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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58화 (158/212)

# 15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58화

자신에게 한 조언과 제니에게 자연스럽게 내렸던 명령을 떠올리면 엘리제를 변신시킨 사람도 그녀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브리엘, 너도 장미 사탕을 좀 챙겨 가렴.”

워낙 맛좋은 사탕이었기에 가브리엘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종의 경외심을 담아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왕비 다음으로 높은 지위인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었지만 공작 부인으로 끝나기엔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인, 차 모임 때는 정원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해서 온 김에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랬구나, 심심하지 않게 엘리제를 불러 줄까?”

“부인께서 제게 설명해 주시면 좋겠어요. 저, 소문의 마영석 정원을 구경하고 싶어요. 거기에 대해서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잖아요.”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간곡한 표현이었다. 루비카는 잠시 고민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지기 전이라 빛나는 건 못 보겠지만 꽃이랑 석상에 얽힌 이야기를 알려 줄 수 있어.”

“감사합니다.”

따라나선 하녀들은 정원에 도달하자 천천히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자 가브리엘은 루비카를 향해 당돌하게 질문했다.

“부인이 마담 베리지요?”

“가브리엘, 나는 공작 부인이란다. 마담 베리라니 당치도 않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가명을 쓰신 거지요?”

루비카가 난처하게 웃었다. 가브리엘이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을 잊고 그만 그녀를 꾸미는데 심취했다. 뒤늦게 그녀 앞에서 경계심 없이 리본을 묶고 각종 장식을 보여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일이 알려지게 되면 공작가는 무척 창피스러운 입장이 된다. 마영석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 반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안 쫓겨나겠다고 결심하니 쫓겨날 일이 생기는구나.’

세상은 정말 제 뜻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갈색 눈을 반짝이는 이 사랑스러운 소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브리엘, 네가 원하는 게 뭐니?”

“음, 리본에 대한 기원은 아니까 됐고요. 마담 베리라고 예명을 정한 이유랑 오늘 제가 입은 드레스랑 다양한 리본 장식은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는지, 마담 카나와 의기투합은 어떻게 했고, 협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랑요. 장미 사탕은 언제쯤 왕비 전하께 선물할 거고 1년 생산량을 어느 정도로 잡았는지, 아. 우선 장미 사탕을 포장할 리본 모양을 스케치할 시간을 좀 주셨으면 좋겠어요!”

숨 쉴 틈도 없이 가브리엘이 말을 쏟아냈다. 어느 정도였냐면 움직이는 입이 잔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루비카는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가브리엘, 너 설마…….”

“헤헤, 네. 제가 바로 ‘작은 새의 소식’지의 운영자 중 한 사람이랍니다.”

가브리엘은 단순한 사교계 소문의 온상지가 아니었다. 바로 소문의 발상지이자 소문의 창조자, 소문을 전국 방방곡곡에 퍼트리는 자였다.

“세상에, 그런.”

루비카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작은 새의 소식지에 그토록 많은 사교계의 소식이 실리면서도 왜 사람들이 운영자의 정체를 모르는지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데뷔도 하지 못한 소녀가 거기에 얽혀 있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탕트 백작 부인이 시시콜콜 다 이야기해 주었겠지. 딸을 끼고 사는 백작 부인 덕분에 여기저기 불려 다닐 일도 많고.’

어린 소녀 앞에서는 어느 정도 경계심을 내려놓기 마련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을 때 그 앞에 가브리엘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작은 키는 시야에서 벗어나기에도 딱 좋았다.

“오늘 제가 입은 옷과 차 모임 드레스는 클레이모어 스타일로 소개하고 싶어요. 분명 마담 카나에게도 클레이모어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부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을게요.”

공작 부인이란 자리는 높은 지위와 많은 부를 거머쥔 대신에 행동에 제약이 따랐다. 가브리엘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흥분을 잘할 뿐 경거망동한 성격은 아니었다. 만약 경솔했다면 진작에 소식지를 운영한다는 사실이 들통났을 것이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가브리엘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제 소식지에 칼럼을 써주세요.”

“칼럼을?”

생각지도 못한 부탁이었다. 루비카는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낮췄다. 다행히 멀리 떨어진 하녀는 마침 정원사와 이야기 중이라 이쪽은 아예 보고 있지 않았다.

“가브리엘, 내게 무슨 부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나는 칼럼을 쓸 정도로 사교계의 소식을 잘 알지도 못하고 글솜씨는 더더욱 자신이 없구나.”

“제가 부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그런 칼럼이 아니에요. 아름다워지고 싶은 소녀들을 위한 팁이에요.”

가브리엘이 간절히 말했다. 가브리엘은 루비카의 조언 덕에 아름다움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다. 바로 아름다움에 대한 자유였다. 날씬한 허리, 조각 같은 몸매, 달걀같이 갸름한 얼굴형,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 긴 속눈썹과 커다란 눈. 그런 것을 가진 사람만이 아름다워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을 자책하고 답답한 마음에 식사를 거르고, 거울을 보며 뺨을 꼬집었다.

―드레스에 자신을 맞추세요.

―아직도 살을 빼지 못했나요? 정말 의지박약이군요.

