이 겹쳐졌다.

물론 그와 아르망은 다른 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얼굴 생김새가 꽤 달랐다. 하지만…….

“에드가.”

루비카가 그의 양 뺨을 다시 손으로 감쌌다. 더 이상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웃어 줘.”

에드가의 웃음을 볼 때마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그렇게 무성의하게 말고 활짝.”

“내가 당신 부탁을 무성의하게 수행할 리가 없잖아.”

에드가는 그 이상 항의하지 않았다. 루비카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남 앞에서 꾸민 웃음을 지은 적이 없는 그에게 ‘활짝 웃기’는 꽤 수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감히 누구의 명령인데 거부하랴. 그는 그녀의 마음에 들 만한 웃음을 짓기 위해 바삐 머리를 움직였다.

‘최근에 가장 기뻤던 일은…….’

역시 그녀가 그에게 자신도 하고 싶다고 말해 줬던 일이다. 아, 방금 전 이마에 해 준 뽀뽀도 무척 기뻤다.

갑자기 왜 그런 행동을 한 걸까? 평소의 멀끔한 모습의 자신에 비해서 영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설마 그녀도 자신이 그리한 것처럼 그가 섹시하다고 생각한 걸까?

어느덧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고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웃고 있는 근육의 미세한 떨림과 버릇 속에 아르망이 있었다. 놀랍도록 얼굴이 달라 그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얼굴이 그토록 변한 걸까? 루비카는 먹먹한 마음이 되어 그의 이름을 불러 보려했다.

하지만 가슴에서부터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

아르망이란 단어를 내뱉기 전 그의 입술이 그녀와 겹쳐졌다.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으니까.”

몽롱한 눈빛이 된 루비카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열린 촉촉한 입술은 몇 번을 맛봐도 그에게 갈증을 일으켰다.

조금 진정했던 아래가 다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하필 이런 중요한 때에 이러다니, 그녀가 눈치채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까?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짐승은 절대 그녀의 취향이 아닐 것이다.

“질투가 나다니?”

“난 에드가야. 아르망이 아니라.”

그는 아래를 가라앉히는 데 집중하며 대답했다. 다행히 그녀는 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질문했다.

“왜 내가 아르망이라고 부를 거라고 생각했어?”

에드가는 잠깐 시간이 멈춘 줄 알았다. 그녀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만 신경 쓰느라 정작 중요한 걸 놓쳤다.

입을 열었으나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존재였다.

“설마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이오스 때문에 흔들렸던 땅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부정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어디까지 아는 거야? 나랑 만났던 일 기억해? 당신이 날 구해 줬던 걸, 가슴 위에 반지를 올리고 속삭였던 말이 뭔지 기억해?”

이번에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

눈물이 봇물처럼 터졌다. 아르망과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고되었지만 그가 있어 행복했던 기억들.

만약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전하고 싶은 말만큼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왜 반지의 대단한 힘으로 스스로를 구하지 않고 그녀에게 썼는지, 혹 자신의 마음을 눈치챘었는지. 하룻밤을 다 새우고도 풀지 못할 회포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유일하게 답을 줄 수 있는 그는 그녀와 함께했던 기억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아르망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간 자신이 얼마나 고민하고 자책했는지 에드가는 알고 있을까?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이 행복하고 기쁠수록 죄책감이 커졌다.

자신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지, 그녀에게 다시 삶을 살 기회를 준 아르망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에드가를 사랑하기로 결정했으면서 아르망을 걱정하는 건 그에 대한 배신 같아 항상 가슴이 무거웠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니, 처음에는 나도 몰랐어.”

에드가가 다급히 말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루비카의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럼 언제부터?”

“당신이 야한 옷을 입었던 날.”

루비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에게는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에드가에게는 무척 강렬한 기억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하다. 하지만 그는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아래가 뜨뜻하다 못해 불탈 지경이었으니까.

“꽤 오래전이잖아!”

이번엔 제대로 뿔이 났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의 양 볼을 잡아 늘렸다. 에드가는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통을 견뎠다.

“왜 진작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나는…….”

그를 사랑하는 데 그렇게까지 망설이고 힘들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일찍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전기가 통하듯 몸이 찌릿해지는 걸,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좀 더 오래 깊이 이어지고 싶은 걸 무시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미안해, 루비카.”

그는 루비카의 뺨에 방울진 눈물을 입술로 훔쳤다. 혹여나 자신을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 선언할까 두려웠으나 그녀는 그를 밀치지 않았다. 이처럼 착하고 순진한 사람에게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왜 그랬어? 대체 왜 숨겼어?”

원망의 말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그녀였다. 미안하지만 만약 시간을 다시 과거로 돌릴 수 있다 해도 그는 자신이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걸 알았다. 지독히도 이기적이다. 하지만…….

“당신의 진짜 사랑을 받고 싶었어.”

그녀를 제 다리 위에 올려 안으며 고백했다. 따뜻하고 달큼한 체온이 퍼졌다. 그는 그녀를 만나고서야 사람의 체온이 이다지도 따뜻하고 기분 좋은 것인지 알았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당신을 사랑했어. 그리고 그 사실을 고백하면 당신이 내 마음을 쉽게 받아 주리라는 것도 알았어. 하지만 그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르망을 사랑해서잖아.”

“에드가…….”

그녀는 그에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방금 전도 그의 미소에서 아르망을 찾지 않았는가.

“나는 당신이 그저 내가 나라서 사랑하길 바랐어.”

그의 음영진 얼굴을 루비카가 쓰다듬었다. 아까까지 그와 아르망 사이의 공통점을 찾았다면 이번에는 다른 점을 찾았다.

손가락에 달라붙을 정도로 촉촉한 피부, 오뚝한 콧날, 암흑처럼 짙고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오만하게 빛나는 눈동자. 달랐다. 그와 아르망은 확실히 달랐다.

“에드가, 나는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미래에 아르망이란 이름을 가진 당신을 만났어. 그때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어. 당신도 지금과 달랐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

그가 루비카의 손을 잡았다. 영혼을 꿰뚫어 볼 것 같은 푸른 눈은 되물었다.

“지금의 나는?”

“사랑해.”

그녀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신기한 일이다. 시간을 거슬러 아르망의 과거인 그와 다시 만났다. 만난 시기와 주변의 상황도이나 지위도 달랐지만 그를 사랑하게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심지어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던 아르망과 달리 제법 독선적이어서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세상에 운명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럼.”

잠시 그가 침을 삼켰다. 꽤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으나 망설여지는지 한참 입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숨을 몇 번 들이쉬더니 빠른 속도로 말했다.

“아르망보다 날 더 사랑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