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6화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는지 짐작할 수 없어 에드가는 조금 당황했다.
“응? 나는 위험하니 숨으라고 하고 당신은 여기 있어도 괜찮다니, 당신이 투명인간이야 뭐야?”
“내 말은 그 소리가 아니라……. 나는 총도 있고 칼도 있어. 하지만 당신은 그런 걸 다루지도 못하잖아. 내가 여기서 망을 볼 테니까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
“고집쟁이!”
그녀는 자신을 지키려고만 드는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위험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다리가 불편한 그였다. 에드가를 데리고 동굴로 가기로 결심한 그녀는 아주 익숙한 솜씨로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얼굴을 넣고 양쪽 팔로 그를 부축했다.
“같이 안 가면 나도 동굴에 안 가. 안 숨어.”
“루비카.”
“잔말 말고 같이 가.”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겐 실력 행사가 답이다. 단호한 그녀의 의지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무거울 텐데.”
“이것보다 더 무거운 것도 옮겨 봤어.”
그리고 한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정말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었던 듯 부축하는 요령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겪은 거지?’
에드가는 입술을 꾹 눌렀다. 잠시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루비카에게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되었다.
그녀의 침착함은 제 나이 또래가 가지는 침착함과 조금 거리가 있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은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될 사람은 되고, 아닐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과정에 후회가 없도록 하는 것뿐.
그녀는 그걸 몸으로 체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미안해.”
“괜찮아. 에드가, 당신은 깃털처럼 가벼우니까.”
그의 사과를 다른 식으로 해석한 그녀가 농담을 던졌다. 부상자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발랄하게 농담을 건네는 건 전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매뉴얼 중 하나였다.
그녀가 이 어려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할수록 그의 마음은 어둠의 일로를 걸었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오만한 자신이 내민 불합리한 결혼 정도는 고생이라고 분류할 수도 없는 것이었겠지.
“자, 다 왔어.”
어느새 동굴 앞에 도착한 루비카는 그를 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잎이 풍성한 나뭇가지를 잘라 눈에 띄지 않게 입구를 가렸다.
널찍한 안과 달리 입구가 작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 입구가 동쪽 방향이라 햇살도 넉넉히 들어왔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거야? 다리를 삔 거야?”
위장을 마친 루비카가 동굴 안으로 들어와 에드가의 다리를 조심스레 살피며 질문했다.
이동하는 동안 보통의 부상자라면 응당 흘렸어야 할 신음을 그는 내지 않았다. 정말 아프지 않은 건지, 아픈데도 참은 건지 신경 쓰였다.
“삔 건 아니야.”
“그럼 어디가 부러진 것 같아?”
무릎을 살살 만지며 그녀가 질문했다. 에드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긴 어디가 부러졌으면 벌써 티가 났겠지.”
그녀는 병을 치료하는 데 정통한 건 아니었으나 외상에 대한 조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런 건 대체로 초기 치료가 중요하다. 제때를 놓치면 쉽게 고칠 부상도 평생 다리를 절 정도로 심각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내 자루를 벗길 때 썼던 칼은 어디 있어?”
“여기.”
에드가는 뒷주머니에 넣어 둔 작은 주머니칼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여전히 묶어져 있는 밧줄을 끊는 데 쓰려고 찾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칼을 건네받자마자 그의 발목쯤으로 가더니 부우욱 소리를 내며 바지를 찢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상처를 자세히 살피려면 바지를 벗기는 것보다 찢는 게 좋아.”
“그럴 필요 없어!”
“걱정하지 마. 이런 일에 자신 있어.”
환자란 자그마한 자극에도 불안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루비카는 입으로는 다정히 에드가를 달래며 손으로는 자비 없이 그의 바지를 속옷을 간신히 가릴 정도가 될 때까지 찢었다.
곧 햇볕을 보지 않아 대리석만큼 새하얀 그의 다리가 드러났다. 피부색과 대조적으로 허벅지와 종아리는 두껍고 단단했다.
“흐음.”
지방이 거의 없는 그의 다리는 해부학 책을 보는 것처럼 근육을 분간할 수 있었다.
루비카는 요령 좋게 발목을 들어 올려 샅샅이 살폈으나 근육이나 뼈에 이상은 없었다.
혹 겉이 아니라 속이 다쳐 표시가 나지 않는 게 게 아닐까? 아니면 신경에 이상이 생긴 걸까?
“에드가, 아픈 데가 있으면 말해.”
그리고 수도원에서 배운 책 내용을 떠올리며 발목에서부터 천천히 그의 근육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종아리와 무릎을 거쳐 허벅지에 올라왔을 무렵이었다.
“그, 그만!”
에드가가 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얇은 잠옷은 그녀의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더욱이 다리에 닿은 것은 그녀의 손만이 아니었다.
대체 그녀의 몸은 뭐로 만들어진 걸까? 저 몸이 자신과 같은 살과 뼈로 만들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대체 뭘 먹고 이렇게 부드러운 거야!
“여기야? 여기가 아파?”
루비카가 방금 건드린 지점을 마사지하듯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순진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 귀여운 얼굴과 순수한 행동에 에드가는 그만 욕정해 버리고 말았다.
‘짐승! 변태!’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순수한 의료 행위를 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자신이 끔직했다. 게다가 그녀의 상태는 결코 좋지 않았다. 하얀 잠옷은 풀과 진흙으로 더럽혀져 있었으며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겨우 숨구멍만 난 자루 속에 있었던 탓에 얼굴과 온몸이 땀과 진흙으로 엉망이었다. 심지어 말 비린내가 났다.
