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2화
“그럼 가자. 공작이란 놈이 있는 데로 가면 되지?”
“네, 아마도…….”
미노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클레이모어 저택을 바라봤다. 저택의 설계도를 떠올리며 창문 개수를 센 다음에 하나를 가리켰다. 정확히 공작 부인의 방이었다.
“저기일 겁니다.”
그리고 눈을 한번 감았다 뜨자 미노스와 이오스는 방의 한 가운데였다.
“공작이 없는데?”
“이상하군요.”
“어디 가둬 놓은 거 아냐?”
루비카를 변태로 오해한 이오스가 옷장 문을 다 열어 보았지만 당연히도 에드가는 나오지 않았다.
‘공작이랑은 따로 자나? 흠, 어찌 된 일이지?’
미노스가 궁리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이오스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이, 거기.”
그리고 훌쩍 내려가 아래에서 졸고 있는 하녀를 툭 건드렸다.
“공작은 어디 있어?”
“이오스 님!”
미노스가 그를 불렀을 때는 모든 게 늦었다. 눈을 뜬 하녀는 눈앞에 선 황금 눈에 황금빛 머리를 한 거대한 사내를 보자 저택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그 바람에 경비를 비롯한 집사까지 모두 잠에서 깨 헐레벌떡 뛰어왔다.
‘망했다, 망했어.’
미노스는 이오스를 내버려 두고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오스의 성격을 봤을 때 그랬다간 이 일대가 쑥대밭이 되고도 남았다.
어쨌든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자칼 은행의 소중한 고객이었다. 미노스는 두 손을 비비며 최대한 친절한 말투로 집사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급히 전할 말이 있으니 공작 각하를 뵙게 해 주십시오.”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온 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미노스와 이오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미노스는 구면이었으나 황금색 머리의 남자는 처음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몰린 와중에도 상관치 않고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 게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넘쳤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알갱이는 설마 황금인가 싶을 정도로 번쩍거렸다. 칼은 검을 꺼내려는 기사를 일단 제지하고 물었다.
“각하는 왜 찾는가?”
“각하의 소중한 분께 일이 생긴 듯싶어 알리려 합니다.”
“소중한 분? 마님께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해 보거라.”
수십 초가 지나지 않아 확인하러 간 하녀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마님이 방에 안 계십니다. 창문도 열려 있고 창밖으로 밧줄이 있어요!”
“뭐라고?”
한밤중에 공작 부인이 사라졌다. 일시에 다리 힘이 풀려 칼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으로 카펫을 짚었다.
근간에 둘은 사이가 좋다 못해 이제 완전히 부부로 살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심지어 공작은 내일이 되면 마님이 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줄 것이라고 퍽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마님이 설마 도망을 친 것은 아닐까?
“누가 데려갔는지는 우리가 목격했습니다. 각하께 여쭤볼 게 있으니 안내해 주시지요.”
미노스의 설명은 칼에게 마님이 도망친 게 아니라는 안도와 후회를 안겨 주었다.
저택 내에서 공작의 비밀이 들통날지에만 신경 쓰느라 공작 부인의 안전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위험분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 너무 안일했다.
“대시너 경, 스테판 경을 빨리 불러 주십시오.”
“네.”
갑작스레 사라진 공작 부인 때문에 저택은 그야말로 혼란 상태였다. 칼은 이 와중에도 침착함을 잊지 않고 오늘 불침번을 맡은 대시너 경에서 선지시를 내렸다.
저택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인 스테판을 섣불리 호위에서 배제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어쩌면 상대는 그가 호위에서 배제되길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미노스 님과 이쪽 분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안내하겠습니다.”
침착함을 잃지 않는 칼의 모습에 미노스는 감탄했다. 역시 대저택의 집사답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미노스가 칼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집무실이었다. 칼이 노크도 하기 전에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악몽을 꾼 듯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은 에드가가 나왔다.
“루비카는?”
