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37화
하지만 하녀들 중 아무도 이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하녀들은 카나가 설명해 준 리본과 관련된 크리스의 일화에 열을 올렸다.
“죽은 아내가 이런 걸 좋아해서 연구했다니 로맨틱해.”
“내 이름이 이본느인데!”
그들 중 누구도 마담 베리의 정체가 루비카일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공작 부인이라는 훌륭한 지위를 가진 여자가 옷을 디자인하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정말 예쁘니?”
“네, 마님과 무척 잘 어울려요. 특히 가슴의 리본 장식이 예뻐요.”
하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공작 부인인 그녀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일단 하녀는 마담 베리가 루비카인 줄 모른다.
공작 저택에 와서 내내 들었던 칭찬과는 다른 짜릿함이 루비카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발상으로 시작된 드레스를 보고 모두 감탄하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 이전의 봉사하던 삶과는 다른 유형의 보람이었다.
“앤이랑 엘리제를 불러 주겠니?”
하녀가 두 사람을 부르러 갔다. 많은 하녀들의 칭찬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루비카는 긴장했다. 카나가 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자신감이 넘쳤는데 거기에 ‘마담 베리’라는 자신의 이름이 섞이게 되자 어쩐지 혹평을 받을까 초조해졌다. 마음을 달랠 겸 폭 넓은 치마 아래에 숨겨진 발을 까닥거릴 때였다.
“마님?”
엘리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루비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인상 쓰면 안 돼!’
혹 자신의 초조한 표정 때문에 드레스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을까 두려워진 루비카는 최대한 미간의 주름을 펴고 활짝 웃었다.
“엘리제, 차 모임을 위해 준비한 드레스야.”
목소리가 떨려 어떠냐는 말까지 나오지 않았다. 엘리제는 문가에서 한참 가만히 있었다. 일 초가 일 년 같았다.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지금 루비카는 공작 부인이 아닌 자신의 디자인을 평가받기 위해 선 디자이너였다.
“아, 뭐라고 해야 할지…….”
색다른 디자인이어서 보수적인 그녀의 마음에 차지 않은 걸까 두려워하던 차에 한 톤 높은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어머, 마님! 그 드레스는 뭔가요? 독특하면서도 예쁘네요!”
앤이 망설임 없이 문을 지나 루비카에게 왔다. 그녀의 회색 눈이 한참 드레스에 관심 많은 사춘기 소녀처럼 반짝였다.
“차 모임을 위해서 디자인한 드레스야.”
“차 모임을 위해서요?”
“응, 이래 봬도 보석은 하나도 쓰지 않았어.”
앤이 연신 감탄을 내질렀다. 보석뿐만 아니라 옷 어디에서도 수공이 많이 들어가는 자수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보석과 자수를 잔뜩 쓴 드레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보석을 하나도 안 썼다니……, 신기하네요.”
어느새 엘리제가 곁에 다가왔다. 그녀는 소매와 가슴에 달린 리본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린 걸 보았을 때 다행히 드레스가 싫은 건 아닌 눈치였다.
“이건 리본이라고 해요.”
엘리제가 리본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카나가 눈치 좋게 설명했다.
“리본이요?”
“네, 드레스의 리본은 마담 베리의 아이디어로 달게 되었는데요. 그분이 크리스라는 선원을 만나서…….”
카나의 설명에 엘리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원래 사랑 이야기처럼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건 없다. 그건 시대를 뛰어넘는 불변의 법칙이다.
“멋지네요. 의미도 깊고, 보석을 안 썼는데도 이렇게 예쁘다니……. 꼭 차 모임을 위해 탄생한 드레스 같아요.”
정확히는 드레스를 위해 차 모임을 열기로 마음먹은 거지만, 엘리제의 칭찬에 루비카는 자신감을 얻었다. 루비카의 눈짓에 카나가 재빨리 두 벌의 드레스를 가지고 와 펼쳤다.
“다 같이 입었으면 해서 두 사람 것도 주문했어.”
짙은 녹색의 드레스와 로열블루 드레스 중 엘리제는 무엇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인지 바로 알아봤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입어도 괜찮아.”
루비카가 초조하게 말을 덧붙였다. 엘리제는 대시너 사건 이후 확연히 태도가 바뀌었으나 여전히 회색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루비카는 그런 엘리제에게 더는 화려한 옷을 권하지 않았다. 전에는 엘리제가 원하지 않음에도 입는 느낌이었으나 지금은 회색 드레스가 정말 좋아서 선택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예쁜 옷을 제가 안 입을 리가요.”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 같아서…….”
“아, 지금 입고 있는 옷처럼 수수하지 않아서요?”
루비카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엘리제가 웃었다.
“마님, 회색 드레스는 그냥 일하기 편해서 입는 거예요. 마님이 차 모임을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시는데 제가 회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지요. 앞으로 무도회나 파티가 열릴 때는 실용성과 상관없이 예쁜 옷을 입을 거예요.”
