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39화
“선물은 그만 받고 싶은데……. 에드가, 너무 많이 받아서 이제는 기쁘지 않을 정도야. 신지도 못한 구두가 신발장에 오십 켤레나 쌓여 있다고.”
“지금 줄 건 기뻐하지 않고는 못 견딜 텐데?”
그는 미소를 지으며 보석 상자를 내밀었다. 방금까지 그녀에게 매달렸던 남자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뀌니까 더 헷갈려.’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루비카는 별 기대 없이 상자를 열었다. 무지막지하게 알 굵은 보석으로 장식한 목걸이나 반지가 있으려니 했다.
“어!”
그러나 상자에 있는 물건을 본 루비카는 눈을 크게 떴다. 곧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그 안에 든 보석은 그녀가 공작저에 들어온 뒤 본 보석에 비해 알도 작았고 색도 살짝 어두워서 질이 떨어져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보석보다 귀했다. 바로 어머니의 유품인 루비 장신구였다.
“이걸 어떻게…….”
“아카데미에 사람을 보내 찾아오라고 시켰지.”
에드가가 루비카의 곁에 살며시 다가와 허리에 손을 올렸다. 친밀한 접촉이었으나 그녀는 그를 밀치지 않았다. 역시 아까는 그가 너무 성급했다.
“너무 늦은 건 같지만 그때 일은 사과할게. 나는…… 몰랐어.”
루비카가 미소 지었다.
“알아. 그래서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는걸.”
“앞으로는 그러지 마.”
그의 푸른 눈과 마주치자 그녀는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찌릿했다. 그는 정말 위험한 남자였다. 그와 함께 있을 때마다 루비카는 이전에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을 맛봤다.
“화나는 일이 있으면 참지 마. 속상하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게 다 말해. 내가 다 들어줄게.”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루비카는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 위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안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충동에 못 이겨 그를 가지고 노는 듯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아.’
루비카는 장신구를 조심스레 만졌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과 달리 장신구는 공들여 닦은 듯 반질반질했다. 루비카는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내 어머니의 유품인 건 어떻게 알았어?”
에드가가 허에 찔린 표정을 지었다.
“당신 사촌인 안젤라에게 필요한 게 없는지 묻다가 알았어.”
안젤라가 먼저 말했을 리 없다. 그 자존심 높은 아이는 에드가가 물어본다고 해서 쉽게 알려 줄 타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골탕 먹이고 남았지.
“안젤라의 편지는 얼마 전에 겨우 도착했잖아. 시기적으로 말이 안 돼.”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가 짙어졌다.
젠장.
루비카의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답지 않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당신 삼촌 내외를 통해서 알게 됐어.”
“그분들은 몰라. 이게 내 어머니 유품인 줄.”
삼촌 내외는 그런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이게 어머니의 장신구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더 적극적으로 팔아먹었을 것이다. 그들은 진짜 귀족인 루비카의 어머니에 대해 묘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솔직히 말해 줘.”
에드가는 침묵했다. 루비카는 참을성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사이 에드가의 머릿속이 팽팽히 돌아갔다. 어디까지 밝히는 게 좋을까? 당신 하녀를 통해서 알았다고? 그럼 혹 서랍을 열어 봤냐고 물어볼 수 있다. 거짓말로 이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으나 그건 훗날 자신이 아르망이란 사실을 밝혔을 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날 경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약속할게.”
바로 대답이 나왔다. 붉은 갈색 눈이 그를 꿰뚫어 볼 듯 바라봤다.
“……당신 사촌 동생의 편지를 몰래 읽었어.”
“뭐라고?”
예상대로 그녀가 화를 냈다. 하지만 하녀를 구슬려 그녀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이 들키는 것보다 나을 듯싶었다.
“편지를 몰래 읽다니, 어떻게 그런 짓을!”
“경멸하지 않기로 했잖아.”
“나는 지금 경멸하는 게 아냐. 화를 내는 거야!”
말문이 막혔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그였다. 그의 논리적이고 차가운 말에 루비카는 입을 닫았다. 그러나 최근 말싸움에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그녀였다. 에드가는 예전처럼 그녀에게 무참한 말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냥 보여 달라고 했으면…….”
루비카는 뒷말을 황급히 삼켰다. 에드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갔다.
“안 보여 줬을 거지?”
“……응.”
그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부끄러운 내용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드가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루비카.”
에드가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겐 자격이 없다. 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는 명목 앞에 서면 한없이 약했다. 생쥐가 치즈 냄새에 끌리듯 앞뒤 생각 않고 일을 치고 말았다.
“왜 진작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어?”
“…….”
“편지를 몰래 읽은 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그걸 읽지 않았으면 나는 영원히 당신 어머니를 모욕한 놈으로 기억됐겠지.”
그의 목소리에 흐르는 비통함 때문인가. 잘못한 건 그인데 이상하게 루비카는 그에게 미안해졌다.
“힘들거나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제발 내게 도움을 청해. 나 당신 좋아하잖아. 좀 더 이용해. 당신한테 이용당할 기회를 좀 줘.”
“이용하라니……. 당신은 정말 이상해.”
이용하라 질 않나. 나중에 딴 남자한테 가도 좋으니 일단 자기랑 만나자고 하질 않나. 처음 만났던 그 고고한 공작님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루비카는 자신을 애절하게 보고 있는 그의 머릿결을 조심히 쓸었다. 칠흑 같은 머리는 꼭 벨벳같이 부드러웠다. 에드가는 그 손짓에서 그녀가 자신을 용서했음을 직감했다.
