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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49화 (14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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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49화

그를 꼭 껴안은 채 루비카는 조금 전 눈물이 났던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스텔라를 막아야 한다거나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건 핑계였다. 그녀는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르망을 다시 만나도 그를 버리고 떠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것처럼 굴고 불안한 눈초리로 그녀를 찾으며 발견했을 때 안도의 미소를 짓는 그를 떠날 자신이 없었다. 세상의 무엇이든 다 가진 그였지만 그녀가 없으면 형편없이 망가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루비카.”

“응.”

그의 부름에 대답하며 가슴에 뺨을 비볐다. 품에 안긴 건 그녀였으나 루비카는 반드시 그를 지켜 내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좋아해.”

하지만 ‘나도.’라고 대답하진 못했다. 어째서 그런 건지 그녀는 아직 이유를 알지 못했다.

* * *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핀 공작저 앞, 어른의 허리 정도밖에 오지 않은 사내가 진지하게 키가 큰 사내의 행동을 하나하나 고쳐 주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자칼 은행의 오스라고 합니다.”

“말투가 건방집니다. 그리고 그 다리 좀 그만 건들건들 거리세요.”

갈색머리에 갈색 눈, 은행의 말단 직원이 입을 법한 감색 재킷을 입은 키 큰 사내가 휘황찬란한 금색 재킷에 훈장 비슷한 걸 단 사내의 말에 발끈했다.

“다리 좀 건들거리는 게 뭐가 어때서? 미노스, 너야말로 그 키 좀 어떻게 해 보지 그래?”

“키 작은 인간은 눈길을 좀 끌 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오스 님, 갑작스럽게 키를 늘리면 걷기 무척 불편합니다.”

“그래. 네가 열 걸음마다 한 번씩 넘어지는 통에 이제야 님프의 집에 가게 됐잖아.”

이오스의 말에 미노스는 발끈했다. 클레이모어 공작저에 오는 게 늦춰진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미노스가 빌어먹을 황금 드래곤에게 은행원으로서 갖춰야 할 태도를 가르치는데 시일이 한참 걸렸기 때문이다. 간신히 의심이나 면할 수준이 되었는데 이오스가 이제 완벽해졌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공작저에 왔다. 솔직히 말해서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아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저택에서 쫓겨날 것 같았다.

“이오스 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들통났을 것 같을 때는 시간을 정지시키세요.”

“응, 대신에 그럼 변신은 풀려.”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간을 정지시키고 공작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 저희의 본 모습은 그분만 보게 될 테니.”

“그런데 뭐 쓸 일이 있겠어. 이렇게 연기가 완벽한데.”

이오스가 오른쪽 귀를 파며 대답했다.

“공작 부인 앞에서 그렇게 귀 파시면 안됩니다.”

“아, 알았어. 빨리 가자. 더 늦었다가 돌아가서 애들한테 물 줄 시간 놓쳐.”

미노스는 한숨에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이오스처럼 미덥지 않을 사람 아니 드래곤은 또 없을 것이다.

“인사는 제가 할 테니 이오스님은 맞장구나 적당히 쳐 주십시오.”

그리고 문지기에게 자칼 은행에서 왔다고 알렸다. 자칼 은행이 클레이모어 가의 개인 재산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문지기가 금방 집사에게 그들을 안내했다.

“마님을 뵈러 오셨다고요?”

흰머리의 집사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미노스는 뻘뻘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고 싶은 걸 참고 웃으며 설명했다.

“저희를 믿고 자산을 맡겨 주신 것에 감사 인사와 선물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흠, 선물은 그냥 심부름꾼을 통해 보내도 되었을 텐데요.”

“중요한 고객이니 직접 뵈어야지요. 그리고 부인께서 드신 예금 상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이외에 자칼 은행의 상품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집사가 그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서로 교류를 하고 있긴 하지만 고블린과 인간의 사이는 썩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자칼 은행에 고용된 인간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해 찝찝하긴 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온 신분증이나 계약서는 진짜였다.

“면담실에 안내하지요. 엘리제, 마님께 방문객이 왔다고 전해 주렴.”

“네.”

그 뒤 둘은 면담실로 안내되었다. 그제야 미노스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이오스는 널따란 면담실을 휘 둘러보다가 화병을 발견하는 순간 인상을 썼다.

“이래서 인간은 안 돼. 감히 아름다운 꽃을 이딴 취급하다니.”

“진정하세요, 이오스님. 지금 님프를 속이기 위해 은행원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혹여나 지나가던 하녀가 볼까 두려워 목소리를 낮춰 주의를 줬다. 이오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훌쩍 소파에 앉았다.

“그래, 공작 부인이 님프일 거라고?”

“네. 공작은 조사해 본 결과 이 저택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사람 같았고 공작 부인에게서 무척 수상한 냄새가 났습니다. 원래 시골 귀족이었다는데 갑작스럽게 등장해 공작 부인이 된 것도 그렇고, 다른 인간 은행은 다 제쳐 두고 저희 쪽에 자산을 맡겼잖아요. 인간이라면 그럴 리 없지요. 아마 님프가 인간에게 매혹당해 내려온 거 아닐까 싶습니다.”

“대체 왜 인간 따윌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그때 예민한 미노스의 귀에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오스에게 공작 부인이 올 테니 조심하라고 이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곧 면담실 문이 열리고 아리따운 여인이 한 사람 들어왔다.

‘오.’

