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51화
“뭐든 물어보십시오.”
미노스가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 님프를 남편으로 둔 사람이다. 그녀는 님프의 권역에서 남편과 비슷한 권리를 가진다. 잘 보여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앤, 엘리제에게 내 방 서랍에 있는 반지를 좀 가지고 오라고 해 주겠어?”
“네, 마님.”
이윽고 엘리제가 천으로 조심스럽게 싼 반지를 가지고 왔다. 루비카는 면담실에서 하녀를 모두 내보낸 다음 미노스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이 반지를 좀 봐 줘.”
미노스는 품에서 돋보기를 꺼내 반지를 꼼꼼히 살폈다. 그의 초록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일렁거렸다. 루비카는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그게 대체 뭔지 알겠어?”
“음…….”
과연 어디까지 그녀에게 말하는 게 좋을까? 미노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오스 님의 마법에 놀라는 걸 봐서 자기 남편이 님프인 줄 모르는 것 같아.’
님프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데 공작 부인에게 공연히 알려줘 봤자 나중에 벼락만 맞는다. 이오스는 단순해서 속여 넘기기라도 하지, 님프는 똑똑한 데다 한번 화가 나면 냉혹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분노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수많은 생물 중 가장 낮은 곳에 사는 고블린은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 끈을 마련해 두는 걸 선호했다.
“이건 이베르의 눈물로 만든 보석이군요.”
“이베르의 눈물?”
황금 평원의 드래곤에 이어 세리스 산맥 북동쪽 끝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의 이름이 나왔다. 루비카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아르망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런 존재들이 얽혀 있는 걸까.
“이베르 님이 잠든 지 이제 거의 오백 년에 접어드니 이 물건도 그 정도는 되겠군요.”
“그렇게 오래된 물건이었단 말이야?”
“네, 뭐. 그쯤 되었을 겁니다.”
“그럼 이 물건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정도 물건을 가질 존재는 님프인 당신 남편 이외엔 없을 건데요.’라고 대답하려던 미노스가 입을 다물었다. 위험한 냄새가 났다. 함부로 대답했다간 목이 달아날 것 같은.
“글쎄요. 제가 그 방법까진 모르겠네요.”
“주인을 찾고 싶은데……. 아, 방금 전 드래곤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뭐, 그러지 말고 마님의 남편분께 물어보시지요.”
“이미 부탁해 봤는데 못 찾았다고 했어.”
미노스가 목을 쓸었다. 앞서 그녀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님프가 반지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데 알려 줄 뻔했다. 그는 오늘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그런 대단하신 분이 못 찾는 주인을 제가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루비카가 눈에 띄게 낙담했다. 대체 무슨 연유로 그러는지 미노스는 호기심을 느꼈다. 고블린은 호기심 때문에 목숨의 위험도 쉽게 까먹는 경향이 있었다.
“어째서 이 반지의 주인을 찾고 있는 건가요?”
“그건…….”
루비카는 치맛자락을 꼭 잡았다. 여태껏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설사 말 한다고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는커녕 허황된 것으로 취급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금 마법을 목격했다. 인간도 믿어 주지 않을 이야기를 이 똑똑해 보이는 고블린은 믿어 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죽음의 순간에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온 사람이야.”
“이 반지 덕입니까?”
예감대로 미노스는 놀라지 않았다. 루비카는 그를 상대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놀라움을 연속이었다. 특히 드래곤을 너끈히 해치울 수 있는 스텔라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반지를 매개체로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미노스는 클레이모어 공작이 아르망이라고 확신했다. 드래곤의 눈물을 이용한 마구는 보통 사람은 다룰 수 없다. 드래곤이나 님프 정도는 되어야 반응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공작 부인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미노스는 루비카에게 당신이 찾는 사람은 바로 당신 곁에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님프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그를 찾고 싶어.”
루비카의 구슬퍼 보이는 표정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랑하는 여인이 이렇게 슬퍼하고 또 그리워하고 있는데 사실을 숨기고 있는 님프가 야속했다. 미노스는 결국 고블린의 호기심 다음가는 본능인 참견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그분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미노스의 말에 루비카가 깜짝 놀랐다.
“대신에 공작 각하를 만나게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에드가를?”
“네, 각하를 한번 뵙고 싶은데 참 어렵더군요. 부인께서 청하시면 저 같은 자도 만나 주시지 않을까요?”
혹 루비카가 이상하게 여길까 미노스가 일부러 손을 비비며 비굴한 연기를 했다. 하지만 루비카는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을까?’
아르망을 찾기 위해 미노스를 만나 달라고 하면 에드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당연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야 하겠지만 상처받을 마음을 생각하니 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 말고 다른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될까?”
“각하를 꼭 만나게 해 주셔야 합니다.”
미노스는 제법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루비카가 원하는 건 에드가를 만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소원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루비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사람이었고 또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왜 이리 망설이는지. 자신의 마음이지만 정말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만나야 해.’