‘제길’
하지만 미친 듯이 섹시하잖아.
하반신이 제 기능을 못한다는 사실에 여러 가지 의미로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짐승 같은 생각만 했을 뿐 행동하지 않았고, 또 이때가 아니면 언제 그녀의 이런 손길을 느껴 볼까 싶었다.
“에, 에드가?”
결국 그녀도 그의 이상 상태를 눈치챘다. 성난 바지에 그녀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에드가 이상으로 자신의 몰골을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 과감히 그의 다리를 만질 수 있었다. 그런데 설마 이 꼴인 자신을 상대로 그가 흥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쩌지?’
고개를 푹 숙인 에드가만큼 그녀도 당황했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바람에 그의 허벅지 위에 있던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강한 자극에 에드가의 잇새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미안해!”
“……아니, 괜찮아.”
잔뜩 쉰 목소리로 그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처 없이 흔들렸다.
평소에는 금욕적인 분위기를 풀풀 풍긴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자신이 본 게 맞을까? 잠깐 바지가 잘못 접힌 걸 보고 지나친 착각을 한 게 아닐까? 신음도 아파서 낸 걸 수도 있잖아. 루비카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곁눈질로 에드가의 바지를 슬쩍 다시 살펴보았다.
에그머니나, 착각이 아니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좀 이상해.’
열기를 식히자 의구심이 들었다. 다친 곳은 없는데 걷지 못했다. 혹 척추나 신경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마사지하며 반응을 살펴보았더니 반사 신경을 비롯한 감각은 분명 살아 있었다.
비록 짧으나 그녀가 배웠던 의학 상식으로는 그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에드가.”
“응.”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그가 대답했다. 평소에는 큰 키 때문에 제법 든든하기까지 했던 그의 웅크린 모습이 낯설면서도 귀여웠다.
루비카는 그의 옆에 슬며시 앉아 어깨를 살짝 대었다. 놀란 듯 그의 등이 움찔했으나 다행히 피하지 않았다.
“다리를 봤는데 다친 데는 없었어. 저기, 음. 당신 반응을 봤을 때 마비가 되거나 감각을 잃은 것 같지도 않았고.”
“아, 응.”
“그런데 왜 못 걷는 거야? 설마 꾀병?”
장난스레 건넨 말에 발끈했는지 그가 단단한 가드를 풀고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외쳤다.
“꾀병이라니, 내가 그런 유치한 짓을 할 것 같아?”
얼굴을 보여 준 틈을 놓치지 않고 루비카가 그의 이마에 입 맞췄다. 이런 최악의 환경에서도 에드가의 얼굴에는 먼지 한 톨조차 묻지 않았다.
심지어 피부에서는 꼭 숲속의 요정 같은 향기가 났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그가 평소와 달리 부끄럼을 타서 그런지 이상하게 먼저 키스할 용기가 났다.
“루비카?”
갑작스런 입맞춤에 그가 깜짝 놀랐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루비카가 새빨개져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바지 앞섶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보다 좀 더 솟아오른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왜 자꾸 저 민망한 게 눈에 밟히는 건지 모르겠다.
“루비카.”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새초롬하니 고개를 돌렸지만 시선이 자신의 몸 어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똑똑히 보았다.
작은 동굴 안에서 타오른 마음의 불길이 방금 전의 민망함을 활활 불태워 없애 버렸다.
“응.”
대답하는 그녀의 입술을 그가 더듬었다. 그녀가 뿌리치지 않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분홍빛으로 변한 뺨이나 쑥스러운 듯 내리깐 속눈썹은 이미 달궈진 그의 심장을 더욱 불타게 만들었다.
한참 입술을 쓰다듬던 검지가 빨려 들 듯 입술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촉촉하고 따뜻한 혀가 그의 손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넘어뜨리고 거칠게 안고 싶었다.
‘안 돼.’
하지만 첫 경험이 이런 동굴 속이라니 그건 너무 하지 않는가. 어떻게 참고 기다려 왔는데 순간의 충동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에드가는 간신히 그녀의 입술에서 손가락을 뺐다.
“에드가?”
그런 섭섭한 표정은 짓지 마. 아쉬운 건 이쪽이 더하니까. 에드가는 간신히 평정을 가장해 말했다.
“미노스가 여기가 어디쯤인지 칼이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어. 오기 전에 모로 남작가에 연락을 해 뒀으니 곧 사람들이 올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아, 스테판은 너무 걱정하지 마. 당신도 봤겠지만 이오스란 놈이 그에게 화가 날대로 난 상태니 여기까지 쫓아올 여유는 없을 거야.”
명백히 딴청을 피우는 그 때문에 루비카는 뿔이 났다. 사람을 달궈 놓고서 별안간 모른 척을 하다니!
이럴 거면 입술을 쓰다듬지 말거나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 향기를 가지지 말거나 하다못해 잘생기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감정을 담아 그의 허벅지를 꾸욱 눌렀다.
“뭐, 뭐하는 거야?”
에드가의 항의를 무시하고 루비카는 노골적으로 그의 허벅지를 주물럭거렸다. 그의 얼굴과 달리 본능적인 기관은 욕망을 숨기지 못했다.
그 반응도 흥미로웠지만 거기에 자신과 달리 탄력 있다 못해 단단한 그의 허벅지는 만지는 재미가 있었다.
“다리가 괜찮은지 테스트 중이야.”
“테스트는 아까 했잖아.”
“글쎄, 그걸론 충분하지 않아서 말이야.”
이번엔 그녀가 모른 척할 차례였다. 고문도 이런 고문이 따로 없다. 에드가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