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0화
신기하게 루비카는 얼굴이 새빨개져 당장에라도 달아나고 싶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곁으로 얌전히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행동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 있을까?
“하아.”
열정이 불타다 못해 온몸을 전소시킬 기세였다. 에드가는 당장에라도 루비카를 침대에 넘어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숙맥이었다. 불시에 닿은 가슴에도 제정신을 못 차리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서툰 자신 때문에 그녀가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꼭 끌어안거나 깊이 키스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다였다.
‘어디 가서 배워 올 수도 없고.’
공부라면 자신 있다. 요령만 배우면 무엇이든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처음은 그도 서투르기 짝이 없겠지. 게다가 이건 연습 같은 걸 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었다.
“저기, 에드가. 아까 미안해.”
서투르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살아온 세월이 있기에 그녀는 그가 무엇 때문에 한숨을 쉬는지 눈치로 알았다.
하지만 그녀도 숙맥이다. 그가 키스만 해도 눈앞이 새하얘지는데 유혹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뭐가 미안해. 사과하지 마.”
그는 오히려 제 입장에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루비카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 행동은 그가 자신을 자책할 때 자주 하는 습관이었다.
“저기, 에드가.”
보통 미리 말하지 않아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지 않던가. 하지만 숙맥 둘이 만나서 그럴 일은 없어 보였다. 루비카는 부끄럽기 그지없었지만 차라리 속 편히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음. 우리 이제 쭉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어떻게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결혼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성관계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는데 지금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입 안에서 혀를 굴리다 간신히 돌려 말했다.
“아이 만들 일도 생기겠지?”
에드가는 어지간히 부끄러운 일이 생겨도 얼굴색이 변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홍당무처럼 변했다. 루비카는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이미 홍당무였다.
두 홍당무는 잠시 서로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바닥으로 숙인 채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 겠지?”
간신히 그가 용기를 내어 맞장구를 쳤다. 부인이 먼저 말을 꺼내게 만들다니, 자존심이 퍽 상했다. 적어도 이런 일로 루비카를 부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남자답게 리드했어야 하는데 왜 이러고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당신도 경험이 없고 아는 것도 없을 것 같고…….”
“뭐?”
그가 고개를 벌떡 들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능숙해 보이려 노력했다. 적어도 처음에 그녀는 그가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는 바람둥이로 착각했다.
루비카 또한 경험이 없어 그의 키스가 경험자의 것인지 처음 하는 사람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냐니, 딱 봐도…….”
하지만 이후의 태도를 보아 그는 소문과 달리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여자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듯싶었다. 어쩜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그럴 수 있냐 싶었지만 원래 현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 맞아. 경험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
에드가는 솔직히 인정했다. 배움의 가장 첫 번째 자세가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음. 나도 없는데 처음은 엄청 아프대.”
“그래.”
에드가는 ‘그래.’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프지 않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둥 그런 입에 발린 말을 내뱉기에는 그는 지나치게 정직했다. 물론 루비카 한정의 정직함이었다.
“남자의 처음은 어떤지 몰라서 내가 뭘 어떻게 배려해야 할지 모르겠어.”
루비카의 걱정에 에드가는 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남자의 처음? 그건 그도 모른다. 여성의 첫 경험에 대한 글을 많았으나 남성의 첫 경험에 대한 글은 적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그가 조심스럽게 루비카의 손을 잡았다. 그저 그녀가 자신과 함께 있겠다 결심한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아프고 힘들다면 평생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까지 나오려 했다.
“둘 다 처음이니까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천천히 하자.”
요즘 에드가는 그녀가 잠들고 난 다음에 침실을 빠져 나갔다. 두 사람 사이가 확연히 좋아지다 못해 뜨겁게 불타는 건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곧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앤은 유산을 꾸미는 일을 차일피일 미뤘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압박에 자신만큼이나 에드가도 부담감을 느낄 거라고 루비카는 짐작했다.
그녀의 배려 섞인 말에 그가 잠시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있다 중얼거리듯 질문했다.
“그러니까…… 나랑 하고 싶어?”
루비카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다 못해 이제는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너는 하기 싫냐고 그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에드가의 눈동자 속 정염은 요즘 들어 더욱 거세어졌다.
가끔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 말고 그렇게 야한 눈으로 좀 보지 말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당연히.”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잠시 후 그녀가 보는 풍경이 휙 뒤집어졌다. 정신을 차리자 침대 위에 매달린 캐노피가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그의 묵직한 무게가 몸 위를 압박했다. 에드가가 그녀의 얼굴을 잡고 깊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당신은 악마야.”
노란 촛불 빛을 받은 그의 붉은 입술과 새하얀 치아가 보였다. 그의 입술이 촉촉한 건 누구의 것도 아닌 그녀의 입술 때문이었다.
루비카는 당신이야말로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신이 보낸 인큐버스가 틀림없다는 말을 하려던 걸 삼켰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쇄골에 닿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뇌가 처리를 거부했다. 그저 쇄골이 불타는 듯 뜨거웠고 호흡이 가빠졌다.