“루비카, 앞으로는…….”
“잠깐.”
그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찬찬히 그가 한 말을 되새기던 루비카의 눈이 가로로 길어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자꾸 힘든 일 있으면 말하라. 뭔가 도움이 필요하며 말하라고 계속 채근했지?”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거 안젤라의 편지에 나와 있던 아이작 일을 말한 거지?”
부정할 도리가 없다.
“응.”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안 하니까 화가 나서 물건을 마구잡이로 사들여서 괴롭힌 거고?”
“괴롭힌 건 아니…… 아앗.”
루비카가 가차 없이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인정해! 내가 지금 그 물건 때문에 얼마나 곤란한 줄 알아?”
루비카는 지금 돈을 마구잡이로 써 대는 공작을 말리는 부인으로 유명해졌다. 사치스럽다는 불명예를 얻는 일이 요원해지고 말았다. 태생부터 가진 놈이 저지르는 사치는 없는 자가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사치마저도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다니!
“인정하지.”
“이제 두 번 다시 화풀이로 당신 재산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건 못해.”
루비카가 귀를 세차게 잡아당겼지만 이번에 에드가는 입을 꾹 다물고 굴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가 났었지만 그녀를 위해 물건을 사는 재미에 그는 푹 빠졌기 때문이다.
“에드가, 귀 많이 아프지? 그러니까 그만 약속해.”
묵묵히 고개를 젓는 그도, 화를 내는 그녀도 입꼬리 끝은 하늘을 향해 활짝 올라가 있었다.
* * *
차 모임이 열리는 장소는 정원의 분수대 근처로 잡았다. 루비카는 세사르 경이 개발한 장미로 그곳을 꾸미기로 했다. 세사르 경은 그 사실에 퍽 만족스러워했다.
“제 장미를 대외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이런 멋진 행사를 잡으셨다니……. 부인, 정말 감동했습니다. 역시 제 연구의 위대함을 알아주시는 분은 부인뿐이시군요.”
루비카는 세사르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이어지는 그의 선언에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장미 이름을 ‘루비카’로 짓기로 했습니다.”
“그건 안 돼!”
장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짓겠다니…….
공작저 사람들의 취미는 그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일까? 루비카는 자신의 찬사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세사르 경을 간신히 설득했다.
장미는 클레이모어의 대표적인 성을 따 ‘테일러 장미’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무 사람이나 루비카의 이름을 막 부르는 게 싫었던 에드가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어쨌든 분수대와 테일러 장미는 무척 잘 어울렸다. 참석자의 취향에 맞춰 테이블을 배치하고 열심히 만든 테이블보와 냅킨으로 꾸몄다.
스티븐은 그동안 온갖 종류의 디저트를 쉴 새 없이 생산해 냈다. 처음에는 루비카에게 속아 넘어가 케이크를 만들었으나 그는 곧 그 일이 어떤 요리보다 그를 즐겁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입맛 까다로운 귀족이 자신의 디저트에 감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그는 테이블이 넘치게 접시를 놓았다.
“앤, 날씨가 참 화창해.”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결국 이날이 왔다. 제니는 이날을 위해 삼 일 전부터 루비카의 피부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2주간의 논의 끝에 화려한 장식 대신 테일러 장미로 머리를 꾸미기로 했다.
-아직은 공작저에서만 피는 꽃이잖아요. 어떤 보석보다 더 귀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에드가가 그간 사들인 화려한 목걸이와 부채, 양산은 제외시켰다. 하나씩 따지면 예쁜 것들이었으나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았다. 루비카는 부를 자랑하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보석으로 치장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대신 손님들이 쓸 식기에 공을 들였다.
“어머, 저건 탕트 백작 부인의 마차네요.”
저택에 속속들이 도착하는 낯선 마석 마차 중 하나를 가리키며 앤이 말했다. 듣던 대로 불타는 붉은 머리를 가진 중년의 여인이 소녀 둘과 마차에서 내렸다. 날 때부터 고위 귀족인 것 같은 당당한 태도였다.
“잘 할 수 있을까?”
불현듯 겁이 났다. 앤이 땀으로 축축한 루비카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고말고요. 최선을 다해 준비했잖아요.”
“만약 내가 실수라도 하면…….”
“그걸 기억하고 문제 삼는 사람은 각하께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질레한의 일을 모르는 루비카는 앤이 자신을 북돋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에드가를 떠올리니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녀는 정원이 바로 보이는 집무실 창을 향해 싱긋 웃었다. 얇은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탕트 백작 부인. 이쪽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십니다.”
루비카는 붉은 머리와 잘 어울리는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인을 향해 자연스레 웃었다. 백작 부인은 초대장의 부탁대로 얌전한 드레스를 입었는데 옐로 다이아몬드 수백 개가 달린 화려한 목걸이를 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과연 소문대로 센스가 뛰어났다.
“임신을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어찌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참, 이쪽은 제 딸인 가브리엘, 여기는 샤틀레 자작의 딸 타티아나입니다.”
에드가의 말대로 탕트 백작 부인은 말이 많았다. 루비카는 간신히 두 소녀에게 인사를 했다.
“반갑네, 샤틀레 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샤틀레 자작가에는 마석마차가 없기에 백작가가 자작 영애를 데려온 듯했다. 타티아나는 소문대로 성숙하고 화려한 느낌의 미인이었다. 백작 부인이 벌써 그녀를 며느릿감으로 찍어 두었다고 들었다.
“반갑네, 탕트 양.”
샤틀레 자작 영애 옆의 소녀에게 인사하려던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