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38화
장미에 잔뜩 정신이 팔린 그녀는 자신의 넋 나간 얼굴에 그의 턱이 덜덜 떨리는 것도 모르고 대답했다.
“응! 정말 너무 예뻐. 상상했던 것보다 더 예뻐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에드가는 내 눈엔 당신이 더 예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런 말을 하면 루비카는 기뻐하기보다 닭살 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식물학이나 전공할걸.”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만든 건 이 정도로 기뻐하지 않았잖아.”
생각지도 못한 투정에 루비카가 당황했다.
“아니, 그것도 기뻤어. 덕분에 눈이 침침해진 침모들도 더는 실 끼우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아도 됐잖아. 그거 심지어 요즘 ‘클레이모어의 실 끼우기’라는 이름으로 대유행 중이잖아.”
최근에는 수출까지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만든 건 아주 작은 물건도 사람을 환호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장미를 보고 웃는 것처럼 웃지 않았어.”
“내 미소가 뭐라고…….”
“전부지.”
루비카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정말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무슨 대륙 최고의 미녀라도 되는 듯 구는 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봐야 할 하인들의 피부 상태가 걱정될 정도였다.
“어쨌든 이 정도면 차 모임 장소를 꾸미는 데 적당하겠지?”
루비카는 방을 꼬박 다 채운 장미 화분을 둘러보았다.
“‘적당’이 아니라 너무 많은 수준인데……. 아, 참석한 분들에게 화분을 하나씩 선물해 주는 건 어떨까?”
루비카는 차 모임에서 리본 드레스를 소개할 예정이었다. 그게 카나의 드레스였으면 상관없었을 텐데 하필 자신이 디자인에 참여한 드레스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 때마다 나쁜 평을 들을까 속이 타들어 갔다. 이럴 때 불안을 달래기에 ‘뇌물’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루비카는 모임에 참석한 귀족들이 장미 화분을 받으면 기뻐하리라고 확신했다.
“당신 걸 왜 나눠 줘.”
하지만 남편이 협조하지 않았다. 에드가는 무척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쁜 건 많은 사람과 나눌수록 좋지. 선물 받은 분들도 이 예쁜 꽃을 두고두고 보면 좋겠어.”
“이건 당신 꽃이니까 보고 싶으면 클레이모어 저택에 와서 허락을 받고 보라고 해.”
“기껏 만든 꽃을 나만 보라니, 세사르 경은 동의 안 할걸.”
“거기서 세사르 경 이름이 왜 나와?”
루비카는 에드가의 미간에 진 주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사르 경의 이름이 왜 나오냐니, 이 장미를 개발한 사람이 그분이라서잖아.”
에드가는 한참 침묵했다.
‘다른 사람 나눠 주라고 세사르를 그렇게 재촉한 게 아니야!’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그리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세사르를 독촉해 댔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개발은 세사르 경이 했지만 투자는 클레이모어에서 했으니 그 정도 권리는 있다고 보는데.”
에드가 뒤에 있던 칼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루비카도 그 고갯짓에 동의했다. 이럴 때마다 그가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살아온 사람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루비카는 단호하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드가, 내 예산으로 처리한 일이니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내가 결정할 사안이야.”
부드러운 말로 설득하면 그는 어린애처럼 언제까지나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으려 든다. 오히려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납득하고 물러선다.
“……내가 지나쳤군.”
거봐. 이러니까 납득하잖아.
“칼, 내일 보석상을 다시 좀 불러 주겠나?”
“보석상 말씀이십니까?”
“그래. 부인에게 정도를 모르고 참견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다이아몬드 반지라도 선물해야…….”
“에드가!”
루비카가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잡았다.
“선물은 이제 그만해!”
“왜? 내 개인 재산으로 처리하는 일이니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내 마음이야.”
“아, 제발…….”
그녀가 애원하듯 두 손을 모으자 그의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 저런 단순한 손동작 하나에 마음이 풀리다니. 우습고 논리적으로 설명 안 될 일이지만 그랬다. 어쩌면 그는 그녀의 저 손동작 하나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어리광에 가까운 고집을 피운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싫다니 그만두지. 뭐, 화분을 선물하고 싶다면 해.”
그리고 그가 이만 화분을 온실로 옮길 것을 명했다.
“아, 잠시만.”
루비카는 화분을 들고 나가려는 시종 하나를 붙잡았다. 그녀는 바구니의 가위를 꺼내 재빨리 장미 몇 송이를 잘라 가까운 화병에 꽂았다. 다들 그녀가 침실에 장미를 장식하려는 줄 알았다.
“칼.”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도 칼에게 화병을 내밀었다. 칼은 매섭게 변한 에드가의 눈에 화병을 받는 걸 주저했다.
“마님, 이걸 왜 제게?”
“집무실에 있는 책상으로 옮겨 주겠어?”
“집무실이요?”
“거기는 왜?”
에드가의 어투는 퉁명스러웠으나 이미 눈은 초승달처럼 휘었다. 칼은 잽싸게 화병을 받았다.
“낮 동안 너무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 같아서 꽃향기나마 맡으면 좋잖아. ……책상 위에 화병을 두면 일하는 데 방해 될까?”
“방해는 무슨. 칼, 당장 그걸 책상 정중앙으로 옮겨 놔.”
‘책상 정중앙에 놓으면 확실히 방해입니다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킨 칼은 화병을 들고 시종들과 함께 떠났다.
“루비카.”
침실에 하인들이 모두 사라지자 에드가가 그녀를 낮은 음성으로 불렀다. 그의 눈동자 아래에서 새파란 불길이 일었다. 루비카는 마른 침을 삼키고 그를 바라봤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팔목에는 파랗게 핏줄이 서 있었다.
