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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61화 (161/212)

# 16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1화

지나치듯 루비카가 한 말이 본의 아니게 그의 마음에 의심의 싹을 틔었다. 그녀가 스텔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나 첩자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국왕에게 스테판의 과거에 대해 소상히 알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생각해 보니 전부터 스테판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어.’

에드가는 자신만큼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루비카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스테판이 전부터 신경 쓰였다. 그래서 루비카가 스테판을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나치지 못했다.

에드가는 이 질투를 합당한 의심으로 정정하고 스테판을 그의 호위에서 천천히 제외시키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 오늘로 끝이야. 내일이면 다 말할 테니까.”

“네, 네.”

칼은 포기했다는 듯 대답했다. 에드가는 화가 났지만 루비카에 대해 칼 앞에서 한 호언장담 중 지킨 것이 거의 없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일주일 뒤에 휴가를 줄게.”

“못 쓰는 휴가는 주셔 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휴가를 좀 쓰라고. 안 쓰니까 주는 게 의미가 없지.”

“못 쓸 상황을 만들지 않습니까?”

그런 대화를 두런두런 나누며 칼과 에드가가 집무실 쪽으로 사라졌다.

한참 뒤 난간에서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바로 스테판이었다.

스테판은 에드가와 집사가 완전히 사라지자 공작 부인의 방으로 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녀와 기사 몇 명을 만나기는 했으나 호위단장인 그를 제지할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주변의 촛불을 끈 다음 미리 복사해 둔 열쇠를 사용해 방문을 열었다.

방을 가득 채운 달빛 덕에 사물을 알아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스테판은 마저 창문을 열어 아래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의 형제는 정확히 시간을 맞춰 말 세 마리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공작 부인만 옮기면 된다.

스테판은 방 한가운데 커다란 침대로 다가가 캐노피의 커튼을 젖혔다. 숙면에 빠진 루비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고른 숨소리를 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입가에 살짝 미소가 서린 천진난만한 그 모습에 스테판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남을 이렇게 고생시켜 놓고 세상 편안하게 자고 있는 모양새라니.

분노로 피가 끓어 곤히 자는 그녀를 깨워 혼을 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화풀이를 할 때가 아니다. 스테판은 미리 준비해 온 밧줄을 꺼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루비카를 묶기 시작했다.

“으음, 에드……?”

에드가의 손길인 줄 알고 경계심 없이 눈을 뜬 루비카는 스테판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소리 지를 새도 없이 입이 막혔다. 손발이 묶여 반항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에드가가 좋아도 그렇지, 이런 일을 벌리다니.’

루비카는 동정 어린 눈으로 스테판을 바라보았다. 스테판의 볼 주위 근육이 잠깐 씰룩하더니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반항했다가 목이 꺾여 죽을 수 있으니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요”

지금은 그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밧줄을 이용해 자신을 아래로 내려 보낼 것 같은데 그때 괜히 탈출을 시도한답시고 몸을 버둥거렸다간 벽에 부딪쳐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안전히 내려간 다음 입을 가린 천을 풀어 줬을 때 설득을 시도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스테판은 반항은커녕 내려가기 쉽게 협조하는 루비카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다. 침착한 태도는 마치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닌 것 같았다. 대체 그동안 무슨 삶을 살았던 걸까?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일단 그는 위에서 명령이 내려온 대로 루비카를 안전히 납치하기로 마음먹었다. 반항이 극심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죽이기로 했으나 최대한 살려 두는 게 이용 가치가 더 높다는 판단이었다.

밧줄을 이용해 안전히 밖으로 내려와 준비된 말에 루비카를 태웠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람의 얼굴을 본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스테판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공작 부인. 우린 구면이지요?”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그의 안장에 준비된 도주를 위한 전문적인 물품을 본 루비카는 이 일이 그저 스테판의 충동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한 납치극.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렇게 얌전히 따라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말에 줄로 몸을 고정하기 전 루비카는 그나마 자유로운 허리를 뒤틀어 말에서 떨어졌다.

