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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56화 (156/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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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56화

“아마, 그럴 것 같아요.”

“나도 같이 갈 수 없을까?”

역시 예상대로다. 가브리엘은 이 집안에서 가장 알기 쉬운 사람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어머니랑 같이 나타나면 공작 부인과 마담이 얼마나 당황하겠어요.”

백작부인이 초초하게 손톱을 깨물며 외쳤다.

“그럼 빨리 내게 이야기해 줬어야지! 아, 공작가에서 돌아온 뒤 평소와 달리 아무 말하지 않았던 건 엄마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니?”

“그런 거 아니에요.”

“아무리 네가 꾸미는 게 중해도 그렇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니?”

반쯤 농담이었다. 백작 부인은 가브리엘이 평소처럼 웃으며 ‘줄 긋는 노력이라도 해야지 호박이 수박 사이에서 튀지 않지요.’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백작 부인을 싸늘히 쳐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포장지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야말로 꾸미는 게 그렇게 중하세요? 딸보고 호박이라고 말할 만큼?”

“가브리엘.”

뒤늦게 백작 부인은 자신이 실수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조심성 없어 실수가 잦고 조금 푼수기가 있는 딸이었지만, 언제나 그녀의 곁에서 재미있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해 주는 애교 있는 막내딸이었다. 그래서 지켜야 할 선을 잊은 건지도 모른다. 여태껏 그녀의 딸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차가운 가브리엘의 표정에 백작 부인은 뒤늦게 가브리엘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얘야.”

가브리엘이 규방을 벗어나기 직전 백작 부인은 딸의 팔을 잡았다. 다행히 가브리엘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백작 부인은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었다.

“내가 잘못했다. 엄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백작 부인의 마음만큼이나 가브리엘의 마음도 아팠다. 먼저 사과해 준 어머니에게 고마웠다. 당장 백작 부인을 끌어안고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자신이 결국 발전 없이 어머니의 곁에서 그녀의 일부로 살아가기만 할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가끔 타티아나가 ‘사춘기 때는 이유 없이 반항도 하고 그러는 거야. 가브리엘, 너는 너무 착해.’라고 말한 것처럼 그녀도 반항할 때가 된 건지도 모른다.

“알아요. 하지만 엄마, 나는…… 엄마의 사랑이 아니라 인정이 필요해요.”

그리고 가브리엘은 조그맣게 미안하다고 속삭인 뒤 그녀의 곁을 떠났다. 백작 부인은 종종 걸어가는 가브리엘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먼저 낳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발육이 늦은 가브리엘이 늘 걱정되었다. 그녀의 눈에 가브리엘은 언제까지나 다섯 살 아이로 보였다. 하지만 이리 보니 가브리엘이 어느새 부쩍 자라 곧 데뷔 무도회를 앞둔 소녀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내가 많이 잘못한 걸까?”

처녀 시절부터 그녀와 함께한 시녀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많이는 아니지만 잘못하시긴 했죠.’라고 대답했다. 정성 들여 치장한 머리가 엉망이 되든 말든 백작 부인이 머리를 헝클었다. 벌써 아이를 넷이나 키우고 그때마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자신은 육아에 초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이들은 똑같지 않고 각각 다른 걸까? 첫째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둘째 아이는 싫어했고, 어떤 아이는 그녀가 자신을 과도하게 믿어 사랑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했고 어떤 아이―가브리엘―는 그녀의 사랑보다 인정을 바랐다.

“적어도 가브리엘에게만큼은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어. 네 번째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완벽한 엄마가 어디 있어요. 완벽한 사람도 없잖아요. 가브리엘 아가씨도 이제 어른이 되려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냥 참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걸 배울 때가 된 거예요.”

백작 부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에게 받는 상처가 매번 새롭게 쓰린 것은 결국 자신이 한 잘못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일 가브리엘이 마차에서 먹을 수 있게 샌드위치를 좀 만들어 두라고 주방에 전해 줘.”

