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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43화 (143/212)

# 14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43화

* * *

서늘한 바람을 타고 장미향이 정원을 가득 채웠다. 세사르가 개발한 장미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향기 또한 짙었다. 모두 그가 플레누스 산에서 찾은 야생 장미의 우월함 덕분이었다. 정원 한가운데 인영 하나가 깊이 장미향을 들이마셨다.

“흠.”

달빛을 받은 황금빛 머리가 반짝였다. 머리와 같은 황금색 눈을 가진 이는 장미가 가득한 정원을 휙 둘러보았다.

“장담한 대로군. 꽤 마음에 들어. 예뻐.”

플레누스 산에서 웬 노인네가 자신이 찜한 장미를 가져가려기에 죽일까 했는데 살려 두길 잘했다. 노인이 호언장담한 대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쁜 장미가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이제 이건 다 내 거다.”

황금빛 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욕심 많은 이오스. 그게 그의 별명이었다. 그는 드래곤답게 아름다운 걸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식물에 대한 소유욕이 남달랐다. 그는 이 새로운 장미를 오직 자신의 권역에서만 피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오스는 주문을 외우며 왼손 검지에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황금 가루 같은 빛 알갱이들이 떠돌며 정원의 장미 화분을 감쌌다. 이오스는 그의 권역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황금 알갱이들이 그가 탐내는 것을 안고 사라져야 했다.

“어?”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오스는 당황해 정원을 쭉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가 일으킨 황금 가루마저 다 사라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이 공간에선 그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오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원 너머 저택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은 모든 생물체의 우위에 있다. 그의 권역에 들어선 존재들은 의지가 강한 인간을 제외하곤 모두 그에게 충성한다. 설사 권역 바깥이라 할지라도 그의 힘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른 놈의 권역인가?”

이오스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황금빛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금빛 알갱이들이 떠다녔다.

“이오스 님, 다 챙기셨나요?”

바닥이 뽈록거리더니 주름이 자글자글한 고블린이 톡 튀어나왔다. 고블린은 코를 벌름벌름하며 정원에 핀 장미향을 가득 들이마시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썽쟁이 학자 놈에게 귀한 술을 바친 보람이 있다. 고블린은 장미에 물과 거름을 줄 생각에 벌써부터 행복해졌다.

“어서 가시죠.”

“아니, 이 장미는 못 가져가.”

이오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대답했다. 고블린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정원의 장미를 모두 제 것으로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마법이 안 통해.”

“네? 이상한 일이군요. 여기가 다른 드래곤의 권역이면 몰라도…….”

“그래.”

이오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자신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니……. 이 지상에 그만큼 강한 존재는 같은 드래곤을 빼고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저택에서는 동족의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아!”

“아?”

“드래곤이 아니면 님프가 아닐까요?”

“님프?”

그보다 강한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가 님프였다. 이오스는 미간을 좁혔다. 집주인이 님프라고 가정하니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님프가 이런 곳에 왜? 걔들은 결벽증이 있잖아.”

“님프의 사정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걔들 속은 나도 모르지.”

이오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 끝을 당겼다. 고블린이 그 동작을 따라 떨어지는 황금 알갱이를 조심스럽게 담았다. 이오스는 꽃이나 나무는 탐욕스럽게 모으면서 제 몸에서 떨어지는 황금은 돌 부스러기 취급했다. 고블린은 이오스야말로 속을 알 수 없는 드래곤이라고 투덜거렸다.

“아, 님프면 님프답게 자기들이 사는 섬에 처박혀 평화롭게 살 것이지. 귀찮게 시리 여긴 왜 왔대!”

“장미를 훔치러 온 이오스 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노스, 닥쳐.”

고블린 미노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오스는 팔짱을 낀 채 정원을 휙 둘러보았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장미꽃이 너무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 정신 나간 학자 놈은 앞으로 이보다 더 예쁘고 다양한 꽃을 개발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님프에게 속한 놈인 이상 납치하면 더 골치 아파질 테고.”

“그보다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 가면 어떨까요?”

“정식으로?”

