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44화
“아하.”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하녀가 무슨 심부름을 하러 다녀갔는지는 자명했다. 그녀의 계략대로 차 모임에는 사랑의 씨앗이 움트려 했다. 앤이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사실 엘리제에게는 벌써 열 통이나 되는 편지가 왔어요.”
“열 통?”
“앞으로 더 오겠지요.”
앤은 꼭 자신이 연서를 받은 것처럼 콧대를 세웠다. 역시 모임 하나를 성공 시키는데 핑크빛 기류처럼 도움 되는 건 없다. 아무리 따분한 모임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즐거운 시간이 된다. 서로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니 말이다.
‘아.’
그때 갑작스레 에드가가 생각났다. 그는 침실의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스툴 위에 쭉 뻗어 올리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도 피곤할 테니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루비카는 어쩐지 그의 앞에서는 입을 자제하기가 어려웠다. 차 모임의 진행 사항이나 주변 시녀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면 그는 종종 시니컬한 말로 참견을 했다. 신변잡기스러운 이야기였으나 에드가는 단 한 순간도 지겨워하지 않았다. 문제는 루비카도 그 시간이 참으로 좋았다는 거다.
-당신을 좋아해.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얼굴에 홧홧하니 열기가 달아올랐다.
“마님?”
“아, 아니. 잠시 딴생각을 했어.”
달아오른 얼굴 주위에 손부채질을 하며 루비카가 대답했다. 요즘 들어 자꾸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갑작스럽게 에드가가 떠오를 때가 잦았다. 루비카는 그의 잔상을 황급히 머릿속에서 쫓아내려 애쓰며 탕트 백작 부인의 편지를 펼쳤다.
“탕트 백작 부인은 차 모임을 어떻게 생각할까?”
“미라몽 후작 부인이 참지 못하고 장미 때문에 편지를 쓴 걸 보면 분명 백작 부인이 장미를 자랑했을 것이고…… 차 모임이 마음에 들었을 거예요.”
그리 말하는 앤도 목소리에서 긴장이 묻어 났다. 지금까지 많은 귀족에게 호평을 받았으나 사교계 명사인 탕트 백작 부인이 ‘장미꽃만 좋았지 차 모임은 형편없었어.’라고 한마디 한다면 여태까지의 호평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손수건으로 손바닥의 땀을 훔치며 단출한 한 장의 편지를 읽어 내린 루비카는 마지막 문단에 가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건 앤도 마찬가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뜻밖이었다.
「저도 차 모임을 하려 합니다, 부인. 차를 살 수 있는 좋은 상단이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그리고 만약 시간이 되신다면 제 모임에 참석해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직접 읽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루비카는 심호흡을 하고 마지막 문단을 다시 읽고 또 읽었다. 다행히 글자가 사라지거나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탕트 백작 부인이 차 모임을 열겠대!”
“마님! 대성공이에요. 세상에 모임에 대한 호평 중 이것만 한 게 어디 있겠어요.”
“앤, 당장 칼을 불러 줘. 차를 구입할 수 있는 상단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해야겠어.”
“네!”
부름을 받은 칼은 백작 부인이 차 모임을 열 계획이라는 소식에 감격해 그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리고 성심을 다해 상단 리스트를 정리했다. 각 상단에서 구할 수 있는 차와 그 특징은 물론 차 끓이는 방법까지 정리하겠다는 걸 간신히 말렸다.
루비카는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내지 않도록 애쓰면서 언제든 차 모임에 참석하고 싶다는 뜻을 편지에 적었다.
“참, 백작 부인이 사교계 명사로 이름 높은 이유를 알 것 같군요.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수완이 좋네요.”
“수완이 좋다고?”
“보세요. 편지가 너무 많이 온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마님이 서명한 답장을 받는 게 고작이지만 백작 부인은 직접 쓴 편지를 받는 데 성공했잖아요. 모두 차 모임을 열겠다는 뜻을 밝힌 덕분이지요.”