그녀는 계속 자책하는 대신 일단 가브리엘의 어머니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 * *

루비카는 긴장된 마음으로 가브리엘을 기다렸다. 가브리엘은 똑똑한 머리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자존심을 가졌다. 어쩌면 백작가로 돌아가 곰곰이 생각한 뒤, 참 쓸데없는 것을 시킨다고 자신의 부탁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과연 내 뜻을 이해했을까?’

가브리엘이 약속한 대로 행동했다 해서 꼭 그녀가 목적한 대로 깨달음을 얻을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반쯤은 도박에 가까운 시도였다. 소식을 전하는 하녀가 침실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탕트 영애가 도착했니?”

하녀는 당황하더니 자칼 은행에서 온 편지를 전하러 왔다 대답했다.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 새도 없었다. 가브리엘만큼이나 걱정스럽고 기대되는 것이 미노스와의 만남이었다. 황급히 편지를 뜯었다. 미노스는 현재 찾는 물건이 있어 당장 공작가에 가는 게 힘드니 공작과의 만남을 그 뒤로 잡고 싶다고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내일이라도 미노스를 만날 수 있길 바랐으나 미노스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비카는 하는 수 없이 시간이 될 때 언제라도 편지를 보내 달라고 답장을 썼다.

“마님, 탕트 영애께서 도착했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규방으로 안내해 주고, 시중은 들 필요 없어.”

“네.”

마침 앤은 왕비 전하께 보낼 장미사탕 때문에 집사를 만나러 갔다. 괜히 다른 사람이 끼면 가브리엘이 겸연쩍어서 마음과 다른 소리를 할까 걱정됐던 루비카는 하녀들을 모두 물리고 가브리엘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오늘 날씨가 무척 화창하니 부인의 마음씨 같네요.”

언제나처럼 재치 있게 말하며 고개를 든 가브리엘을 보았을 때 루비카는 곧 자신의 부탁이 기대한 것 이상의 효과를 불러왔음을 알았다.

“내가 말한 대로 했구나.”

“뭐, 좀 닭살이 돋았지만 못할 건 뭔가요?”

밤마다 거울을 보며 눈물을 터트렸으면서 가브리엘은 고개를 치켜들고 허세를 부렸다. 티가 나게 과장된 태도는 가브리엘의 뺨에 알알이 박힌 주근깨와 더불어 그녀를 좀 더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게끔 했다.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가렸을 때는 보이지 않던 매력이었다.

“그래도 맨얼굴로 여기까지 오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맞아요. 제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마차를 막고,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렸어요.”

“마차를 막았다고? 어머, 그냥 화장 좀 안 한 건데…….”

가브리엘의 용기를 칭찬하려 했던 루비카는 의외의 답변에 깜짝 놀랐다. 아직 사교계 데뷔 전인 아가씨는 화장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보통이었다. 가브리엘이 머리를 긁적이면 대답했다.

“12살 이후로 화장을 하지 않고 집 밖에 나간 적이 없어요.”

“뭐라고? 그럼 피부에도 좋지 않아.”

“알아요.”

가브리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바보스러운 행동이었으나 당시 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고서는 바깥으로 한 발자국으로 나갈 수 없었다. 처음에는 꾸지람하던 백작 내외도 결국 포기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화장품을 잔뜩 사 주었다.

“사람은 안다고 다 행하는 건 아니지요. 일찍 일어나는 게 건강에 좋다는 건 다 알지만 실제로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몇 안 되잖아요.”

꾸지람에 대비해서 항상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대는 건 가브리엘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부모님이 그렇게 놀랐는데도 어째서 맨얼굴로 왔니?”

“제게 예뻐지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화장한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꽤 합리적인 선택이지요.”

마지막 자화자찬은 가브리엘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했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화장을 하면 혈색이나 입술 색이 달라 보여서 네가 평소에 어떤 크림을 바르는 게 좋고 어떻게 꾸미는 게 좋을지 정확히 짚어 줄 수가 없어.”

