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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63화 (163/212)

# 16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3화

미노스가 말릴 새도 없이 이오스가 반응했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에는 미노스와 집사 칼만이 남았다.

덕분에 난감한 입장이 된 미노스는 필사적인 미소를 띠며 집사에게 농 아닌 농을 건넸다.

“하하하, 이오스 님이 작동 안 하는 두뇌 대신 들고 다니는 저를 빠뜨리셨네요.”

난감한 입장이 된 건 미노스만이 아니었다. 이오스의 손을 잡고 공작가를 떠난 에드가가 정확히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입과 코로 흙이 쏟아졌다.

“이런, 땅에 들어가기 전에 숨을 참으라고 말하는 걸 잊었네.”

그리 말하는 이오스의 목소리에는 미안함보다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잊기는 무슨, 일부러 말 안 해 준 거군.’

에드가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지금은 알량한 자존심보다 루키바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최대한 흙을 삼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숨을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입에 흙이 가득 들어차다 못해 기도마저 막힐 것 같은 순간 드디어 땅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에드가는 입 안 가득 들어찬 흙을 내뱉으며 숨을 몰아쉬웠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하하하, 내가 하필 지룡이라 네가 고생이네.”

흙을 다 뱉어 내자 맑은 공기와 함께 옥수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는 어디지?”

“글쎄. 미노스, 여기가 어디지?”

이오스는 아무 생각도 대책도 없이 그저 루비카의 냄새를 쫓았을 뿐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움직이길 거부하는 자신의 뇌 대신 데리고 다니는 고블린에게 답을 요구했으나 정적만 흘렀다.

“아차, 미노스를 빠뜨렸군.”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이오스는 다시 땅속으로 사라졌다. 에드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김새나 아무렇지 않게 흘린 말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는 황금 드래곤 이오스인 듯했다. 포악하고 사나운 욕심쟁이라는 널리 알려진 그의 특성에 에드가는 하나를 추가했다.

‘멍청함.’

아무래도 저놈을 잡는 데 ‘스텔라’까지 개발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저렇게까지 멍청하다면 지금 그의 실력만으로도 충분했다.

엄청난 거리를 땅을 통해 한순간에 이동하는 등 능력은 엄청났으나 답이 없을 정도로 멍청했다.

납치당한 상대를 찾아오려면 조용히 접근해야 하는데 요란하게 땅 위로 솟아서 시끄럽게 떠들며 돌아가다니.

그런 멍청이와 함께하느니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게 백번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또 이오스가 돌아올 동안 루비카가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에드가는 이오스를 기다리지 않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옥수수…… 밭이군.’

어둠에 익숙해지자 서서히 주변 풍경이 들어왔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으나 한 번 본 것을 잊는 법이 없는 그의 뇌는 이곳이 클레이모어 영지에서 정확히 어디인지 금방 눈치챘다.

아쉽게도 모로 남작가와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남작가의 추적단이 아무리 빨리 말을 몰아도 오늘 밤 내에 여기까지 오기란 불가능했다. 이오스의 제의에 앞뒤 생각하지 않고 손을 잡은 건 잘한 판단이었다.

‘이쪽으로 가면 낭떠러지야. 내 영지를 안전하게 벗어나려면 저쪽 산으로 가는 걸 택할 거야. 산이니까 몸을 숨길 곳도 많으니 딱 안성맞춤이지.’

에드가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며 산으로 가는 길목을 향해 갔다. 영지 내 지도는 몽땅 외우고 있지만 지도로 아는 것과 실제는 차이가 꽤 났다. 틈틈이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루비카나 그녀를 납치한 스테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 날 제대로 데리고 온 게 맞나? 엉뚱한 데 내려놓은 거 아냐?’

의심하는 순간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에드가는 황급히 옥수수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의 예상대로 저 멀리서 달려온 두 대의 말은 산맥 입구에서 멈췄다.

긴 후드로 얼굴을 가린 남자 두 사람과 사람 크기의 자루가 보였다. 자루 안에는 분명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의 심장이 답을 주었다.

‘루비카.’

그녀가 사라진 뒤로 느꼈던 상실감이 채워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자루는 불안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에드가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잘 훈련된 기사인 스테판을 상대로 함부로 움직여서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였다.

“여기서부터 산을 통해 가야 해.”

“그래, 그럼…….”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은 자루를 벗겼다. 곧이어 나타난 루비카의 모습에 에드가는 가슴을 쓸었다. 시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 외에는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손발을 꽉 묶어 놓았고 주변을 보지 못하게 얼굴에는 자루가 씌웠다.

스테판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 움찔 놀라는 걸 보아 소리도 못 듣게 조치를 취한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루비카가 저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아파 왔다.

“산을 넘으려면 다리는 풀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달아나지 않을까?”

“산세가 험하니 달아나도 손바닥 안이야.”

그들은 잠시 토론을 끝내더니 루비카의 발을 묶은 밧줄을 풀었다. 그사이 에드가가 조심스레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스테판이 고개를 들었다.

“누가 있는 것 같군. 발자국 소리가 났어.”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축축한 땅을 밟았건만 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놈이다. 에드가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나도 들은 것 같아.”

대답하는 자는 스테판과 목소리가 똑같았다. 곧이어 후드를 내리자 드러난 얼굴마저 똑같았다. 다만 입고 있는 옷차림새가 조금 달랐다. 대륙의 북동쪽 지방 사람들이 선호하는 차림새였다.

‘그간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스테판 행세를 하며 집무실에 드나들었나 보군.’

단순히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스테판은 과거 국왕의 친위대 소속으로 왕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정보의 수위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이쪽이었던 것 같아.”