“그러고 보니 보통 수완이 아니구나.”
루비카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에드가는 탕트 백작 부인을 그저 시끄러운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사교계 명사는 역시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루비카는 문득 두려워졌다.
“그런 분들 틈에서 내가 앞으로 잘 할 수 있을까?”
“마님은 이미 잘하고 계신데요. 테일러 장미가 이만큼 인기를 끈 것도 다 마님의 아이디어 덕분이잖아요.”
앤이 다른 귀족들에게 보낼 답변을 정리하며 무심히 대꾸했다. 루비카는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하여 질문했다.
“내 아이디어 덕이라니?”
“차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장미 화분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그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을 불러 자랑을 해대는 통에 다들 대체 테일러 장미가 뭐냐고, 어디서 구할 수 있냐고 아우성인걸요. 홍보를 톡톡히 했지요.”
앤이 존경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루비카는 문득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결코 이런 현상을 노리고 장미 화분을 선물로 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돈을 아낌없이 펑펑 쓰고 싶었고 그러려면 선물만 한 게 없다 싶었을 뿐이었다.
대체 왜 이런 결과가 돌아오는 걸까. 착한 딸, 좋은 조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노력했을 때 그녀는 결코 그 보답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나쁜 아내 소리를 듣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주변 평판이 좋아진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마담 카나를 불러서 마님이 차 모임에 입으실 드레스를 준비해요. 차 모임용 드레스를 적어도 다섯 벌을 주문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탕트 백작 부인의 차 모임에 가는데 드레스를 다섯 벌이나 주문할 필요가 있을까?”
“마님, 미라몽 후작 부인이 차 모임 초청 편지를 일주일 안에 보낸 다는 것에 제 앞의 펜을 걸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앤의 호언장담대로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미라몽 후작 부인으로부터 자신도 차 모임을 열 것이니 부디 참석을 해 주면 좋겠다는 편지를 문 전서구가 공작가에 도착했다. 문제는 그런 편지를 보낸 게 미라몽 후작 부인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초청 편지 중 몇몇의 수신인은 루비카가 아닌 연구소나 호위기사단에 있었다.
단순히 공작 부인의 눈에 들고자 하는 의도뿐이었다면 차 모임은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차 모임에서 서로 마음이 통한 젊은 남녀가 탄생했다. 그리되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게 그 부모였다. 무도회 시즌도 아닌데 어찌 남녀를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게 할지 고민하던 차 그들은 백작 부인이 차 모임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이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 모임만큼 완벽한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미라몽 후작 부인의 모임에는 참석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지요. 미라몽 후작가를 너무 멀리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탕트 백작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눈치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좋지 않다. 앤은 루비카의 스케줄에 일단 미라몽 후작가의 차 모임을 넣었다.
“그리고 칼이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분들이 계세요.”
명색이 공작 부인인 루비카가 공작가의 산업과 얽혀 있는 가문들을 뒷전으로 두는 건 좋지 않았다. 앤은 루비카가 참석해야 할 모임들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일주일 뒤부터 루비카는 본격적으로 바빠질 예정이었다.
“다섯 벌 주문한 걸로는 안 되겠는데…….”
“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마담 카나가 무척 바쁘다고 합니다. 차 모임을 여는 귀부인들이 모두 카나의 의상실로 몰려드는 통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 되었다고 해요. 미라몽 후작 부인은 주문이 밀릴까 아예 기사들이랑 마석마차를 보내 납치하듯 그분을 데려갔답니다.”
“설마 그 사람들 모두 리본 드레스를 주문하는 건 아니겠지?”
루비카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질문했다.
“호호호, 저희가 차 모임에 입었던 드레스 천은 지금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어요. 특히 엘리제가 입었던 로열블루 천은 시중에 싹이 말랐어요.”
생각 이상의 성공이다. 루비카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눌러 진정시켰다.