쇄골에 머물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온몸의 털이 섰다. 무의식중에 루비카가 그의 어깨를 꽉 잡는 순간 내려가던 입술의 움직임이 멈췄다.
두 사람의 얽힌 숨소리가 적막을 가득 채웠다. 그가 멈췄으면 하는 마음과 이대로 쭉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머릿속에서 전쟁을 벌였다.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 루비카는 여린 살에 닿은 그의 입술을 느꼈다.
‘따뜻해.’
입술도, 손도 서투름이 가득 묻어났지만 그 흔적마다 애정이 넘쳤다. 그라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무서운 마음이 그녀의 입술을 꼭 다물게 했다.
“루비카.”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상체를 올려 그녀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무서웠어?”
“아니.”
“거짓말.”
에드가가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 씁쓸함마저 묻어나는 미소는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표정에서 다 드러나.”
실제로 그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는 긴장이 사라지고 온몸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세상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살면서 한 번쯤 겪는 일인데 왜 이렇게 무서울까. 에드가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긴 팔로 그녀를 껴안았다.
“약속대로 천천히 할게.”
그리고 이마에 키스하는데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려니 무섭고, 안 하려니 아쉽고 자신도 대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야말로 아쉬워.”
그 표정을 읽었는지 에드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혼잣말인지 항의인지 알 수 없어 루비카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끝나는 해피엔딩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시작’이라는 하나의 큰 산을 넘은 것에 불과했다.
다행이라면 그녀와 에드가는 이미 ‘결혼’이라는 가장 중요한 산을 넘었다. 문제는 중간 과정에 있는 작은 고개들을 하나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드가, 나는…….”
“쉬, 괜찮아.”
에드가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줄 알고 괜찮다고 그러는 걸까?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모르겠는데…….
루비카는 조금 신기한 기분이 되어 에드가를 올려다보았다. 침대에 누웠어도 그녀보다 한참은 큰 그를 보려면 고개를 뒤로 젖혀야 했다.
한쪽 팔로 고개를 받치고 있는 그는 무척이나 말끔해 보였다. 방금까지 자신과 숨소리가 얽혀 있던 사내와 과연 같은 사람인가 싶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능숙해 보였다.
“아니야, 몇 번을 말해.”
에드가의 속삭임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내 마음을 읽은 거야?”
“아니. 표정에 다 보인다니까.”
그녀의 코끝을 중지로 살짝 톡톡 치며 그가 말했다. 루비카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법 분위기에 따라 입을 다물거나 웃어야 할 때를 분간해 표정을 관리할 줄 안다고 자신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장 해제된 듯 얼굴에 감정이 바로 묻어나는 것일까?
“자, 당신이 아이디어를 낸 게 잘되는 바람에 요즘 나만큼이나 바쁘잖아.”
루비카의 등을 쓰다듬으며 에드가가 속삭였다. 안마를 하듯 시원한 부위를 꾹꾹 눌러 주는 손길에 그녀의 눈이 스스륵 감겼다.
“에드가.”
“응.”
“어디 가지 마.”
루비카가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그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아침에도 여기에 있어.”
서로 마음이 통했으니까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그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계약 결혼일 때와 마찬가지로 밤이 되면 침실을 떠났다. 루비카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쉽고 서글펐다.
“응?”
그가 대답이 없자 그녀가 기어코 눈을 떠 재촉했다. 에드가는 조금 착잡한 심정이 되어 루비카를 바라봤다.
그라고 침실을 떠나고 싶겠는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그의 품에 안겨 사랑을 속삭이는데……. 할 수만 있다면 아침부터 새벽까지 루비카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내일이면 그녀가 아르망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할 테니까.’
오늘 하루만 거짓말을 하자고 에드가는 다짐했다.
“그래, 있을게.”
그의 대답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아플 정도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제 여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아 그는 그녀의 뺨과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 끊임없이 확인했다.
“루비카.”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하자 에드가가 속삭였다. 대답이 없자 그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루비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미안.”
들을 리 없지만 그가 사과했다.
“내일부터는 곁에 있을게.”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 그도 확답할 수 없었다. 어쩌면 루비카가 그에게 화가 나 각방을 쓰자고 선언할지도 모른다.
일을 저지를 때는 그녀가 자신에게 반하리라 확신했는데 정작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자 그 사랑이 떠날까 두려워졌다.
언제나 그러듯 세상에 ‘과거의 나’처럼 어리석은 게 없다는 후회가 들었다.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 참아 줘.”
미련이 남았는지 한동안 침실 앞에서 서성이던 그는 한참 뒤에야 침실을 나왔다.
“각하.”
침실 근처 벽에 기대 반쯤 졸고 있던 칼이 램프를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요즘 들어 나오시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십니다. 저는 스테판 경이 아니라 조금 체력이 부칩니다.”
보기 드물게 칼이 하품을 하며 항변했다. 에드가가 보아도 칼의 몰골은 말이 아니게 초췌해 보였다. 요즘 그의 시중과 호위를 칼이 도맡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테판 경이 힘들어 보여. 호위 업무가 너무 과중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