스테판의 쌍둥이가 가리킨 방향은 정확히 에드가와 있는 곳과 일치했다. 욕설을 삼키며 에드가는 안주머니에 숨겨 둔 총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갔다.

‘아니, 이걸 쓰면 루비카가 다칠 수도 있어.’

그가 가진 총은 일반적인 총과 달리 강력한 위력을 가졌으나 지금처럼 정확히 타깃만 쓰러뜨려야 할 상황에선 적절하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한참 궁리하는 와중에도 시시각각 스테판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결국 그는 총을 쓰는 걸 포기하고 주머니 속 탄에 손을 올렸다.

‘차라리 내가 다치고 말지.’

거리와 각도를 계산해 어떻게 하면 루비카를 구할 수 있지 한참 궁리했다. 성공 확률을 높지 않았지만 그녀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스테판과의 간격이 채 열 걸음이 남지 않는 시점에서 그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푸합!”

그때 에드가가 방금 나왔던 곳과 비슷한 위치에서 미노스가 튀어나왔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닌 고블린의 모습이었으나 눈과 입이 똑같아 알아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넌 고블린이면서도 왜 매번 숨을 못 참냐. 아까 그놈이 훨씬 더 잘 참던데.”

“그야 그분은…….”

에드가의 정체를 실수로 밝힐 뻔한 미노스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사이 수상쩍은 두 사람의 등장에 놀란 스테판이 재빨리 옥수수 밭으로 숨었다. 루비카를 데리고 있던 그의 쌍둥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젠장, 하필이면 왜 이쪽으로 몸을 숨긴 거야.’

덕분에 스테판과 그 사이는 채 세 걸음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스테판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오스와 미노스에 신경 쓰느라 이쪽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에드가는 제발 이오스가 한동안 스테판의 시선을 잡아 주기를 빌었다.

“아 참, 그런데 그놈은 어디 갔지?”

하지만 천하의 이오스가 그의 바람을 들어줄 리가 만무하다. 이오스는 사라진 에드가를 찾아 주변을 헤집기 시작했다. 혹 스테판이 눈치챌까 에드가는 눈도 깜빡거리지 못했다.

“어? 여기 아까 내가 정원에서 봤던 말이 있네?”

한술 더 떠 아주 대놓고 들으라는 듯 떠 벌렸다. 긴장도 조심성도 없는 그의 태도에 미노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도 미노스의 얼굴색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얘들은 어딜 간 거야.”

“좀 조용히 할 수 없습니까?”

“사람을 어떻게 조용히 찾아.”

스테판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대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인물 둘. 위험 요소는 제거하고 한시 바삐 이 자리를 뜨는 게 낫겠단 판단이었다.

그는 이오스의 정수리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백발백중의 명수라 불릴 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살은 이오스의 머리를 꿰뚫지 못했다.

“이게 뭐야?”

이오스가 허공으로 날아든 화살을 한 손으로 잡아챘다.

“화살이네요.”

“어떤 놈이 감히 나한테 시비를 걸어? 그놈인가?”

미노스는 한쪽 눈을 굴렸다. 말 두 마리가 나와 있고 사람의 흔적이나 싸움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공작이 먼저 숨고, 뒤이어 루비카를 납치한 자들이 이오스의 등장에 놀라 옥수수 밭에 숨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일단 공작의 이름을 입 밖에 내면 안 되겠군.’

“그분이 이오스 님을 공격할 이유가 없지요.”

“그럼 님프? 그런 것치곤 화살이 너무 약한데?”

이오스는 엄지와 검지만 사용해 화살을 무슨 과자처럼 부러뜨렸다. 그 괴력에 스테판이 놀랐다.

에드가는 그의 정신이 완전히 팔린 틈을 타 천천히 루비카가 있는 쪽을 향해 이동했다.

“그렇죠. 님프는 이오스 님을 공격할 분이 아닙니다. 장미를 아무 조건 없이 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이상한 취미를 가졌잖아.”

미노스는 식물에 집착하는 그쪽도 만만치 않게 취미가 이상하다고 대꾸해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건 그…… 음, 님프가 아니라 그분을 데려간 졸개들이 한 게 아닐까요? 감히 이오스 님인 걸 못 알아보고 자신들의 취미 생활을 방해한다고 생각해 제거하려 하나 봅니다.”

“뭐라고?”

완전 억지 주장이었으나 이오스는 아주 쉽게 넘어왔다. 감히 인간이 자신을 공격했단 사실에 광분한 그는 바로 화살이 날아온 쪽을 향해 손을 펼쳤다.

손바닥에 모이기 시작한 모래가 커다란 구가 되는 순간 이오스는 주문을 외웠다. 곧이어 거대한 모래 폭풍이 스테판이 있는 옥수수 밭을 쓸고 지나갔다. 다행히 에드가는 아슬아슬하게 모래 폭풍의 영역을 벗어났다.

“어라? 왜 아무것도 없지?”

모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쓰러진 옥수수만 수북했다. 에드가는 잠시 속으로 이오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멍청한 자식아, 바짝 누워 있으면 옥수수 덕에 안 보일 수 있는 것도 몰라?’

답 없는 이오스 따위 어찌 되든 신경 끄고 루비카나 구할 궁리나 하자. 에드가는 그리 마음먹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분명 스테판의 쌍둥이가 이쪽으로 숨는 걸 보았는데 찾기가 쉽지 않았다.

“쓰러진 옥수수 때문에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미노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오스는 자신의 뇌 대신인 미노스의 말은 쉽게 수용하는 편이었다.

“아하. 그럼 옥수수를 다 날려 버리면 되겠네.”

“마법을 한꺼번에 막 쓰면 나중에 힘이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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