그의 눈에 일어난 불길 때문일까. 그녀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성은 그녀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경고음을 내고 있었으나 그녀의 손은 이미 그의 손에 올려진 후였다. 그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확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넓고 탄탄한 가슴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근육이 붙은 단단한 팔이 마치 가두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숨 막히게 그와 밀착되었으나 답답하기보다는 안정감을 느꼈다. 그가 이대로 영원히 자신을 안고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아는 한 이런 포옹은 더 이상 하면 안 된다. 이전에는 그가 지독히 상처받은 눈빛을 하기에 그 상처를 보듬고 싶어서 우정으로, 달래기 위해 했었다. 하지만 그가 진심인 걸 안 이상 그녀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습게 입이 조개처럼 꽉 다물려 거절의 말을 내뱉기를 거부했다. 두 팔이 그의 가슴을 밀기는커녕 그의 등을 더듬어 근육을 하나하나 확인하고자 했다.
에드가는 제 품에 안겨 떨고 있는 루비카를 바라봤다. 그녀가 자신을 생각해 장미꽃을 챙겨 주다니……. 발아래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겁먹은 듯 바라보는 루비카를 보자 그럴 수 없었다. 세상 두려울 것 없는 갑으로 살아온 그가 그녀 앞에만 서면 왜 이리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에드가, 나는…….”
“알아.”
그를 여전히 품에 안은 채 루비카가 속삭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그 말을 들으면 그녀를 놓아줘야겠지. 에드가는 그저 조금만 더 그녀를 안고 싶었다.
“알아? 아는데 이래?”
루비카는 자신의 타는 맘도 모르고 속삭이는 에드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백한 건 그인데 왜 자신이 이렇게 안달하는 걸까. 심지어 그는 무척 여유롭게 속삭이기까지 했다.
“갈아타면 안 돼? 사랑은 변하는 거라잖아.”
악마 같은 속삭임. 그는 그녀가 결국 자신을 좋아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더 기가 막히는 건 루비카가 그 말을 딱 잘라 부정하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갈아타긴 뭘 갈아타!”
결국 참지 못하고 루비카가 그를 밀어냈다. 에드가는 그녀의 그런 행동에도 화가 나기는커녕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건 다름 아닌 그 때문이었다. 물론 루비카의 마음을 꽉 틀어쥔 미래의 자신에게 질투가 나고 화나긴 했지만……. 그의 갖은 유혹에도 변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녀가 좋았다. 진실한 사랑을 비웃었던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세상엔 자신의 아버지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칼에게 아르망에 대한 걸 물어봤다면서?”
“그…… 당신에게서 한참 말이 없길래 물어봤어.”
루비카가 지레 찔려서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부탁했을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그가 고백하자 자신이 너무 잔인한 짓을 한 것 같아 미안했다.
“그 남자, 아카데미에 연락했을 때도 없다고 한 걸 봐서 당신에게 그간 거짓말을 한 것 같아. 그런 신의도 없는 놈한테 지조 지킬 필요 없어.”
“사정이, 아르망에겐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야.”
“하지만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잖아. 평생 그 남자 때문에 독수공방하고 살 거야?”
에드가의 말에 루비카의 눈빛이 짙어졌다. 정말 아르망을 평생 못 만나면 어쩌지?
‘……전에는 만날 수 있을 거라 확신했어.’
전쟁이 나면 휴의 수도원에서 결국 재회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루비카는 현재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 고심 중이었다. 하다못해 에드가라도 무사히 피신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심초사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운명이 바뀌면 아르망을 만날 수 있을까?
전쟁이 터지지 않는다면 아르망이 무슨 연유로 휴의 수도원에 올까? 그녀가 그를 만나기 위해 수도원에서 기다린다 해도 만남은 요원하다.
전에는 자신이 세상의 흐름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녀는 에드가처럼 똑똑하지도 능력이 출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안젤라의 삶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에드가를 구하고 싶었다.
“루비카, 그냥 지금은 나랑 행복하게 잘 살면 안 돼? 나랑 행복하게 잘 살다가 아르망도 만나면 되지!”
상념을 깨는 그의 말에 루비카는 입을 떡 벌렸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당신도 만나고 아르망도 만나라고?”
“그래.”
그가 초조하게 긍정했다.
“불륜을 권장하는 남편이라니…….”
“그 소린 아니야.”
“그게 그 소리지 무슨 소리야. 나보고 당신을 가지고 놀란 말이야? 에드가,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했던 말 잊었어? 당신 마음을 소중히 여겨!”
설사 합의된 관계라 할지라도 루비카는 장난삼아 사람을 만나고 즐기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런 관계에서 쾌락과 기쁨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함을 느꼈다.
“하.”
그의 입에서 탄식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라니. 이게 자신을 거절한 여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점을 사랑했고, 그 덕에 구원받았다. 게다가 그녀의 말을 잘 들어 보면 결국 그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다.
‘이런 말싸움은 소모적이야.’
아무래도 아르망에 대한 루비카의 믿음은 몇 마디 말로 무너질 만한 게 아닌 듯했다.
‘참 내, 얼마나 성실하게 굴었던 거야.’
투덜거렸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미쳐 있듯이 미래의 자신 역시 밤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굴었겠지. 자신과의 싸움은 원래 쉽지 않는 법이다.
“루비카, 줄 게 있어.”
그는 처음의 계획대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원래는 장미꽃에 감동한 틈을 타 선물을 건네고 그녀의 마음을 녹일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쓸데없이 그를 위해 장미꽃을 챙겼고, 화가 날 정도로 매혹적인 표정으로 품에 쏙 안기고는 못 견디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까의 해프닝은 다 그녀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