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42화
* * *
“모임이 성공해서 기쁩니다.”
집사 칼이 드물게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꿈에 그리던 차 모임이었다. 비록 테이블의 절반 이상은 케이크가 차지하고, 차를 한 입 마신 대귀족들이 물이나 주스를 찾긴 했으나 멋진 모임이었다. 유명한 시인이 와서 낭송하고 그에 관해 토론까지 하다니…… 동제국의 차 모임조차 이처럼 완벽하진 못할 것이다.
“나도 기뻐. 차를 어디에서 구하는지 물어본 사람도 있었어.”
“네, 어쩌면 세리토스 왕국에 차 모임이란 문화가 전파될지도 모릅니다.”
집사 칼이 희망에 차 말했다. 루비카는 그와 다른 의미로 희망에 찼다. 정말 많은 사람이 카나의 의상실에 관해서 물었다. 그리고 루비카의 드레스를 칭찬했다. 어떤 이는 차 모임에만 입기에 아깝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긴장했던 것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칼, 에드가는 이제 일이 끝났겠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번쩍 들어올렸다. 말할 것도 없이 에드가였다. 그는 세상에 이보다 가벼운 것은 없다는 듯 루비카를 한 바퀴 팽그르르 돌렸다.
“꺄악!”
루비카는 소리를 질렀지만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바람결을 따라 가슴 장식이 나풀거렸다. 에드가는 그 매혹적인 장식에 이끌려 가슴에 눈을 주지 않으려 주의하느라 혼이 났다.
“선물은 마음에 들었어?”
러셀 경의 열정적인 낭송을 떠올린 루비카는 뺨을 붉혔다. 듣기 부끄러울 정도의 구애 시였다.
“꼭 그 시였어야만 했어?”
“그 시여서 의미가 있는 건데?”
“당신 진짜!”
“러셀 경의 낭송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 하긴, 그놈이 당신을 보는 눈빛이 불손하긴 했어. 당장 가서 혼을 내 줘야겠군.”
“에드가!”
어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을까. 한번 고삐 풀린 망아지는 멈추는 법이 없다. 루비카는 싱글싱글 웃는 에드가가 얄밉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있던 시를 읊은 게 마음에 차지 않았나 보군. 당신을 위한 시를 따로 지으라고 할까?”
“제발 그만 괴롭혀.”
괴롭히기 위해 한 말이 맞았던 듯 에드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루비카의 가슴이 뛰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딱 적당한 웃음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묘하게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에드가가 그녀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퍼붓는 바람에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예뻐서.”
마지막으로 살짝 풀린 머리카락 끝에 입 맞추며 그가 말했다. 루비카는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그의 눈빛이 당장에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흠, 흠.”
보다 못한 칼이 헛기침을 했다. 루비카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땅거미가 져서 어둡긴 했지만 정원 한복판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테이블과 접시를 치우던 시종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이 느껴졌다.
“쳇.”
에드가가 혀를 차며 그녀를 품에서 놓았다. 기분이 꽤 좋아 보였던 그는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루비카에게 차 모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루비카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참석자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누가 무얼 맛있게 먹었는지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기 어렵다. 사실 그는 차모임에 함께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루비카는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어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권해야 했었나?’
에드가는 대귀족답게 하고 싶은 말을 쉽게 하긴 했으나 은근슬쩍 솔직하지 못한 면모가 있었다. 그녀는 오늘 에드가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부드러운 분위기로 그의 경계심을 풀어 놓고 싶었다.
“에드가, 다음에는 같이 차 모임을 열까?”
그리 말하면 에드가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긍정할 줄 알았다. 하지만 방금까지 밝아 보였던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꼈다.
“아니, 나 바쁜 거 알잖아.”
그렇게 바쁜 사람이 창가에 내내 붙어서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어? 루비카는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아무래도 이 주제로는 그의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기 힘들 것 같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참, 당신이 만든 그 실 끼우기 말이야. 요즘 인기래. 외국으로까지 수출한다며? 잠시 짬 내서 만든 게 그렇게까지 유행하다니, 당신은 정말 소문대로 대단해.”
에드가는 눈을 가늘게 떠 루비카를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칭찬이 꾸며내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루비카는 자신이 연기를 못한다는 사실을 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거짓말이어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내가 좀 대단하지.”
루비카는 겸양이라곤 모르는 그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미소를 유지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당신이 뭘 발명하고 개발할지 나한테 알려 주면 안 돼?”
“뭐?”
그녀도 알고 있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당신이 하는 일에 좀 흥미가 생겼어. 이렇게 대단한 걸 만드는구나 하고.”
“루비카.”
그가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내가 평소에 만드는 것들은 절대 당신의 흥미를 끌 것이 못 돼.”
“그, 그렇지 않아. 나 관심 많아.”
“전에 연구소의 멍청한 놈이 당신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바람에 발작하듯 놀랐다고 들었는데?”
그 일을 알고 있단 말이야?
루비카는 눈을 깜빡였다. 에드가는 이제 아예 팔짱을 끼고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왜 알려고 하는데?”
그는 사실 가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첫 발명품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발명품을 처음 실험했을 때 일어난 일도 기억한다.