“보석으로 꾸미지 않아도 예쁘고, 활동하기도 편해서 어떤 분들은 굳이 차 모임이 아닐 때도 입는다고 합니다.”
“잘됐구나.”
“네, 영지에도 잘된 일이지요.”
앤은 뿌듯한 심정으로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처음 차 모임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모습이 조금 염려가 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그녀의 선물을 사는 데 엄청난 돈을 써 대는 통에 루비카를 말리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란 판단이 들었다.
엄청난 예약금과 주문을 받은 카나는 당장 실력 좋은 재봉사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천을 비롯한 물자가 영지 내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관은 마담을 데려가기 위해 영지를 들린 심부름꾼들 덕에 때 아닌 호황을 누렸다.
없어서 못 파는 테일러 장미도 마찬가지였다.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무기 산업 덕에 부유했으나 영지민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공장에 취직할 기술이 없는 농민들의 삶은 타 영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테일러 장미의 성공 덕에 장미밭에 농민을 고용하게 되었다. 이는 곧 농가의 추가 소득과 일자리로 이어진다. 농민이 부유해지면 영지 내에 들어오는 씨앗 및 농기구의 종류도 다양해진다. 상점가의 거래가 활발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루비카의 과감한 소비는 모두 영지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한 아낌없는 투자였다.
‘아끼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믿었는데…….’
재화가 부족한 나라였다. 마석으로 식량을 사들이고 있으나 대륙에 흉년이 들면 당장 작물의 값은 무서울 정도로 뛰었다. 그래서 앤은 세리토스 왕국 귀족의 미덕이라 일컬어지는 절약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흉년을 대비하기 위해 그녀는 공작 부인이 공석인 동안 대신 맡은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살림을 아끼고 아껴 꾸렸다.
하지만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심지어 보고 싶은 것 모두 절제하기보다는 마음 가는 대로 행한 루비카가 공작가를 더 잘 꾸리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장미에 투자하는 것과 차 모임을 성대히 여는 것을 말렸다면 오늘 같은 날이 왔을까?
“마님, 왕비 전하께서도 테일러 장미를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선물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분이 원하시면 당연히 선물해야지. 참, 세사르 경이 새로 만든 장미도 함께 보내자.”
루비카는 테이블 위 화병에 꽃을 만지며 대답했다. 테일러 장미와 그라데이션이 반대로 되어 있는 이 꽃은 어제 에드가가 그녀의 품에 안긴 것이다. 루비카는 개발은 세사르 경이 하고 있는데 왜 당신이 매번 생색을 내냐는 소리를 하려다 무척이나 칭찬이 고파 보이는 에드가의 얼굴에 입을 닫고 일단 기뻐해 줬다.
“전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군요.”
“세사르 경이 다음에는 연보라 빛 장미를 만들 거라 그랬어.”
연이은 성공에 그는 단단히 기가 살았다. 전에는 그를 무시했던 친척들마저 장미를 어떻게 편법으로 구할 수 없을까 온실을 기웃거렸다. 그럴 때마다 세사르는 물세례를 퍼붓고 그러기에 진작에 잘 보이지 않았냐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러다 겨울에 피는 장미도 개발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하하하.”
루비카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지만 세사르 경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앞으로 마님이 바빠지실 테니 드레스도 잔뜩 주문하고 장신구도 주문해요.”
“장신구는 이미 많은데…….”
“각하께서 사신 것은 화려하긴 하지만 차 모임에 입으실 드레스에는 안 어울리잖아요. 그건 무도회 시즌 때 사용해요.”
적극적인 앤의 모습에 루비카는 목이 탔다. 원래 앤은 예산 걱정으로 그녀의 소비에 참견 아닌 참견을 했던 사람이다. 얼마 전까지 자행된 공작의 과도한 소비에 별 말은 안 해도 얼굴에 낀 먹구름을 지우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산 것들을 생각하면 이제 슬슬 예산에 구멍이 나야할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앤은 걱정하기는커녕 천하태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