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59화
타티아나의 조사원을 크리스토퍼의 의상실에 위장 취업시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게 할 계획을 세웠다. 만약 진실을 제대로 파헤치면 카나가 수도에서 겪었던 일에 대한 명예도 회복할 수 있다. 수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디자이너의 스캔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 소식지도 불티나게 팔릴 것 같았다.
“그러니 제 청을 꼭 들어주세요. 부인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가브리엘은 마지막까지 협상과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공작 부인은 애매하게 웃었으나 머지않아 자신에게 넘어올 것이라 그녀는 확신했다.
* * *
루비카의 차 마시는 법이 실린 작의 새의 소식지는 무서울 만큼 팔렸다. 더불어 잡지에 소개된 장미사탕과 리본이 큰 인기를 끌어 루비카는 가브리엘에게 홍보비를 지급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물론 가브리엘은 홍보비 대신에 ‘칼럼 연재’를 요청했다. 여전히 자신이 없는 루비카는 대답을 보류했다.
어쨌든 차에 설탕과 우유를 타 마시는 방법은 귀족들에게 생소한 차를 더 익숙하게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차 모임에 초대받는 족족 참석하는 루비카 덕에 귀족들 사이에 차 모임 주최는 열풍과도 같은 인기를 끌었다.
좋은 현상이 있으면 부작용도 있기 마련이다. 갑작스러운 수요에 공급이 채 따라가지 못해 찻값이 무서울 만치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역사상 가장 돈이 남아도는 상태였기에 칼은 별 어려움 없이 차를 구했다. 찻값이 오른 것은 불행한 일이었으나 차를 즐기는 사람이 많은 건 좋은 일이다. 그는 그리 어렵게 구한 차를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방법으로 우려 공작 내외의 휴식시간에 대접하려 했다.
“아, 잠깐.”
에드가가 그런 칼의 행동을 제지하고 거름망에 비싼 차를 몇 스푼이나 더 넣어 우리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 우유와 설탕을 부었다. 칼은 충격으로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었다.
“오, 딱 적당하네? 칼, 고마워.”
뒤늦게 온 루비카는 에드가가 우린 차를 마시며 칭찬의 말을 했다. 칼은 그제야 왜 에드가가 그런 방식으로 차를 우렸는지 깨달았다.
“제가 우린 게 아닙니다. 각하께서 만드셨습니다.”
칼이 모른 척 의자에 앉아 있는 에드가를 공손히 가리키며 말했다. 에드가는 괜한 고자질을 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칼은 우유를 탄 차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오해를 받는 건 사양이었다.
“고마워, 에드가. 어쩜 내 입맛에 그렇게 딱 맞게 탈 수가 있지?”
“감이지.”
에드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제법 시니컬하게 대답하며 제 몫의 맑은 차를 마셨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숨기지 못했다. 칼은 이쯤에서 빠지고 싶었으나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자칼 은행의 미노스 경께서 내일 오전에 오기로 했습니다. 각하께서는 오후 늦게 나 시간이 날 거라고 하니 기다리겠다고 하더군요. 정원을 한 바퀴 구경시켜 드릴까 합니다.”
“미노스 경 혼자만 온대?”
루비카가 생긋 웃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보조 직원이 한 명 따라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틀림없이 이오스다. 루비카는 한숨을 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 종잡을 수 없는 드래곤은 무슨 목적으로 이 일에 또 끼어들려고 하는 걸까? 최근 세사르 경은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새로운 장미를 개발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 드래곤의 눈을 현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 이외에 내게 전하는 말이나 편지는 없었어?”
“선물로 보낸 꽃이 잘 자라고 있다는 말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래.”
그녀가 아쉬운 표정을 지을 때였다. 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휙 둘러 강인하게 끌어안았다. 등 뒤로 그의 체온이 포근히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런 포옹에 루비카의 볼이 불게 달아올랐다.
“왜, 왜 이래.”
“그 미노스인지 뭔지에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냐? 따로 보낸 편지가 없었냐는 말은 또 뭐야.”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으나 목 뒤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짜 질투를 하는 건지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질투를 하는 척하는 건지 루비카는 판단할 수 없었다.