‘에드가, 잊지 말거라. 우리의 부는 수많은 사람의 피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무기는 마물이나 드래곤의 권속을 위협하는 데 쓰이기도 했지만 때때로 사람을 해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에드가는 루비카에게 이를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 큰 성인이고, 또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녀가 제 어둠을 직시하는 상황을 막고 싶었다. 그러다 자신에게 환멸을 느낄까 지독히도 두려웠다.
“하지만……, 하지만…….”
루비카가 입술을 꾹 눌렀다. 그를 구하려 못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고 있는데 협조를 안 해 주다니. 그가 야속했다.
“당신이 하는 일이니까 나도 알아야겠어.”
“내가 하는 일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 그것 이외에도 할 일이 많잖아. 괜히 알려 하다가 끙끙 앓는 꼴 보고 싶지 않아.”
논리로는 에드가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떼를 쓰기로 했다.
“당신은 내가 뭘 하는지 다 알잖아. 누구한테 편지를 받았는지, 연구소에서 왜 놀랐는지, 예산을 어떤 식으로 잡았는지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서도 다 알고 있는데…….”
말하다 보니 정말 억울했다. 루비카의 입가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건 연기가 아니었다. 에드가는 욕설이 나오려는 걸 참고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 아내야. 어디서 무얼 하는지 나는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런…… 그렇게 따지면 당신은 내 남편이야! 남편이 어디에서 뭘 하는지 나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
“루비카.”
“설마 봐 봤자 어려워서 여자인 당신은 이해 못할 테니 알 필요 없어. 이런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를 그런 헛소리 하는 놈들이랑 같이 취급 마!”
화난 에드가가 의자 손잡이를 거칠게 내려쳤다. 루비카는 찔끔 놀랐지만 그를 노려보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 끔찍한 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막아야 해.’
이전에는 감히 제가 그의 일에 참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드가를 알면 알수록 ‘스텔라’로 인해 일어날 참극은 그도 원하지 않는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는 한 그를 말리고 싶었다. 지금 그의 눈에 자신은 좀 바보 같고 세상 물정 모르고 떼쓰는 여자로 보이겠지. 그래도 좋다. 스텔라의 개발을 막아 그 일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원망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알고 싶어?”
루비카가 포기하지 않자 결국 그가 이를 꽉 깨물고 질문했다. 에드가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녀가 자신의 얼굴도 보려 하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것만은 이겨 낼 자신이 없었다.
“응.”
“연구소 견학은 안 돼. 그렇게 놀랐는데…… 그런 꼴을 두 번 다시 겪게 할 수는 없어.”
“좋아. 연구소 견학은 안 갈게.”
그녀의 관심사는 그가 스텔라를 개발하고 있는지였다. 폭탄이나 전차 구경 같은 건 그녀도 원치 않았다.
“무턱대고 문서를 다 보여 줄 순 없어.”
“응, 그냥 뭘 만들고 있는지만 알려 주면 돼.”
그에게 어려워서 이해 못할 테니 알 필요 없다고 말할 거냐고 따지긴 했지만 사실 복잡한 서류를 알아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개발하는 것만 알려 줘? 아니면 연구소 학자들이 연구하는 것까지 다?”
“음…….”
루비카는 손가락으로 볼을 누르며 잠시 고민했다. 스텔라 같은 엄청난 무기라면 그가 직접 발명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안전하게 가고 싶었다.
“다 알려 줘.”
“알았어. 그럼 칼에게 정리하라고 하지. 항목이 많아서 시간이 다소 걸릴 거야.”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
에드가는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어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알려 주고 싶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려 하는 그녀에게 화가 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차분하게 상황을 종합해 보니 그녀의 요구가 그냥 떼쓰기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며칠 전에는 그의 재산을 자칼 은행으로 옮기라고 했고, 이제는 무슨 무기를 개발하는지 집요한 관심을 보이며 알려 달라고 한다.
‘전쟁이군.’
에드가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그가 눈을 잃고 무일푼이 되어 그녀를 만난 게 쉽게 설명된다.
‘어쩌다 전쟁이 났지?’
세리토스 왕국의 서쪽은 해안가였고 북쪽은 험준한 세리토스 산맥이, 동남쪽은 드래곤 이오스의 권역으로 인해 사실상 섬이나 마찬가지인 나라였다. 여러 나라를 뒤흔든 무기를 수출하면서도 왕국 안이 평화로웠던 이유다. 드래곤의 권역은 왕국의 식량 사정을 힘들게 하는 동시에 왕국을 지켜주는 울타리였다. 세리토스 왕국에 전쟁의 불길이 이는 건 쉽지 않았다.
스텔라.
에드가는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완성하기로 마음먹은 폭격기를 떠올렸다. 스텔라가 아니라면 왕국이 쑥대밭이 되고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망하는 건 불가능했다.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국왕? 아니면 왕세자? 하지만 두 사람은 정복욕이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왕세자의 경우는 그 자리에 오르기 싫어하기까지 했다.
‘……첩자인가?’
어쩌면 그의 설계를 다른 나라의 간자가 몰래 빼돌렸을 수도 있다. 클레이모어의 역사에 그런 일은 드문 게 아니었다. 에드가는 그 자리에서 일단 스텔라의 개발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그 첩자를 어떻게 솎아 낼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