옷이란 결국 사람을 꾸미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인데 멋진 실루엣의 옷을 소화하지 못한 게 모두 자신의 탓인 줄 알았다. 기준에 충족되지 못한 자신은 어떤 악담을 들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외면의 아름다움을 쫓다 마음이 점점 병들기 시작했다. 못난 점을 지적받다 보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점마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결국에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저 예뻐지고 싶고,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만이 남아 다른 사람을 따라 했다. 가브리엘은 루비카를 통해 그런 강박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그녀 곁에 머무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부인의 정체가 누설되지 않게 마담 베리라는 이름으로 연재해요. 비밀은 제가 보장할게요.”

루비카는 다소 복잡한 심경이 되어 가브리엘을 바라봤다. 가브리엘처럼 원석 같은 아이를 발견해 주위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광을 낸 다음 섬세하게 세공해서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과정은 그녀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하지만 칼럼을 쓰라니 막막하고 당혹스러웠다.

“가브리엘, 나는 그저 네게 어울리는 게 뭔지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야. 칼럼이라니 당치도 않아.”

“부인의 조언은 많은 사람을 구할 거예요. 저는…… 적어도 저는 변했잖아요. 고작 일주일 만에 제 삶은 놀랍도록 많이 바뀌었어요. 제 지위와 본질은 그대로라도 삶을 느끼고 바라보는 태도가 전혀 달라졌어요. 그게 절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부인은 아시나요?”

포기하지 않고 가브리엘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그녀는 루비카가 세상을 바꿀 사람이라고 느꼈다. 누군가는 고작 엘리제나 자신을 바꾼 정도가 그리 대단하냐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삶을, 특히 그 태도를 바꾸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 생각해 볼게.”

가브리엘의 고집은 쇠심줄처럼 질기다. 루비카는 이 자리에서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보다 적어도 고민하는 모션이라도 취하는 게 낫겠단 판단을 내렸다.

“고맙습니다.”

가브리엘 또한 더 졸라 봐야 소용없다고 느꼈는지 물러났다. 대신 그녀는 치마의 숨김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지와 연필을 꺼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입은 드레스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은 건가요?”

영락없는 취재원으로 변한 모습에 루비카는 웃음을 터트렸다. 멀리서 보기에는 가브리엘의 재치 있는 농담에 웃는 것처럼 보였다.

“활발한 너를 보면서 승마처럼 활동적인 운동이 참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오버드레스를 짧게 만들면 드레스를 입고도 말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 아랫단의 스커트를 다른 드레스의 반 정도 길이로 잡은 대신에 주름을 많이 잡아서 살아나게 했어. 오버드레스가 승마복 재킷처럼 길이가 짧아지니 원단이 좀 더 힘을 받아 스커트라인이 살아나더구나.”

“승마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요? 그, 남자들이 입는 승마복이요?”

“그래, 그 옷을 입고 나중에 한번 승마를 해 보렴. 아마 그냥 드레스보다 한결 편할 거야.”

가브리엘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공작 부인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사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여성복의 아이디어를 남성복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그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걸 밝히면 점잖은 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드레스를 비난할지도 몰라요.”

“어머, 왜?”

자신의 발상이 얼마나 파격적인지도 모르는 점이 공작 부인의 매력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드레스에 열광하게 될 사람들은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이 옷을 더욱 좋아할 거예요.”

가브리엘은 대체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한 루비카의 반응 또한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리본이랑 지금까지 한 디자인은 그냥 마담 카나의 이름으로 발표해도 되는데 굳이 마담 베리라는 가명을 써서 공동 작업이라고 하신 거죠?”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가장 인기 높은 칼럼은 쓰는 가브리엘은 거침없이 질문했다. 루비카는 조금 망설이다 이 대답은 기사에 실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고 난 다음에 카나와 크리스토퍼가 얽힌 일을 소상히 말해 줬다.

“세상에…….”

마영석 정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가브리엘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유행에 민감한 그녀는 크리스토퍼의 열렬한 신봉자 중 한 사람이었다. 사교계의 유명한 미인들 중 데뷔탕트 때 그의 드레스를 안 입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크리스토퍼의 드레스를 입은 사람만 그해 사교계 최고의 미인이 될 수 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였다. 비록 자신에게 드레스에 몸을 맞추라는 악담에 가까운 조언을 하긴 했으나 실력 하나만은 믿을 만한 디자이너라 생각했다.

“시즌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놀랄 정도로 예쁘고 새로운 드레스를 보여 줘서 좋아했던 디자이너인데…….”

“어쩌면 정말 같은 사람이 디자인한 게 아닐 수도 있어.”

루비카의 의견에 가브리엘도 동감했다. 크리스토퍼가 훔친 디자인이 과연 카나의 아가장트 소매 하나뿐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둑질의 대가로 매질이 아니라 달콤한 과육을 맛본 사람이다. 두 번째 유혹 또한 떨쳐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정을 알고 나니 찝찝한 게 한둘이 아니네요.”

마담 카나를 촌뜨기 디자이너라고 은근슬쩍 깎아내린 건 약과였다. 로열블루 천으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선보인 건 카나였는데 정작 그녀는 물량을 확보하지 못해 더 이상 그 천으로 드레스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크리스토퍼는 수도에서 이미 그의 단골인 귀부인을 상대로 로열블루 드레스를 팔았다. 어느새 로열블루 색은 올 시즌 그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카나를 그대로 두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어. 찔리는 게 있으니 더 그럴 거야. 아무리 내가 뒷받침을 해 준다고 해도 사교계라는 게 힘과 지위만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잖아. 마음 맞는 귀족 몇 명이 제대로 작당하면 왕비 전하마저도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곳인데…….”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수상한 냄새가 가브리엘의 흥미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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