“님프는 기본적으로 온화하고 평화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공손히 요청하면 보통 들어주기 마련이죠.”

“고옹손히?”

이오스가 미노스를 도전적으로 바라봤다. 불타는 황금 눈을 보고 미노스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오스는 욕심이 많은 데다 포악하다. 자칫 잘못했다간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남도 가질 수 없다는 논리로 이 예쁜 정원을 불바다로 만드는 수가 있다.

‘님프도 한 번 화나면 끝 간 데 없이 무서워지지.’

님프가 진심으로 분노하면 불바다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내려진다. 미노스는 그 일만은 막고 싶었다.

“그 말이 아니라 이오스 님, 공손한 척 연기를 해 장미꽃을 빼내 오자는 거지요.”

“연기?”

구미가 당기는 듯 이오스가 되물었다. 다행히 이오스는 머리가 썩 좋지 않고 단순했다.

“얼마 전 이 저택의 주인이 저희 은행 쪽으로 거액의 자금을 신탁했지요. 은행 직원인 척 속여 넘겨 장미를 빼돌리는 거 어떻습니까?”

은행 직원을 연기하려면 공손해져야 한다. 이오스는 거기까지 계산하지 못하고 속여 넘긴다는 말에 반응해 기뻐했다.

‘정말 단순해서 다행이야.’

미노스는 이오스가 뿌리는 금 알맹이를 주우며 거대한 클레이모어 저택을 휙 둘러보았다. 저택의 주인에 대해서는 미노스도 관심이 많았다. 갑작스럽게 자칼은행에 거액의 돈을 입금한 사람이다. 미노스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자칼 은행이 인간의 돈 이외에 드래곤이나 마물의 돈도 받아 관리하는 걸 눈치챈 건지 신경 쓰였다. 미노스는 이오스를 도와주는 척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대해서 알아볼 속셈이었다.

* * *

차 모임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루비카의 앞으로 편지가 쏟아졌다. 은쟁반이 가득 찰 정도로 쌓인 편지는 모임에 참석한 사람의 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앤도 차 모임에 초청하지 않은 미라몽 후작 부인을 비롯한 대귀족이보낸 편지 봉투에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인연도 없는 이들이 대체 왜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

“일단 한 번 읽어 보세요.”

“그럴까?”

루비카는 잠시 어떤 사람들의 편지를 먼저 읽을지 망설였다. 차 모임에 초대된 사람들이 편지를 보낸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영문으로 편지를 보낸 걸까? 호기심이 동한 그녀는 먼저 미라몽 후작 부인의 편지 봉투를 집었다.

편지를 꺼내자 잘 말린 꽃잎이 떨어지며 향긋한 향내가 났다. 그냥 보낸 편지가 아니라 정성 들여 쓴 편지였다. 자신은 갑작스레 공작 부인이 되었지만 상대는 유서 깊은 가문의 후작 부인이다.

‘나한테 잘 보일 필요 없는 사람이 대체 왜?’

편지는 매우 고상했다. 평범하게 날씨와 안부를 나누며 얼마 전에 열린 차 모임이 호평받은 것에 대한 축하가 이어졌다. 그리고 후작 부인은 오래전 선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과 그랬듯이 앞으로 종종 안부를 나누며 교류하였으면 좋겠다고 끝을 맺었다. 편지를 다 읽은 루비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평범한 편지였으나 후작 부인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걸 자신에게 보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꼬이고 꼬인 대귀족의 의도를 혼자서 읽어 내려니 힘에 부쳤다.

“앤, 이 편지 무슨 의미야?”

앤이 루비카가 건넨 편지를 한 차례 읽더니 웃음을 머금었다.

“아아, 후작 부인은 테일러 장미가 탐이 났나 보네요.”

“장미가 탐났다고?”

“네. 여기 보시면 차 모임에서 교류의 뜻으로 특별한 장미를 나눠 주신 것에 대해서 참 멋진 일이라고 칭찬하셨지요. 그리고 본인도 마님과 교류하고 싶다고 밝히셨잖아요. 이건 나도 장미를 선물해 달라는 뜻이지요.”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루비카는 제 옆에서 어려운 귀족의 화법을 해석해 주는 앤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 느꼈다.