“히이이잉!”

깜짝 놀란 말이 큰 소리를 내며 달려 나갔다. 엄청난 충격에 전신에 고통이 밀려왔으나 다행히 말의 뒷발에 채이지 않았다. 제발 놀란 말이 정원을 한바탕 휘저어 경비의 눈에 띄길 바랐다.

휘익.

하지만 스테판이 휘파람을 불자 고생한 보람도 없이 말이 다시 돌아왔다.

“착하지, 딩고.”

스테판의 손길에 말은 금세 진정하기 시작했다. 루비카는 풀밭에서 고통에 신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이 있는 위치는 경비의 사각지대였다. 호위단장이었던 스테판은 루비카보다 클레이모어 저택에 대해서 속속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이 일이 충동적인 게 아니라면 도주하는 경로도 아마 경비에게 발각되지 않게끔 철저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이런 일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차 루비카의 눈에 반대편 화단에서 노란 불빛이 언뜻 반짝이는 게 보였다.

‘이오스!’

잠시 황금 가루가 보였다 사라지는 걸 보아 그가 틀림없었다. 분명 미노스와의 약속은 내일이었는데 어째서 벌써 정원에 나타난 걸까?

어쨌든 이오스가 자신을 발견했으니 구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뭘 보는 거지?”

스테판의 목소리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다행히 화단 사이로 보였던 노란 불빛은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그쪽엔 아무것도 없어. 우리를 누가 발견할 거라는 희망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스테판은 루비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을 보길 바랐으나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눈빛이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잘나신 공작 각하께 당신 시체가 갈지도 몰라.”

발을 툭 건드리며 위협적으로 말해도 루비카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 사실이 지독히도 짜증스러웠다. 공작을 제 마음대로 조종하고 그의 속을 다 뒤집어 놓더니. 한번 정말 목에 칼을 들이밀어 봐? 허리에 찬 주머니칼에 손을 가져다 대는데 그의 형제가 고개를 저었다.

“스테판, 시간이 없다.”

“휴, 어쩔 수 없군. 이봐, 이제 당신은 내게 공작 부인도 뭣도 아닌 그냥 인질이니까 얌전히 따라와. 두 번째에는 참지 않을 거야.”

그를 자극하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 루비카는 얌전히 말에 올라탔다. 그사이에 이오스가 저번에 보여 줬던 시간을 멈추는 마법이라도 써 주길 바랐건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보 드래곤아, 내가 없으면 너한테 새 장미를 보내 줄 사람이 없다고!’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입이 막혀 불가능했다. 아마 이오스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남은 희망은 미노스다. 미노스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오스가 공작가의 정원을 혼자 헤집고 다니게 둘 리가 없다.

미노스는 적어도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아는 고블린이었다. 루비카는 그 사실에 희망을 걸었다.

루비카의 예상대로 멀리 떨어진 정원 구석에 미노스가 있었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한바탕 바닥 냄새를 맡더니 삽을 꺼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나무뿌리가 드러날 때까지 땅을 판 뒤 주머니에서 진주알 같은 걸 꺼내 하나 넣더니 다시 땅에 묻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이, 미노스.”

한참 님프가 화날 때를 대비해 도망칠 도주로를 확보하는 작업 중일 때 이오스가 그를 불렀다.

건들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심히 거슬렸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저 귀찮은 혹을 떼고 오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하지만 그는 루비카에게서 좀 더 받고 싶은 게 있다고 생떼를 썼다.

‘만족을 모르는 저 욕심쟁이. 앞으로 공작 부인이 골치 꽤나 아프겠군.’

하지만 일개 고블린이 드래곤 앞에서 어쩌겠는가. 그는 하는 수 없이 혹을 달고 왔고 지금은 삽을 내려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오스 님? 정원을 둘러보신다더니 뭐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발견했습니까? 루비카 님이라면 기꺼이 가져가는 걸 허락해 줄 겁니다.”

