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54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세상에 있잖아.”
주변을 환히 밝힌 마석램프는 어떤 왜곡도 없이 그의 미소를 그녀의 눈동자에 닿게 했다. 루비카는 그가 말한 ‘사랑을 핑계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녀를 가리켜 한 말임을 느꼈다. 꼭 기적 같은 믿음이었다. 루비카는 그제야 미노스가 떠나고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두려웠다. 아르망을 찾게 미노스를 만나 달라 부탁하는 자신에게 에드가가 실망할까 봐 걱정됐다. 그의 마음이 멀어질까 봐. 그렇다. 그녀는 사실 그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그녀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단단했다. 걱정했던 자신이 바보 같을 정도로…….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난 이미 당신에게 나쁜 짓을 많이 했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적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만약 에드가가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면…… 그녀의 마음은 너덜너덜하다 못해 엉망진창이 됐을 것이다.
“아니야, 당신은 나쁜 짓을 한 적 없어.”
오히려 나쁜 짓을 한 건 그다. 에드가는 이제라도 자신이 아르망인 걸 먼저 밝혀야 하나 싶어 고민스러웠다. 그녀의 사랑을 미래의 자신과 나눠 가지기 싫어 이런 촌극을 벌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좋아하고 또 그 때문에 미안해하는 그녀를 보니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실감이 났다. 잊히기 싫어 자신 대신 그녀를 과거로 보낸 아르망과 그가 다를 게 뭐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임을 깨끗이 인정했다.
“에드가.”
하지만 그가 말을 할수록 루비카에게 깊은 감동만 줄 뿐이었다. 루비카는 잠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심호흡을 했다. 그의 체취는 그녀를 달아오르게 하면서도 안정감을 주었다. 심장이 이렇게 뛰는데도 편안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처음 알았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뭐든 믿어 줄 거지?”
“그럼.”
의문형으로 끝난 말이었으나 그 안에 확신이 있었다. 루비카는 당장에라도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와 미노스를 만나게 하고 나서 아르망의 반지와 함께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니 모두 믿으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신뢰를 쌓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뜨리는 길이다. 그가 자신을 믿어 주는 만큼 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모두 말할게. 나와 아르망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달래듯 그녀의 등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불안한 듯 그녀가 그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 들었다.
“루비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드디어 모든 걸 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간절히 바랐고 또 바랐던 순간이 결국 그에게 왔다.
“기다릴게.”
천년이든 만년이든 기다릴 수 있다. 그는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드디어 얻었다.
“대신에…….”
그가 품에 안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드러이 감쌌다. 잠시 루비카는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그의 행동에 반항했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차 부드러이 재촉하는 그의 손길에 결국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 본 그의 얼굴에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에드가.”
“날 경멸하지 말아 줘.”
푸른 눈에서 마치 보석과도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방울진 눈물이 애달파서 루비카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닦았다.
“경멸이라니, 내가 왜 당신을 경멸해.”
속삭이는 그녀의 말에 그가 서글프게 웃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온갖 무례를 저질렀던 그를 그녀는 결국 용서했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그 속에 단단함과 비범함을 숨기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진실이 밝혀져도 그녀는 그를 용서하겠지. 그래서 자신이 더욱 하찮게 느껴졌고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는 용서를 모르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으니까.
“미워하지 말아 줘.”
루비카는 여전히 눈물을 멈추지 않고 애원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버리지 말라는 듯 애원하는 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꼭 그녀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듯 굴었다. 그 모습이 비굴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듬직하고 귀여웠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평생 기쁨 속에서 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랑해.”
용서의 말 대신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하며 그녀가 말했다. 결코 충동이 아니었다. 그녀는 줄곧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망설였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을까 봐 겁나고 무서웠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서는 결국 아르망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지난 생과 다를 바가 없다.
“꼭 말하고 싶었어.”
지난 생에서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생에서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풍파가 그녀 앞에 쏟아진다 해도 루비카는 이제 두 번 다시 망설이다 사랑을 놓치는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루비카, 루비카.”
그가 더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꼭 껴안고 울 듯이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사랑해, 에드가.”
비록 사랑한다 말하는 대상은 아르망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속의 회환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르망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루비카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좋아한다는 말 대신에 고맙다는 말을 할 예정이었다. 처음의 소원과 비록 그 형태는 달라졌지만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 * *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다녀 온 뒤 가브리엘은 평소와 조금 달라졌다. 원래 가브리엘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백작 부인에게 뛰어와 방문한 저택의 접시 개수까지 알게 될 정도로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자를 벗고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별말이 없었다.
“가브리엘, 공작 부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니?”
“그냥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랑 안부를 나눴지요.”
참다못해 백작 부인이 먼저 질문했으나 가브리엘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한참 있더니 툭 튀어나와 말했다.