“장미를 보내는 게 좋으려나.”

“보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왜?”

“미라몽 후작 부인과 탕트 백작 부인은 라이벌 관계랍니다.”

“라이벌? 친한 사이 아니야?”

“두 부인은 처녀 시절부터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어요. 사이가 좋은 가문으로 시집간 후 어쩔 수 없이 대외적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아주 미워한답니다. 탕트 백작 부인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후작 부인을 불러 장미를 잔뜩 자랑했겠지요. 속이 뒤집힌 후작 부인이 참지 못하고 편지를 보낸 것 같네요.”

“내가 후작 부인에게 장미를 보내면 백작 부인이 화가 나겠구나.”

탕트 백작가와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긴밀한 사이였으나 미라몽 후작가와는 그러지 못했다. 루비카는 후작가에 장미를 보내지 않기로 하고 다음 편지를 뜯었다.

“응? 후작 부인의 편지랑 내용이 거의 똑같은데?”

“그 부인도 장미가 탐났나 보네요.”

그 다음 편지도, 다음 편지도 놀라울 정도로 내용이 비슷했다. 서로 편지를 보여 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뭐라 답장해야 할지 모르겠네. 지금 세사르 경이 키우고 있는 장미는 이 편지를 보낸 사람들이 원하는 양의 절반도 되지 않는데…….”

그리고 세사르는 다른 장미의 개발도 목전에 두고 있다. 테일러 장미에만 신경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앤이 루비카의 고민에 대한 답을 간단히 내주었다.

“집사에게 장미밭을 일굴 일꾼을 고용하라고 해야겠네요.”

“아, 온실에서 파종한 다음에 묘목을 밭에서 키우는 방법도 있었지. 꾸준히 봐 줄 일꾼을 고용하고, 옮겨 심는 것처럼 일손이 잠깐 많이 드는 건 근처의 농민들에게 돈을 줘서 동원하면 되겠다.”

마침 날씨도 장미가 자라기에 적당했다.

“농민들이 좋아하겠어요. 뜻밖의 수익이잖아요.”

“그렇겠지? 음, 처음부터 선물용으로 개발한 게 아니니 장미를 구입하고 싶으면 세사르 경에게 문의하라고 해야겠다.”

“세사르 경에게…… 마님,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판매는 칼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앤의 우려를 루비카는 바로 이해했다. 세사르 경은 물건의 판매를 맡길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부르거나 헐값에 장미를 넘기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만 낼 사람이었다.

“세사르 경은 연구하느라 바쁘다는 설명과 함께 칼에게 문의하라고 하면 실례가 아니겠지.”

“그럼요.”

지나치게 많은 편지가 왔기 때문에 루비카가 일일이 답장하는 건 무리였다. 장미를 원하는 사람에게 앤이 답장을 쓴 후 루비카는 서명만 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루비카는 차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편지 봉투를 떨리는 손으로 뜯었다. 걱정과 기대가 뒤섞여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모임을 끝낼 때 다들 기뻐 보였으나 표정만으로는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게 사교계였다.

하지만 편지를 몇 줄 읽는 것만으로 루비카는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차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차 모임처럼 즐겁고 유익한 모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말했다.

“앤, 이거 봐. 사틀레 영애가 차 모임을 또 연다면 자신도 함께하고 싶다고 적었어.”

“사틀레 영애가 차 모임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나 보군요.”

“어머, 이 아가씨도 차 모임을 또 열면 꼭 불러 달라고 했어.”

아이처럼 기뻐하는 루비카의 모습에 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루비카가 주최한 차 모임은 호평을 뛰어넘어 대성공을 거뒀다. 이제 사교계 시즌에서 루비카의 입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 계획이 제법 통했나 보네.”

“통하다마다요. 호호호호, 오늘 남작가의 하녀 하나가 연구소에 다녀갔답니다. 심부름을 왔다는데 들고 있는 건 아주 작은 편지 하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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