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57화
그녀는 신이 나서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느질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천이 얇고 모양이 살아서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장식을 만들 수 있어서 좋아. 이것 보렴.”
내친김에 루비카는 규방 한구석에 둔 바느질 바구니를 꺼내 와서 그동안 연구하던 리본 장식들을 꺼냈다. 동백꽃이나 장미 모양처럼 다양한 꽃모양을 비롯해 리본을 서너 겹 겹쳐 만든 나비 모양까지 색색의 다양한 장식들이 쏟아졌다.
“두꺼운 리본으로는 이렇게 만들 수 없지.”
“전부 부인이 만드신 건가요?”
“그럼.”
가브리엘이 묘한 눈이 되어 루비카와 리본 장식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가 만든 리본장식은 어머니가 주문한 카나 의상실의 리본보다 더 섬세하고 깔끔했다. 리본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카나는 마담 베리라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라고 답했다. 최근에 마담 베리가 더 다양한 리본장식을 선보일 거라는 소문에 다들 기대에 부풀었다.
‘설마 부인이 마담 베리?’
입술을 달싹일 새도 없이 제니가 돌아왔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얼굴에 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엄청난 추진력은 하녀나 부인이나 똑같았다.
“눈 감으시고요. 고개를 살짝 들어 보세요.”
그 뒤 가브리엘은 제니와 루비카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거나 팔을 들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마담 카나가 도착한 것도 몰랐다. 카나는 커다란 상자 안에서 루비카가 미리 부탁한 드레스를 꺼냈다. 드레스를 꺼내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가브리엘은 숨을 삼켰다.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끔찍했다.
-미는 원래 불편한 거예요.
마담 카나가 등장하기 전 그녀가 영혼을 바쳐 숭배하던 크리스토퍼는 코르셋으로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종종 그리 말했다. 사교계를 사로잡은 예쁜 소녀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다 뼈를 깎는 노력을 감수했다며 수많을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 말을 내내 들은 가브리엘 또한 예뻐지기 위해서는 온갖 불편과 고통을 참고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전 준비가 다 됐어요.”
“네, 그럼 시작해 볼까요?”
가브리엘은 당연히 마담 카나가 그녀에게 기둥을 꼭 끌어안으라고 지시한 다음 건장한 하녀 몇 명을 불러 자비 없이 허리를 꽉꽉 조일 줄 알았다. 하지만 카나는 하녀를 부르지 않았고, 코르셋 끈도 드레스의 모양을 잡아 줄 정도로 형식적으로 한두 번 당기고 말았다.
“마담, 이것만 당겨도 돼요?”
“네. 이 정도면 충분해요.”
“하지만 나는 허리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자라는 말을 가브리엘이 황급히 집어삼켰다. 지난 일주일간 거울을 보며 두 번 다시 남 앞에서 자신을 비하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카나가 가브리엘의 두려움을 읽었는지 부드럽게 웃었다.
“이건 가브리엘 님의 체형에 맞춰 마담 베리와 제가 머리를 맞대어 특별히 디자인한 드레스에요.”
그리고 카나가 가지고 온 드레스를 펼쳐 보였다. 흰 바탕에 초록색 실로 큼직큼직하게 꽃과 공작이 수놓아져 있었다. 스커트 아랫단은 공작의 깃털 문양에 따라 비단벌레의 날개로 꾸며져 있는데 드레스 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색상이 오묘하게 변해 특히 아름다웠다. 오버드레스는 보통 쓰이는 기장이 긴 드레스와 달리 스커트 부위가 짧아 재킷에 가까운 형태였다.
‘조금 파격적이야.’
짧은 상의를 보며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차 모임에 처음으로 루비카가 입고 나온 드레스가 어땠더라? 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디자인이었지만 각광받았다. 가슴속에서 무럭무럭 샘솟는 불신은 사실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드레스는 예뻤다. 망설이는 것은 자신이 그걸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이분들을 프로잖아. 믿고 맡기기로 했는데 여기서 망설일 수는 없어.’