역시 님프는 님프다. 목소리마저 아름답다니, 미노스는 자신의 쭈글쭈글한 얼굴을 만졌다. 신은 왜 모든 존재를 똑같이 만들지 않고 각각 다르게 만든 걸까?
그나저나 부부가 따로 자고 있었군. 미노스는 그제야 루비카가 사라진 걸 왜 에드가가 몰랐는지 이해했다. 이오스가 너무 당당하게 놀이 중이라 확언해서 그도 잠시 판단력을 잃었다. 바로 공작을 찾으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각하?”
“역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군. 어떻게 된 거지?”
“각하께서 느끼셨다면 벌써 저택을 빠져나가셨나 보군요.”
한마디 하자마자 미노스는 멱살이 잡혀 허공으로 쑥 올라갔다. 미노스는 형형히 빛나는 푸른 눈 앞에서 최대한 친절해 보이도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뼈가 시리도록 매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걸 없애지는 못했다.
“넌 뭐냐?”
“그러는 넌 뭔데 미노스를 함부로 건드려.”
이오스가 에드가의 멱살을 잡았다. 에드가는 평생 남의 멱살을 잡아 본 적은 있어도 잡혀 본 적은 없다.
지위를 떠나 힘에서도 어지간한 기사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나 에드가는 이오스를 보는 순간 놀라 미노스의 잡은 손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이 일로 가장 가여운 것은 갑자기 땅으로 쿵 떨어진 미노스였다.
“너는 뭐 하는 놈이지?”
황금빛 눈동자와 아래로 떨어지는 금 알갱이에도 에드가는 겁먹지 않고 마찬가지로 이오스의 멱살을 잡았다.
그 패기에 이오스는 잠깐 주춤했다. 무슨 배짱으로 제게 이러나 싶어서 기가 찼다. 자신보다 센 님프의 반려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이 남자의 팔 하나를 날려 버렸을 것이다.
“각하, 이러실 시간이 없습니다. 한시바삐 공작 부인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시간이 더 늦으면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미노스의 간절한 말에 에드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잠에서 깬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루비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왠 남자 둘에게 끌려가는 걸 이오스 님이 목격했습니다.”
미노스의 설명에 에드가가 이오스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곧 그녀가 제 남편 앞에서 망신당하는 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 이오스 또한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웬 남자 둘이 루비카를 데려갔다고?”
“그래. 손발을 묶고 말에 태워 갔어.”
신이 난 이오스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 루비카를 묶었는지 몸짓까지 보태 설명했다. 에드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칼에게 다급히 물었다.
“호위는 어떻게 된 거지?”
“이분들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호위단장이 스테판은 그동안 뭘 하고 있었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대시너가 도착해 다급히 외쳤다.
“스테판 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구간에서 가장 빠른 말 두 마리도 사라졌습니다.”
에드가는 급히 집무실을 체크했다. 스텔라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서류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루비카의 힌트 덕에 그는 이미 스테판을 의심하고 있었다. 다만 정말 첩자라면 어찌 움직이는지 추이를 보고 뿌리까지 소탕하자는 국왕의 조언에 그를 바로 배제하지 못했다.
만약 그가 루비카를 데려갈 거란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진작에 스테판을 공작가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칼, 당장 모로 남작가에 연락해.”
에드가는 자신이 납치당할 때를 대비해 미리 그의 가신이 모로 남작가에 비밀리에 전문 추적단을 꾸리라 지시했다. 그걸 루비카 때문에 이용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말을 준비해.”
상대는 하필이면 스테판이었다. 국왕은 에드가를 위해 그의 친위대에서 뽑은 가장 유능한 기사였다.
검술뿐만 아니라 은폐와 엄호에도 유능한 자였다. 추적단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직접 나서려는 에드가의 행동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칼이었다.
“각하, 위험합니다.”
몇 시간 뒤에 먼동이 튼다. 에드가는 칼이 왜 반대하는지 이유를 알았으나 물러날 수 없었다. 물론 훈련된 기사보다 자신이 뛰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루비카가 납치됐는데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일 빠른 말을 준비해.”