님프의 권역에서 그의 반려는 주인과 비슷한 권리를 가진다. 저번 장미꽃도 루비카가 허락해 준 덕에 별문제 없이 가져갈 수 있었다.

덕분에 루비카가 님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오스는 아직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걔 뭔가 이상한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취미가 요사스러운 것 같아.”

“이상한 놀이요?”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남에게 끌려가는 놀이를 하고 있던데?”

“네에?”

“거참, 님프한테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왜 그리 흥분하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이오스가 자신이 본 상황을 설명했다.

“그걸 그냥 내버려 두고 오셨다고요?”

“뭔가 놀이 중인 것 같은데 괜히 내가 끼었다 흥이 깨질까 봐 그랬지.”

미노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루비카를 님프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이오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클레이모어 공작 각하는 주변에 없었습니까?”

“공작? 그런 은밀한 취미를 남편이 알게 하겠어?”

미노스는 두개골이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꼈다. 보통 부부라면 한 침실을 쓰지 않나? 님프의 예민함을 생각했을 때 이 깊은 밤 부인을 이렇게 몰래 빼돌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말 이오스의 말대로 공작 부인에게 그런 은밀한 취미가 있어 공작이 모른 척해 주는 건가?

“이오스 님, 저 좀 인간으로 변신시켜 주십시오.”

미노스는 일단 클레이모어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만에 하나 그들이 공작 부인을 납치하는 중이라면 이를 묵과한 벌을 피하기가 어렵다.

“인간? 그걸로 변하면 작업하기 귀찮잖아.”

“작업은 일단 미루고 클레이모어 공작을 만나서 이 사실을 알리게요. 만에 하나 정말 납치라도 당하는 중이면 큰일 아닙니까?”

이오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님픈데 뭐가 걱정이야.”

이오스의 상식에 인간은 님프의 한 주먹거리도 안 된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재미있게 놀다 돌아오겠거니 하고 주머니에 손까지 넣은 채 방관자의 태도를 취했다.

미노스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은 걸 참고 조그마한 뇌를 불이 날 정도로 돌렸다.

“루비카 님은 본인의 취미가 공작에게 밝혀지길 원하지 않을 겁니다. 이걸 이용해서 협박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호오? 이걸로 협박을 하자고?”

이오스가 특유의 악동 같은 표정을 지었다. 미끼를 덥석덥석 무는 모습에 미노스는 이오스가 말만 지룡이지 사실은 수룡, 아니 3초면 모든 걸 까먹는 붕어일 거라고 속으로 혹평했다.

“시장에서 본 그 이상한 천, 많이 가지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렇지. 그걸로 나무를 꾸미면 좋을 것 같았어.”

“그걸 만드는 기계를 달라고 합시다. 그럼 이오스 님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루비카에게서 갈취하다시피 리본 장식을 가져간 이오스는 그걸 가장 아끼는 나뭇가지에 달았다. 리본은 제법 나무와 어울렸고 이오스는 좀 더 많은 리본을 원했다.

그는 일방적으로 미노스가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가는 데 따라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미노스의 의사는 한 톨도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오는 길에 들린 항구에서 리본 천을 가득 실은 배를 이오스가 발견하는 바람에 미노스는 진땀을 뺐다.

하필이면 상인이 ‘이건 모두 수출 물량이라 팔 수 없소.’라고 단칼에 거절하는 바람에 이오스는 분노로 눈이 돌아갔다. 당장 항구를 뒤집으려는 그를 미노스는 클레이모어에서 생산하는 물품이라니 공작가에 가면 더 다양한 종류로 많이, 심지어 공짜로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간신히 말리는 데 성공했다.

“그 님프는 좀 덜떨어진 데가 있으니 협박하면 금방 들어줄 것 같네.”

말이 끝나자마자 미노스는 예의 키 작은 인간으로 변신했다. 이오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미노스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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