“에드가, 좀. 집사가 있잖아.”
그러나 그때에는 눈치빠른 칼이 이미 침실에서 사라지고 난 뒤였다.
“이젠 없네.”
정수리에 입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소름 끼치도록 낮은 음성이었다.
“방금 껴안았을 때까지는 있었어.”
“그때 이미 내 눈을 보고 방을 나설 준비를 마쳤어.”
“아, 정말. 칼이랑 무슨 사이길래 눈빛만 봐도 안다는 거야.”
더 이야기해 봤자 지지부진한 말싸움만 될 것 같아 투정 부리듯이 말했다. 그러자 기쁜 듯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질투하는 거야?”
질투는 무슨. 하지만 그가 기뻐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루비카는 속마음을 숨긴 채 입술을 내밀고 괜히 삐진 척 말했다.
“응.”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가 너무 세게 껴안는 통에 호흡곤란으로 죽는 줄 알았다. 등을 돌리고 있었던 터라 표정은 구경도 못했다. 좋아한다는 고백 이후로 그의 애정표현은 더욱 진하고 거침이 없어졌다.
“그만, 차가 다 식잖아.”
항의에 껴안은 팔은 풀어 주었으나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루비카는 반쯤 포기하고 설탕과 우유가 듬뿍 든 차를 마셨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에드가는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응, 달콤하고 부드럽잖아. 난 당신이 마시는 게 더 신기한데. 쓰지 않아?”
“……달고 향긋한데.”
그녀가 나뭇잎향이라고 혹평하는 차를 마시며 그가 대답했다. 루비카는 입맛의 세계란 정말 무궁무진하다며 속으로 감탄했다.
“난 디저트가 없으면 커피도 차도 그냥은 도저히 못 마시겠어.”
그에 반해 에드가는 아무것도 없이 차를 잘만 마셨다. 식사 때도 단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저렇게 날씬한 걸까? 이렇게 입맛부터 취향까지 다른데 어째서 서로 좋아하게 되었는지 참 신기했다.
“이렇게 마셔도 가끔은 단 게 먹고 싶은 걸. 참, 장미사탕은 먹어 봤어?”
“아직.”
“먹어봐. 맛있어.”
마침 테이블 위에 장미사탕이 있었다. 루비카가 하나 꺼내 에드가에게 내밀었다. 엄지손톱만 한 작은 크기였으나 에드가는 고개를 적었다. 그 정도 크기도 그에게는 제법 부담스러운 듯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루비카는 장미사탕을 자기 입에 넣었다.
“맛은 궁금하군.”
“그래? 그럼 사탕을 좀 더 작게 부술 방법을 찾아볼까?”
호두를 까는 데 쓰는 망치를 찾아야 하나 고민할 때 에드가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짙은 파란 눈에 빛 하나가 일렁거렸다. 아까까지 평온했던 공기에 긴장의 파문이 일었다.
“사탕을 부수지 않아도 맛볼 방법은 있어.”
무슨 소리냐는 반문은 그의 입술에 막혔다. 벌린 입 틈으로 들어온 혀가 그녀의 혀 사이에 숨어 있던 사탕을 찾아내어 굴렸다. 두 체온이 섞여 사탕은 평소보다 빨리 녹아 좀 더 달고 진하게 느껴졌다. 그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사탕은 어느덧 녹아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좀 달지만 맛있네.”
힘이 빠진 듯 그에게 기대는 루비카가 사랑스러워 그가 그녀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럽지만 행복한 듯 그를 바라보며 짧게 웃음을 흘렸다.
“아, 정말.”
사람을 애타게 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에드가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와 코, 눈, 뺨, 턱에 연이어 버드키스를 퍼부었다.
“그만, 그만.”
결국 그녀의 입에서 거절의 단어가 나오고서야 그의 키스가 끝났다. 그렇게 많이 키스하고서도 부족했는지 그가 벌써 그만이 어디 있냐는 둥 항의했다. 루비카는 모른 척 말을 돌리며 장미사탕을 담은 상자를 그에게 보여 줬다.