미노스는 들어선 여인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노란 바탕에 이팝나무 무늬가 그려진 옷은 무척이나 싱그러운 느낌을 주었다. 특히 가슴에 달린 장식은 소문으로 들었던 리본인가 싶었다. 역시 이 센스는 님프가 틀림없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문득 이오스의 상태를 체크하러 고개를 돌린 미노스는 깜짝 놀랐다. 이오스가 홀린 듯 공작 부인의 가슴 장식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이라는 족속들은 까마귀가 반짝이는 걸 좋아하듯 예쁜 걸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

‘이오스 님!’

미노스가 바지 자락 잡아당기자 이오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이오스는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대로 은행원다운 미소를 지었다. 미노스가 보기에는 형편없는 미소였지만 이제 방법이 없다. 그는 일단 루비카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 부인. 저는 자칼 은행에서 온 미노스이고 이쪽은 오스라고 합니다.”

이오스는 미노스에게 배운 대로 은행원답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의 연기가 통한 듯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은 여상히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후후후, 쉽군.’

뿌듯함을 느낀 이오스가 히죽 웃으며 준비한 말을 했다.

“저희를 믿고 자산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말투까지 완벽히 은행원을 흉내 냈다고 속으로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루비카는 금방 그가 다른 은행원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보통 은행원이란 미노스처럼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려 저택의 상태로 고객의 재무사정을 체크하고 눈치를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스라는 남자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미처 숨기지 못한 입가의 미소는 이 상황을 무척 재미있게 여기는 듯싶었다.

‘미노스란 사람은 평범한 은행원이지만 오스, 저 사람은 아냐.’

대체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일까. 루비카는 일단 웃으며 그들을 대하기로 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그렇지 않아도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안젤라 님에게 건 신탁과 관련된 것입니까?”

미노스가 손을 비비며 대꾸했다. 역시 눈치가 빠른 게 이 사람은 은행원이 틀림없다. 루비카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앤을 불렀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간식을 준비하는 게 낫겠지. 커피는 마시는가?”

“아아, 설탕 두 스푼에 우유는 듬뿍 넣어서.”

이오스가 다리를 꼬며 대답했다. 순간 면담실에는 정적이 흘렀으나 이오스는 자신이 뭘 잘못한지 모르고 소파 옆의 화분을 만지작거렸다. 미노스가 황급히 다음 말을 받았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앤, 커피를 내올 때 우유랑 설탕을 꼭 챙겨 줘.”

“네, 마님.”

앤은 하녀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미간을 살짝 구겨 이오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오스는 희희낙락이었다. 미노스의 이마에서만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아카데미의 학비는 이 정도 이자면 충분하니 나머지 예금을 적금이나 투자 쪽으로 돌리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적당한 상품이 있나?”

미노스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려하던 때였다.

“저 장미는!”

이오스는 하녀가 다과와 함께 들고 온 화병을 보고 분연히 일어나 외쳤다. 화병에는 그가 이전에는 본 적 없는 연보랏빛 장미가 세 송이 꽂혀 있었다. 미노스는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제발 한 시간만 버티라고 기도했건만 이오스의 연기는 십 분이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저 인내심 없는 드래곤과 함께 다른 곳도 아니고 님프의 소굴에 오는 게 아니었단 후회가 들었다.

“못 보던 건데? 어디서 구했어?”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이다. 루비카도 화병을 든 하녀도 당황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이오스가 눈에 거슬렸던 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걸음 나아가 공작 부인에 대한 불경죄에 대해서 호통을 치려 할 때였다.

“어?”

앤이 정지했다. 루비카가 주변을 둘러보자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람들이 정지한 상태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그녀가 갈피도 못 잡고 있을 때였다.

“다른 데 정신 팔지 말고, 내 질문에 답 좀.”

이오스가 다가와 말했다. 새로운 마법을 쓰느라 그의 변신이 벗겨지고 말았다. 황금빛 머리칼과 눈동자에 루비카는 입을 벌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에서 금 알갱이가 떨어졌다. 아까운 마음을 참지 못하고 미노스가 금 알갱이를 주웠다.

“질문이라니?”

“장미 말이야. 어디서 구했냐고.”

이오스가 연보랏빛 장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행히 이오스의 태도에는 적의가 없었으나 절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루비카가 두려운 마음에 대답하지 못하자 미노스가 나섰다.

“부인, 이분은 그저 장미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 나왔을 뿐이니 질문한 바에 대답해 주시면 별일 없을 겁니다.”

“인간이…… 아닌 거지?”

“내 질문에 먼저 답해!”

이오스가 코앞까지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외쳤다. 솟아오른 눈썹이나 입매가 보통 성깔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본모습을 드러낸 고블린도 질문에 대답하면 별일 없을 거라고 했지 그가 친절하다고 말하진 않았다.

‘괜히 세사르 경의 이름을 대었다간 그가 곤란해질 수도 있어.’

루비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구한 게 아니라 개발한 거야.”

“개발? 아, 그 녀석 또 색다른 걸 만드는 데 성공한 거야? 나한테 이야기한 장미 중에 연보라색은 없었는데!”

이오스가 주먹을 꼭 쥐고 분한 듯 외쳤다. 아무래도 그는 이미 세사르 경에 대해서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세사르 경을 알아? 그분을 어디에서 만났어?”

“플레누스 산에서 열린 고블린의 파티에서.”

아, 세사르 경이 여태껏 했던 소리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루비카는 초조하게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세사르 경이 엄청난 존재를 불러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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