예상과 다른 반응에 가브리엘은 머쓱해졌다. 비난에 강한 사람일수록 칭찬 앞에 약하기 마련이었다. 가브리엘이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해 버벅거리는 사이 루비카가 제니를 불렀다.

“마님, 무슨 일인가요?”

시녀를 두고 일개 하녀인 자신을 부른 사실에 제니가 꽤 겁을 먹었다. 루비카가 어지간한 일로 하녀를 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오랜 습관을 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부터 탕트 영애를 변신시키려 해.”

“네? 탕트 아가씨요? 그분이 오늘 온다고 듣긴 했는데…… 어디 계신 거죠?”

바로 앞에 가브리엘을 두고 제니가 규방을 휘 둘러보았다. 결국 가브리엘이 홍당무처럼 불게 타오르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손을 들었다.

“여기야.”

“네?”

“내가 가브리엘 드 탕트야.”

“어머, 어머. 죄송합니다, 아가씨.”

깜짝 놀라 연신 사과하는 제니를 향해 가브리엘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됐어, 됐어.”

가브리엘이 쉽게 용서하자 제니가 감사의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의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가브리엘을 앉힌 다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꼼꼼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엘리제를 변화시킨 사람인 건가? 호기심과 기대로 가브리엘의 갈색 눈이 반짝였다.

“크림은 뭘 쓰시나요?”

“코코 공방에서 나오는 클라라 크림을 써.”

가브리엘이 제법 자신에 차 대답했다. 코코 공방은 왕국에서 가장 비싼 화장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왕비 전하가 쓴다는 소문이 들리자마자 어머니가 바로 주문을 했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대답에 제니는 난색을 표했다.

“코코 공방이요? 거기 껀 아가씨가 쓰기에는 좀 무거운데…….”

어느새 루비카가 제니의 화장품함을 가지고 와 활짝 펼치며 말했다.

“그래서 화장이 겉돌았던 거구나.”

“네, 화장은 기초부터 시작이에요. 음, 이건 마님에게 맞춰져 있어서 아가씨에게 적당한 게 없네요.”

그러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뛰쳐나갔다.

저 하녀가 엘리제를 변신시킨 장본인이냐고 가브리엘이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루비카가 화장품함에서 머릿기름을 꺼냈다.

“앞머리가 없는 쪽이 더 예쁠 텐데 이미 자른 앞머리를 되돌리는 방법까지는 모르겠네.”

그리고 가브리엘의 앞머리에 발라 넘기기 시작했다.

“앞머리는 기르는 게 좋겠다.”

루비카가 무척이나 능숙한 솜씨로 머리핀을 꺼내 앞머리에 꽂기 시작했다. 슬쩍 머리 장식함을 본 가브리엘은 작은 탄성을 질렀다. 신기하고 예쁜 것들로 가득했다. 그중 얇고 가는 리본을 엮어 만든 머리 장식은 꼭 데이지 꽃 같았다. 어쩜 저렇게 가늘게 천을 꼬았냐는 생각이 들어 집어서 가까이 살펴보았는데 바느질 자국이 없었다.

“세상에 이 천 너무 신기해요.”

“그렇지? 에드가가 만든 거야.”

“각하가요?”

가브리엘이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루비카는 황급히 그녀의 상상을 정정했다.

“아니, 직접 바느질을 하고 그런 게 아니야. 이렇게 가장자리에 열처리를 해서 바느질하지 않아도 되게끔 천을 자르는 기계를 발명했다는 소리야.”

“네? 기계를 발명했다고요? 정말 충격적이네요.”

이제와 리본 장식을 자세히 살펴보니 보통 리본과 달리 한 겹으로 되어 있었다. 가장자리를 손으로 잡아 비벼보아도 실이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감탄하는 가브리엘의 모습에 루비카는 공연히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세상 어느 남자가 단지 아내가 청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기발한 기계를 만들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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