“이거 봐. 예쁘지? 당신이 만든 기계 덕분에 이렇게 작고 예쁜 리본으로 상자를 꾸밀 수 있었어. 요즘 선물에 이렇게 장식을 다는 게 유행이라고 했어.”
“그건 나도 알아.”
“어떻게?”
에드가가 턱 끝으로 침실 구석에 있는 ‘작은 새의 소식지’를 가리켰다. 루비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입맛에 딱 맞춰 차에 우유와 설탕을 탔는지 궁금증이 풀렸다. 그 잡지에는 루비카가 어떤 숟가락을 써서 어떤 방식으로 차를 탔는지, 심지어 찻잔에 티스푼을 몇 번이나 저었는지도 소개되어 있었다.
“저걸 읽었단 말이야? 당신 취향이랑은 거리가 멀잖아.”
“당신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읽었지. 만에 하나 악평이라도 했으면 누군지 찾아내서 문 닫게 만들려고.”
잡지에는 다행히 그녀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루비카는 가브리엘 대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왕비 전하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정말?”
에드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국왕은 그가 결혼하자마자 그녀를 보고 싶어 했다. 그 너구리 국왕에게 루비카를 소개하기 싫었던 에드가는 최대한 이 핑계 저 핑계를 댔다. 국왕 또한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루비카를 굳이 만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왕비는 달랐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보낸 장미와 사탕 덕에 외국의 사신 앞에 제대로 면목이 서고 기세등등해진 왕비는 요즘 입만 열었다하면 루비카를 칭찬하고 다녔다. 윗사람 쪽에서 아랫사람을 먼저 보고 싶다고 말을 꺼내는 게 제법 창피스러운 일로 여겨져 간신히 참고 있는 눈치였다.
“그럼 당장 뵈러 가야지.”
수도가 궁금했던 루비카는 두 손을 꼭 쥐고 외쳤다. 기대감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그는 괜히 심술이 났다.
“왕비 전하는 무척 까탈스럽고 자존심도 세서 맞추기 어려운 분이야. 가면 당신 꽤나 속이 썩을걸.”
거기에 제법 신분을 따지는 사람이었다. 다른 귀부인이 루비카에 대한 험담을 한다면 그가 어떻게든 힘을 써 볼 수 있다만 왕비는 달랐다. 만에 하나 루비카의 마음에 상처라도 입을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응, 하지만 궁전을 구경할 수 있잖아.”
역시나 그녀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에드가는 살짝 김이 샜다.
“우리 집이 궁전보다 화려해.”
“응, 하지만 궁전은 아니지. 나, 신년 무도회가 열리는 홀이나 대관식에 쓰는 왕관 같은 걸 구경하고 싶어.”
대관식 왕관은 아무나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드가의 권력을 사용하면 어떻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루비카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초리로 그의 곁에 가까이 앉아 재촉했다.
“왕관은 우리도 몇 개 가지고 있잖아.”
그녀를 제 품 안에 꼭꼭 가두어 두고 싶은데 왜 이리 날아가려 드는 걸까? 에드가는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항변했다.
“하지만 국왕 전하의 왕관보다는 덜 화려할 거 아니야.”
루비카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그가 유치하게 화내면 화낼수록 그녀는 이상하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루비카.”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가 그녀를 불렀다. ‘이런, 지나치게 놀렸나?’ 루비카는 찔리는 마음을 숨기고 짐짓 밝게 대답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왕비 전하는 굳이 안 만나도 돼. 어차피 신년 무도회 때 인사드리러 올라갈 테니까 궁전 구경은 그때 해도 되지.”
“아니, 그게 아니라…….”
그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늘렸다. 귀 끝이 붉어진 모습에 루비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무척 부끄럽거나 흥분했을 때 귀가 붉어졌다.
“어맛!”
뒤늦게 루비카는 자신이 그의 곁에 꼭 붙어 가슴으로 팔꿈치를 누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생각지도 못한 스킨십에 깜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지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떨어지진 마.”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해가 떨어지고 난 뒤 고작해야 몇 시간뿐. 에드가는 그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루비카와 꼭 붙어 지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