가브리엘은 용기를 내어 카나의 지시에 따라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사이 루비카는 장신구함에서 가브리엘의 머리를 꾸밀 장식을 골랐다. 야외에서는 머리의 반 정도를 가려 주는 납작한 모자를 쓰는 게 유행이었는데 루비카가 고른 것은 그것보다 조금 더 큰 헤드드레스였다. 거미줄처럼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헤드드레스는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데이지 모양의 녹색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루비카는 가브리엘에게 그걸 씌운 다음 즉석에서 큼직한 녹색 리본을 몇 개 만들어 핀을 이용해 머리카락에 달았다.
“어때?”
“마님의 센스에는 매번 감탄해요.”
칭찬의 말에 루비카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뿌듯한 건 가브리엘의 변화였다.
“이렇게 꾸미니까 정말 예쁘다.”
루비카의 말에 가브리엘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 뛰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예전에는 누군가 자신을 향해 ‘예쁘다’고 칭찬하면 꼭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중이거나 예의상 한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루비카의 칭찬을 어떤 왜곡 없이 칭찬 그대로 받아들였다.
‘예쁘다는 말은 이렇게 기분 좋은 말이었구나.’
가브리엘은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고치를 드디어 뚫고 나왔다. 그녀는 얼굴 표정이 구겨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루비카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이제 사교계에서 주목을 받을지 아닐지는 더 이상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뭐라 평하든 상관없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가 좋아하고 또 자신도 모르게 동경을 품게 된 공작 부인이 그녀를 인정했다. 그거면 됐지 이 이상 무엇이 또 필요하랴. 벌처럼 이 꽃 저 꽃 쫓아다니는 남자들의 관심 따위 알게 뭐람?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겼던 소녀가 자신감을 되찾아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루비카와 제니, 카나는 잠시 그녀의 미소에 취해 손을 멈췄다.
“그럼 아가씨가 볼 수 있도록 큰 거울을 가지고 올게요.”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제니가 외쳤다. 루비카가 마지막으로 가브리엘의 머리를 매만지는 사이 거울이 도착했다. 가브리엘은 잠시 멍하니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핑크색 입술 같은 건 좀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애들이나 하지. 나 같은 못난이에겐 안 어울려.
거울 속의 자신은 맑고 투명한 핑크색 연지를 발랐는데 내내 발랐던 붉고 짙은 연지보다 어울렸다.
-가뜩이나 속눈썹도 짧고 눈이 작은데 내 눈썹은 왜 이렇게 연한 걸까.
그래서 짙고 검은 먹으로 눈썹을 그렸다. 하지만 있는 듯 만 듯 연하게 그린 갈색 눈썹이 머리카락 색과 어울려 갈색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내 머리를 왜 이렇게 곱슬곱슬할까. 안 그래도 빨개서 눈에 띄는 데 모양새가 안 나잖아.
아침이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빗어 최대한 바짝 땋았다. 하지만 루비카는 헤드드레스 아래에 머리카락에 컬을 넣어 풍성함을 강조하면서도 리본을 달아 시선을 분산시켰다. 예상과 다르게 그 머리는 가브리엘의 동그란 얼굴형과 장난꾸러기처럼 주근깨 박힌 피부를 더욱 귀엽게 돋보이게 했다.
또한 상의가 끝나는 지점에 플리츠를 잔뜩 넣은 짧은 스커트를 단 오버드레스는 코르셋을 입지 않아도 충분히 그녀의 허리를 가냘파 보이게끔 했다.
“마음에 드니?”
거울을 본 가브리엘에게서 반응이 없자 루비카가 초조하게 물었다.
“……놀랐어요.”
조금 긴 침묵이 지난 후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목소리에 얼떨떨함이 묻어났지만 다행히 밝았다. 가브리엘은 여전히 거울 속의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제가 여태까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꾸미셨어요.”
그녀는 항상 주근깨를 가리기 위해 짙은 화장을 했다. 주근깨가 창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니는 연한 화장으로 주근깨를 드러내는 대신 그녀의 좋은 피부를 강조하는 방식을 썼다. 전이라면 피부가 돋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주근깨가 드러났단 사실에 칠색 팔색을 했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기로 마음먹자 주근깨가 밉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독특한 매력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게 제게 더 어울리네요.”
가브리엘은 루비카가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게 단지 자신감 회복만을 노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부탁대로 거울 앞에서 아름답다고 외치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단점만 열심히 찾고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마음의 벽은 눈앞의 진실마저 가릴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한다.
“마음에 든다니 기쁘구나!”
