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50화
에드가가 그를 걸어 다니는 사고뭉치라고 표현한 걸 한 귀로 흘리는 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인간을 납치해서 내 권역에 가둬 둘걸 그랬어.”
이오스는 화병의 장미꽃을 정신없이 구경하며 입을 쩝쩝 다셨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장미를 그의 권역 깊숙한 곳에 심어 홀로 보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고 장미를 꺾어 장식하는 인간의 손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다. 더욱 분한 것은 이런 아름다운 장미를 만들어 낸 게 고작 인간이란 사실이었다.
“저기…… 당신은 정체가 뭐야?”
그사이 두려움이 가신 루비카가 질문했다. 이오스의 눈매나 툭툭 내뱉는 말투는 난폭했으나 장미를 정신없이 바라보는 모습은 어쩐지 친근감마저 드는 익숙한 자태였다.
“나? 이오스.”
루비카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옆에 있는 고블린 미노스에게 질문했다.
“정말이야?”
“네, 황금 드래곤 이오스님이 맞습니다.”
미노스가 어색하게 웃더니 가방을 활짝 열어 안에 든 돌을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 선물?”
미노스가 내민 것은 바닷가에 흔히 굴러다니는 돌멩이였다. 그녀의 반응에 누구보다 당황한 건 미노스였다. 그가 내민 것은 님프가 무척 좋아하는 인어의 심장이었다.
“아, 이쪽이 아닌가 보네.”
아무래도 그의 짐작이 틀린 것 같았다. 공작 부인이 아니라 공작이 님프인 건가? 부인보다 더 만나기 힘든 공작과의 자리를 어찌 마련해야 고민할 때 이오스가 외쳤다.
“그거 매달 하나씩 줄 테니까 나한테 세사르를 넘겨.”
이오스는 미노스처럼 눈치가 좋지 못했다. 그는 루비카가 님프란 전제하에서 자신의 조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개발한 장미도 내 권역에서만 피게 해야겠어. 가슴에 있는 장식도 덤으로 나한테 주고. 그 건에 대해 네가 원하는 조건을 말해봐.”
“조…… 건?”
“그래, 네 물건을 가져가는 대가를 지불할 테니 원하는 건 다 말해. 아, 내 권역에서 자라는 식물 중에서 이거랑 저거랑 그거는 안 돼.”
루비카는 잠시 이오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이오스의 말을 절반 이상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 속에서 미묘한 기색을 눈치챘다. 바로 이오스가 그녀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이오스가 얼마나 무섭고 변덕스러운 드래곤인지 이미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루비카는 한번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싫다고 하면?”
“뭐?”
이오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는 살아오면서 거절의 말의 들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왜 싫어? 저 인어의 심장 하나 구하려면 나는 심해에서 일주일은 똬리를 틀고 기다려야 한다고. 저게 얼마나 구하기 힘든 건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택을 불태우지도 물건을 깨부수지도 않았다. 눈치를 보아 그녀의 허락 없이 막무가내로 세사르 경을 데려가거나 장미를 가져가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루비카는 곧 이 자리가 협상의 자리이고 자신이 좀 더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개로 할게. 그 이상은 힘들어. 내 권역의 식물을 돌보려면 나도 한 달의 반절 이상은 자리를 비우기 힘들어.”
문득 루비카는 이오스가 꽃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갑자기 웃음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그녀는 간신히 참았다.
“미안하지만 저 물건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인어의 심장이란 부연 설명까지 들으니 더 꺼림칙해졌다. 그녀의 답변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된 건 이오스였다.
“뭐야? 너희 저거에 환장하는 거 아니야?”
루비카는 이오스의 착각을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세상엔 다양한 취향이 있잖아.”
“그건 그렇지.”
단순한 이오스는 쉬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를 헝클어진 머리만큼이나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연보랏빛 장미가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그래,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제시해 봐.”
루비카는 잠시 마른 침을 삼켰다. 원하는 게 뭔지 제시해 보라니, 그것만큼 어려운 주문이 세상에 또 있을까.
‘네 평원을 좀 내 줘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게 해주면 안 돼?’
목구멍까지 그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딱 봐도 성질 더러운 이오스가 자신을 대체 무엇으로 착각했는지 알 수 없는데 함부로 조건을 걸 수는 없었다. 루비카는 장미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 꽃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
“당연하지. 일단 세사르를 내가 가져가는 대가로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세사르 경은 인간이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뭐? 네 권속 아닌가?”
“같은 가문 사람이긴 하지만 그분이 어디에 가서 누구와 뭘 할지 그분이 정하는 거야.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루비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지 이오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인간과 드래곤의 상식 사이에는 크나큰 강이 하나 있는 듯싶었다.
“내 말은 네가 고용 조건을 제시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세사르 경이란 소리야.”
“나보고 고작 인간과 거래를 하라고?”
자존심이 무척 상한 듯 이오스가 입술을 물었다. 미노스가 그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저어 루비카에게 위험신호를 보냈다. 루비카는 거래와 고용은 다르다는 설명을 하는 걸 포기했다.
“어쨌든 세사르 경은 널 따라가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나는 그분을 보내 줄 수 없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 권속이 되는 건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루비카는 난처히 웃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자꾸 이런 곤란한 일이 생기는 걸까. 살다 살다 드래곤을 설득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장미꽃을 네 권역에서만 피게 하고 싶다며?”
“그래, 저런 건 내 권역에서 안전하게 자라야 해.”