그는 다시 한번 칼에게 명령하며 집무실 안쪽 개인 금고를 열었다. 거기에는 비상사태를 대비한 그를 위한 개인 무기가 있었다.
에드가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으며 그중에서 한 손으로 집을 수 있는 자그마한 총을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비록 크기는 작았으나 위력은 포 하나와 맞먹는 것이다.
연이어 두 종류의 휴대용 탄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많이 가져가 봤자 기동력이 떨어지니 이 정도가 적당하다.
“준비 다 됐나?”
모든 준비를 다 마친 그는 집무실을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칼이 그에게 말채찍을 내밀 줄 알았다. 하지만 칼은 곤란한 표정으로 손을 뒤로 숨겼다.
“칼!”
“각하, 고정하십시오. 직접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해가 뜨기라도 하면…….”
“닥쳐!”
더 들어 줄 수가 없다는 듯 에드가가 그의 말을 잘랐다.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내가 너를 몇 번이나 용서했어. 그리고 경고도 했어. 칼, 내일부로 짐을 싸서 클레이모어 공작가를 나가게.”
“각하!”
칼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하지만 에드가의 냉혹한 얼굴에는 어떤 동요의 빛도 일렁이지 않았다.
활시위처럼 긴장된 분위기 속에 미노스가 눈을 굴렸다. 아까부터 관찰한 결과 공작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나 사정이 있는 듯싶었다.
‘해가 뜨기라도 하면…….’의 의미가 뭘까? 혹 공작 부인이 시간을 거슬러 오게 된 이유와 얽혀 있는 게 아닐까?
여기서 좀 더 이야기가 흘러가면 힌트가 나올지도 모른다. 미노스는 고블린다운 호기심과 집중력을 한껏 발휘해 추리할 예정이었다.
“흠, 내가 데려가 줄까? 한 오 분이면 되는데.”
흥미진진한 미노스와 달리 집사와 에드가의 싸움 아닌 싸움이 이오스는 지겹고 짜증났다. 그는 어서 빨리 님프의 이상한 취미를 그 남편이 알아서 망신당하는 장면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미노스는 산통 다 깬다고 속으로 이오스를 욕했다.
“데려다 준다고?”
“그래. 어차피 그 거리는 말을 타고 쫓아가도 무리일 것 같은데.”
“그녀가 어디쯤 있는지 알고 있나?”
“방향도 알고, 냄새도 알고 땅의 기운을 쫓아가면 돼.”
특이한 눈동자 색에 머리카락에서 금가루가 떨어지는 수상쩍은 남자가 수상쩍은 소리를 했다. 에드가의 흥미가 동한 얼굴에 칼이 대경실색해서 외쳤다.
“마석마차를 쓰면 됩니다, 각하!”
“그건 너무 눈에 띄어서 상대를 동요하게 할 수 있어. 그러다 루비카가 잘못되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흥분한 듯 보였지만 에드가는 어떻게 하면 루비카를 안전히 구해 올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이오스의 팔을 꾹 잡았다.
“가지.”
칼은 그의 말에 놀라고 이오스 역시 그의 행동에 놀랐다. 보통 인간이라면 그의 팔을 세게 잡는 순간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인간은 끄떡도 없는 게 무슨 무쇠로 만들어진 거 아닌가 싶었다.
‘님프랑 같이 살다 보니 영향을 받아 보통 인간과 달라졌나?’
그가 아직 아기 드래곤이었던 시절 이베르가 그에게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님프는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자신과 똑같은 님프로 바꿀 수 있다고. 대신 조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어디냐고 쓸쓸히 말하던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당시 흥미가 없어 그 조건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뇌는 그런 추론이나 상상을 즐기는 편이 못되었다. 그는 대충 님프의 반려는 님프와 비슷한가 보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빨리 가려면 땅을 통해서 가야 하니 좀 지저분하고 힘들 거야.”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