“부인이 일주일 뒤에 공작가에 한 번 더 와 달라고 했어요.”
“어머, 잘됐구나. 네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그래, 무슨 이야기로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니?”
재치를 뽐내는 건 가브리엘이 가장 좋아하는 행위였다. 백작 부인은 당연히 가브리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게 공작 부인의 마음을 홀렸는지 한참 늘어놓을 줄 알았다.
“별 이야기 안 했어요.”
하지만 가브리엘은 새침하게 그리 대답하더니 다시 쏙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백작 부인은 황담함을 금치 못하고 옆자리에 있던 시녀에게 말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니?”
“글쎄요. 아가씨도 드디어 철이 든 게 아닐까요?”
“철이 든다고? 가브리엘이?”
굳게 닫힌 가브리엘의 방문을 보며 백작 부인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막내딸인 가브리엘은 카나리아처럼 영원히 자기 옆에서 지저귀며 그녀의 관심을 사지 못할까 안달할 줄 알았다.
“아니, 잠깐 변덕이겠지.”
백작 부인은 재빨리 현실을 부정했다. 어쩌면 일부러 공작 부인과 나눈 이야기를 말하지 않아 주변의 관심과 흥미가 자신에게 쏠리는 걸 즐기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 해도 그녀가 낳은 아들딸 중에 가브리엘만큼 자신을 닮은 아이는 없다. 백작 부인은 자신이 가브리엘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고 확신했다.
“모른 척하면 두 시간도 안 돼서 방에서 뛰쳐나와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할 거야.”
백작 부인은 그리 호언장담하며 다른 식구들에게도 모른 척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가 되어도 가브리엘은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매일 저녁이 되면 자기 방에 꼭 처박혀 문을 닫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쟤가 무슨…… 사실은 공작 부인에게 뭔가 실수를 단단히 한 게 아니야?”
“어쩌면 일주일 뒤에 다시 공작가에 간다고 한 건 약속이 아니라 사죄하러 가는 게 아닐까요?”
다른 하녀의 말에 백작 부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한창 사춘기 때니 가브리엘이 먼저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시녀의 조언은 소용없었다. 변덕이 심한 사람은 참을성이 없기 마련이다. 백작 부인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날 밤 가브리엘의 방문을 두들겼다.
“가브리엘, 가브리엘!”
“왜 그러세요? 어머니.”
여전히 문을 열지 않고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백작 부인은 속이 타다 못해 불이 날 지경이었다.
“얘, 무슨 사고를 쳤니? 솔직하게 말하려무나.”
“사고라니요?”
“가브리엘, 걱정하지 마렴. 이 엄마가 다 해결해 줄게.”
백작 부인이 왜 이리 호들갑인지 눈치를 챈 가브리엘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런 행동을 보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별일 없었어요.”
“별일 없었다니, 그럼 네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않니? 제발 방문을 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려무나.”
“저라고 뭐 항상 시끄럽게 호들갑 떨며 살아야 할 이유 있나요? 정 그렇게 궁금하고 걱정되시면 저 말고 공작 부인께 물어보세요. 물론 부인께서는 별일 없었는데 왜 그러냐고 오히려 당황하시겠지만.”
“정말 별일 없었니?”
“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가브리엘은 더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은 아쉬웠으나 벌써 아이 여럿을 키운 백작 부인은 거기에서 억지를 부리면 역효과만 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가브리엘, 마음이 풀리면 언제든지 이야기 해 주렴.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네.”
가브리엘은 간신히 너무 잘 알아서 문제라고 빈정거리지 않을 수 있었다. 백작 부인이 문가에서 떠나는 소리가 들린 뒤 가브리엘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전신거울을 바라봤다.
“나야말로 속이 타 죽겠네.”
공작 부인과 매일 저녁 자기 전에 거울을 보며 ‘나는 아름답다.’라고 말하기로 약속했다. 처음 가브리엘은 그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 그런 유치하고 닭살 돋는 일을 시키나 싶었다. 하지만 정작 거울 앞에서 서니 입이 꽉 막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필 왜 자기 전에 하라고 한 거야.’
잘 시간이라 짙게 눈썹도 그리지 못했고, 화장으로 얼굴의 잡티를 가리지도 못했다. 자기 전이니 머리에 예쁘게 롤을 넣거나 볼륨을 주어 화려한 장식으로 눈길을 끌 수도 없다. 코르셋으로 바짝 조이지 못한 허리에 펑퍼짐한 잠옷은 정말 최악의 조합이었다.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니 빈말이라도 ‘나는 아름답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아침 시간이었으면 단장을 다 끝내고 하녀들을 모두 보낸 다음에 시도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저녁 시간이라니. 이걸 노리고 그런 거냐고 공작 부인에게 전서구라도 보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