“네, 대체 무슨 화장품을 썼는지 궁금해요. 피부도 답답하지 않고 무척 편하네요.”
놀랍게도 제니가 알려 준 화장품 공방들은 평민들도 자주 쓰는 그다지 비싸지 않은 화장품을 파는 곳이었다. 제니는 오늘 사용한 것 이외에 가브리엘에게 어울릴 법한 여러 가지 색조화장품을 알려주었다.
“아직 아가씨는 어리잖아요. 어머니가 쓰는 비싼 크림은 영양분이 너무 많아서 피부에 좋지 않아요.”
가브리엘은 제니가 알려준 내용을 싹 다 종이에 썼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작 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브리엘은 단순히 예뻐지는 것 이상의 수확을 얻었다고 자신했다.
“어머, 세상에!”
마침 칼과 이야기를 다 끝낸 앤이 규방에 노크 후 들어왔다 가브리엘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이 예쁜 아가씨는 누구시죠?”
“탕트 백작 영애야.”
“네에?”
앤의 눈이 휘둥그레지다 못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녀는 꼭 바다에서 인어를 만난 선원처럼 가브리엘의 주위를 빙빙 돌며 감탄을 내질렀다. 가브리엘은 몹시 부끄러웠으나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보일 반응의 예행연습이라 생각하고 견뎠다.
“이렇게 예쁜 걸 왜 그동안 숨기고 다니셨어요.”
“헤헤헤.”
가브리엘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었다. 예뻐지면 엘리제나 타티아나처럼 도도하고 우아하게 굴고 싶었다. 거울을 보며 몰래 표정을 연습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되기보다는 스스로가 되기로 마음먹자 푼수 같은 웃음이 자연스레 나왔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은 그게 더 어울렸다.
“어쩜 웃는 것도 귀여워라.”
다들 가브리엘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걸 참았다. 차마 백작가의 영애를 상대로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 가브리엘은 인간으로 환생한 귀여운 꽃의 요정으로 보였다.
“참, 장미 사탕의 시제품이 나왔어요. 마침 가브리엘 아가씨가 왔다는 소식에 맛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잠깐 가브리엘의 사랑스러움에 용무를 잊을 뻔한 앤이 정신을 차렸다. 앤이 따라온 하녀가 들고 있던 접시의 뚜껑을 열자 방안 가득 장미향이 퍼졌다. 꼭 장미 정원의 한 가운데에 있는 기분에 빠져 가브리엘은 접시 위의 사탕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자 눈 녹듯이 사라져 절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가브리엘은 사교계의 명사인 어머니 덕에 세계 각지의 사탕을 맛보았다. 항상 마음속으로 왜 세리토스 왕국에는 맛있는 사탕이 없을까 안타까워했는데 오늘 그 원이 이루어졌다.
“어떤가요?”
“제가 먹어 본 사탕 중에서 제일 맛있었어요.”
재빨리 두 번째 사탕을 입에 집어넣으며 가브리엘이 외쳤다. 스티븐은 디저트 만들기에 천재인 수준을 뛰어넘어 그냥 신이었다.
“음, 그런데 제 생각에 소금을 살짝 넣으면 좋겠어요.”
“소금을?”
“네, 살짝 넣으면 단맛이 더 살아나거든요.”
“스티븐에게 전해 줘. 앤.”
그리고 가브리엘은 자리에 앉아 왕비 전하에게 보낼 사탕을 어떤 식으로 포장할지에 대해서 슬쩍 조언했다.
“한 상자에 다 담아서 보내시지 말고 작은 상자에 나눠서 담는 게 어떨까요? 왕비 전하께서 나눠주시기 좋게요. 그리고 이왕이면 상자를 리본으로 꾸며요.”
그럼 공작이 기계까지 동원해 만들어 낸 리본이 홍보될 것 같았다. 사신을 통해 외국으로까지 전해지면 예쁘고 좋은 것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브리엘의 말에 루비카가 적당한 상자를 찾아 즉석에서 리본을 묶기 시작했다. 아까 자수바구니에서 본 것과 또 다른 모양이었다. 가브리엘은 루비카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분명 귀족 여인답게 곱디고운 손이었다. 하지만 바지런히 움직이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건 거의 30여 년을 침모로 지낸 사람이나 가질법한 야무짐이었다.
‘분명해. 부인이 마담 베리야.’
이건 거의 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