“세사르 경은 자신이 개발한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과 나누길 원해. 단 한 사람만 보고 즐기라고 만든 게 아니야.”
“인간은 꽃의 진짜 아름다움을 몰라.”
“하지만 이 장미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존재는 드래곤인 네가 아니라 인간이야.”
대답할 말이 없는 듯 이오스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미노스는 이오스를 설득하고 있는 루비카의 담력에 놀랐다. 비록 이오스는 그녀를 님프로 착각하고 있지만 그녀는 사실 아무 힘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 연보랏빛 장미꽃 화분을 하나 줄게. 가져가서 원하는 곳에 심어.”
“내가 원한 건 화분 몇 개가 아니야.”
“테일러 장미도 줄게. 네가 원하면 앞으로 세사르 경이 개발할 장미도 나눠 줄게.”
이오스가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장미를 나눠 준다는 말에 기분이 다소 나아졌는지 미간의 주름이 사라졌다. 팽팽했던 분위기가 다행히 조금이나마 이완되었다. 미노스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네 가슴에 달고 있는 장식도 하나 가지고 싶은데.”
“줄게.”
“그래서 대가는?”
“없어.”
“없다고? 네 물건을 나눠 주는 데 대가가 필요 없어?”
“굳이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장미꽃을 예쁘게 활짝 피웠으면 하는 정도야.”
사실 진짜로 원하는 건 바로 이 골치 아픈 드래곤이 빨리 저택을 나가는 거였다. 루비카는 그런 속내를 숨기고 이오스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이해가 안 되네…….”
이오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얻으면 거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님프는 형이상학적 존재라고 하더니 아까부터 그녀가 하는 말을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난 대가 없이 뭘 가져가는 건 싫어! 뭐든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지금 원하는 건 없는데…….”
루비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오스는 말은 저리해도 자신이 정말 아끼는 걸 달라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낼 타입이었다. 괜히 함부로 말을 했다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란 사실이 들통날 수 있었다.
“생각나면 알려줄 테니 장미를 먼저 가져갈래?”
그녀는 답변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다혈질인 이오스를 일단 이 자리에서 내보내고 그 옆에 있는 미노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성 싶었다. 적어도 고블린을 상대로 목숨 걱정할 일은 없어보였다.
“흠.”
이오스는 팔짱을 끼고 루비카를 노려보았다.
“이러고 나중에 내가 들어줄 수 없는 대가를 부르는 건 아니겠지?”
죽고 싶어 환장할 일 있나. 루비카는 고개를 저었다.
“내 권속은 하나도 못 줘.”
줘도 사양이다. 튀어나오려는 본심을 억누르고 루비카는 다시 활짝 웃었다.
“내가 제일 바라는 건 그냥 장미꽃을 예쁘게…….”
“아아, 그 소리 정말 짜증나니까 하지 마.”
루비카는 바로 ‘합’소리가 나게 입을 닫았다. 이오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미노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거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겠지?”
“저는 이오스 님에게 완전 이익인 거래라고 확신합니다.”
“그래도 불안한데…….”
“그럼 계약서를 쓰시지요.”
계약서란 말에 이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카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미노스가 한쪽 눈썹을 이오스 몰래 찡긋거렸다. 고블린 나름대로 그녀를 도와주려는 것 같아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노스는 금방 종이를 꺼내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나무랑 그 꽃은 안 돼.”
이오스가 바짝 붙어서 미노스에게 참견하기 시작했다. 루비카는 곧 미노스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꾀를 낸 것임을 눈치챘다. 계약서에 ‘루비카가 요구해서는 안 되는 항목’란에는 그녀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식물들의 이름으로 빽빽했다. 그리고 루비카는 맨 마지막에 ‘황금 평원의 사용권’이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 처음에 멋모르고 이오스에게 평원의 사용권을 요구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장미 화분은 제가 챙겨 가겠습니다. 이오스 님은 먼저 돌아가시지요.”
“아, 참. 그러고 보니 젤다에게 물 줄 시간이 지났군.”
그 말과 함께 이오스가 사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미노스는 다시 인간의 모습이 되었고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마님께 어떻게 그런! 어?”
앤은 소리를 지르며 당황했다. 방금까지 루비카에게 불경하게 굴던 남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노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미소 지었다.
“방금까지 여기 어떤 남자가 있었지 않았나요?”
“글쎄? 나는 못 본 것 같아.”
“분명 남자 둘이 면담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오스라면 제가 깜빡 잊은 일이 있어 은행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화병을 나르던 하녀도 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공작 부인이 느긋이 못 봤다고 말했는데 공연히 이상한 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나이가 들어 잠시 헛것이 보였나 봅니다.”
하늘 같은 공작 부인에게 반말하는 은행원이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노릇이었는지 앤이 상황을 수습했다. 테이블에 간식과 커피, 그리고 루비카를 위한 차가 차려질 동안 벽에 걸린 거울은 잠시 보던 루비카는 웃음을 참았다. 방금까진 가슴에 달린 리본 장식이 다섯 개였는데 어느새 네 개로 줄었다. 사라진 리본을 누가 가져갔는지 굳이 눈앞의 고블린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하. 그럼 마님, 방금 드렸던 설명을 다시 할까요?”
루비카는 제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노스를 보았다. 이오스가 자신을 대체 어떤 존재와 헷갈렸는지부터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새카만 돌멩이를 가리켜 인어의 심장이라고 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반지가 생각났다. 반지 가운데 박힌 푸른 돌이 사실은 돌이 아니라 정체가 따로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