불안정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아르망은 꼭 만나야 했다. 다시 만나게 된 아르망이 자신을 기억할지 못할지 알 수 없었다. 여태까지 그녀를 찾아오지 않은 걸 보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아르망과의 재회는 허망함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만나지 않고 이대로 미적지근하게 에드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끝내는 일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직접 말하고 싶은데…… 그러면 오늘 당장은 약속을 잡을 수 없어.”
칼이나 시녀를 통해 에드가에게 말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말을 꺼내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미노스 역시 당장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님프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저도 오늘 당장 만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각하께서 편하신 날짜를 잡아 알려 주시면 언제든 찾아오겠습니다.”
미노스는 그리 말하고 루비카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루비카에게 고마웠다. 그녀가 말한 대로 미래가 흘러간다면 이오스는 물론 자신의 목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 * *
자칼 은행의 미노스가 다녀간 뒤 루비카는 어쩐지 싱숭생숭해져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심지어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데도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을 정도였다. 보다 못한 앤이 산책을 권했다. 더 바느질을 했다간 루비카의 손가락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럴까?”
이미 한 차례의 산책을 끝냈으나 루비카는 앤의 권유에 선선히 응했다. 꽃향기가 섞인 정원의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듯싶었다. 한참 정원을 산책하던 그녀는 연구소에서 나오는 스테판 경을 발견했다. 보통 이 시간이면 집무실에 꼭 붙어 에드가의 호위를 하고 있을 그가 밖에 나와 있는 것도 이상했는데 비틀거리는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다.
“스테판 경이 조금 이상한 것 같지 않아?”
“그렇네요. 꼭 실연이라도 당한 것 같은 뒷모습이에요.”
앤이 호기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스테판은 잘생긴 외모와 그 못지않은 실력과 지위 덕에 차 모임에서 꽤 인기를 끌었다. 곧 스테판에게 편지가 쏟아졌으나 그는 거듭된 초대를 모두 거절했으며 은근히 마음을 토로한 연서에는 아예 답장도 하지 않았다.
“스테판 경을 저렇게 휘청거리게 만든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요?”
“그건 아닐 거야.”
루비카는 황급히 앤의 상상력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루비카가 하는 생각이란 것도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에드가와 무슨 일이 있었나?’
뒷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에드가가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달콤하게 굴지만 처음 만났을 때 어떠했던가. 아름다운 외모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재수 없는 말과 행동을 일삼았다. 스테판은 분명 그에게 상처받은 게 분명하다. 루비카는 도저히 그런 그를 지나칠 수 없었다.
“스테판 경을 잠시 불러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네요. 테판 경!”
목청 좋은 앤이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스테판 경은 듣지 못했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한 그가 보인 의외의 모습에 루비카의 걱정은 더욱 커졌다.
“스테판 경!”
정원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앤이 소리쳤을 때 스테판이 가까스로 걸음을 멈추었다. 루비카를 발견한 그는 약간 놀라더니 곧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을 지웠다.
“부인, 무슨 일이십니까?”
“스테판 경, 무슨 일이 있나요?”
앤과 스테판이 동시에 말했다. 앤의 질문에 스테판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루비카의 주변에 있던 하녀들은 그 아주 잠깐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어머,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설마 진짜 실연인가?”
“스테판 경도 슬슬 사랑에 빠지실 때가 됐지요.”
하녀들의 조잘거림에 스테판은 결국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용건이 없으면 가겠다는 소리가 목까지 올라왔지만 공작 부인을 상대로 그리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차 모임 이후 기사단 분위기가 영 전과 같지 않았다. 그 자신도 쏟아지는 편지와 모임 참석 요청에 곤란을 겪고 있던 차 이런 오해를 사니 영 달갑지 않았다.
“그래. 그게 아니라 에드가 때문일 거야.”
안쓰러운 표정으로 루비카가 덧붙인 말에 스테판은 눈이 튀어나올 줄 알았다. 실은 그는 조금 전 연구소에서 공작이 새로 만들라고 지시한 기계에 관해 공학자와 이야기를 나눴던 차였다.
―왜 이런 게 연구소로 들어갑니까?
다른 볼일을 보러 온 척하며 연구소로 들어가는 재료를 체크하던 때였다. 연구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뜻밖의 것이 있었다. 바로 매끄럽고 부드러운 제법 고급스러운 천이었다.
―실험을 하는데 필요해서 그렇소.
―천으로 실험을 한다니…… 뭘 만들려는 건지 궁금하군요.
특이한 방어복을 만들려는 건가. 그는 기대를 숨기지 못하고 질문해 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공작 부인 때문에 백지 설계도만 그린 공작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가 싶어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이번에 각하께서 만들고자 한 건 열을 이용해 올 풀림이 생기지 않게 천을 깨끗이 자르는 기계라네.
딱히 군사기밀과 관련된 물건도 아니라 공학자는 별 의심 없이 스테판의 질문에 대답했다. 상상도 못한 소식이었다. 천을 깨끗이 자르는 기계라니, 대체 그런 걸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왜 생산하겠다는 건지 스테판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그런 기계를 왜 만듭니까?
―나도 모르겠네. 어쨌든 공작 부인께서 요청한 기계라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네.
공작 부인이란 단어가 들리는 순간 스테판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그녀는 마치 그를 골탕 먹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