“이 드레스는 지금껏 유행했던 드레스들과 달라서…… 어쩌면 안 좋은 소리를 들을지도 몰라.”
입어 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루비카는 말하면서도 스스로 모순을 느꼈다. 자신에게 디자인 북을 내밀 때마다 카나가 왜 그리 긴장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안 좋은 소리라니요. 다들 어느 의상실에서 맞췄는지 알려 달라고 성화일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님.”
“그럼요. 이런 옷을 보고 혹평을 한다면 그 사람은 눈을 다친 게 틀림없으니 의사를 찾아가라고 하세요.”
옆에 있는 하녀들까지 아우성이었다. 루비카는 가슴에 손을 올려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꾹꾹 눌렀다.
“그렇게…… 괜찮아?”
엘리제뿐만 아니라 앤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앤도 짙은 청록색의 드레스를 보자마자 그것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옷임을 알았다. 다른 두 드레스와 달리 리본 색상이 통일되어 있는 그 옷은 점잖으면서도 고상한 매력을 풍겼다.
“그럼, 사이즈가 적당한지, 혹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제가 체크할 수 있도록 두 분 입어 보실 수 있을까요?”
카나의 말에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루비카는 드레스를 다 입은 둘의 모습에 탄성을 내질렀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장면이 실제로 펼쳐졌다. 가슴이 벅차올라 뭉클했다.
“어머, 세상에 앤. 몰라보겠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침모장인 로사가 문 앞에서 소리쳤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시녀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석에서 하듯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로사, 부끄럽게.”
앤은 호들갑을 떠는 로사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훨씬 예쁜 마님과 엘리제를 두고 그런 말 하지 마.”
“어머! 마님.”
로사는 그제야 루비카를 발견한 듯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여신 같아요.”
이번엔 루비카가 부끄러운 미소를 지을 차례였다. 로사는 카나를 붙잡고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녀의 질문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더 전문적이고 날카로웠다.
“가슴의 저 장식이 독특하네요. 마담, 대체 이건 어떤 식으로 묶은 거죠?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죠?”
“이 장식은 실은 제가 낸 아이디어가 아니랍니다. 마담 베리라는 분이…….”
침모장 로사가 설명을 듣고 눈을 반짝거릴수록 루비카의 볼이 화끈거렸다. 눈앞에서 꾸며낸 자신의 이야기와 칭찬을 동시에 듣는 건 꽤 적응하기 힘든 일이었다.
“선원이 만든 매듭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니 보통 눈썰미가 아닌 것 같네요. 그 마담 베리라는 분은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침모장은 역시 남달랐다. 그녀는 크리스와 이본느의 사랑 이야기보다 디자이너인 마담 베리에 더 관심을 보였다.
“마담 베리는 사람 만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아요.”
“이런 멋진 아이디어를 낸 분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하네요. 마담, 나중에라도 기회가 된다면…….”
“로사!”
결국 루비카가 참지 못하고 로사를 불렀다.
“앤에게 같은 색깔 천을 사용한 모자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거기에 클레이모어 문양을 수놓고 싶어. 시간이 괜찮을까?”
“전체 다요? 아니면 포인트만 주실 건가요?”
역시 천성이 침모장이였다. 그러니 마담 베리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거겠지.
“전체 다.”
로사의 혼을 쏙 빼놓으려면 그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예상대로 로사는 토끼 눈을 떴다.
“모자 만드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일정이 꽤 촉박하네요.”
곧 마담 베리는 로사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루비카는 카나와 함께 세 사람의 머리에는 어떤 장식이 어울릴지, 장갑에 자수를 넣는 게 좋을지 논의하는 로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차 모임 전까지 마담 베리가 사람들 앞에 못 나서는 이유를 마련해 둬야 할 것 같네.’
하지만 그런 걱정도 거울 속에 비친 아름다운 드레스를 보자마자 모두 날아갔다. 그녀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된 드레스는 엘리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어울렸다. 색과 소재를 바꾼 것만으로도 드레스는 팔색조처럼 점잖게도 화려하게도 변했다.
‘아, 왜 이리 떨리지.’
엘리제와 앤만 좋아하면 안심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좋은 반응에 오히려 더 떨리고 걱정되었다. 만약 다른 귀부인들이 드레스를 보고 너무 튄다거나 촌스럽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두 사람을 이상한 일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 이제 와 덜컥 겁이 났다.
“저기, 옷이 마음에 안 들면 차 모임 때 억지로 입지 않아도 돼.”
“마음에 안 들긴요. 저, 꼭 입을 거예요. 이렇게 예쁜 옷은 처음이에요. 천으로만 봤을 때도 고급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드레스로 입으니까 더 예뻐요. 마님께서 입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섭섭할 거예요.”
엘리제의 단호한 말과 앤의 끄덕임에 루비카는 숨을 겨우 뱉었다. 그녀가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외쳐도 이젠 엘리제와 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심지어 로사마저도 드레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으니까.
‘으아, 이제 정말 어쩌지?’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루비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차 모임을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 * *
이제 슬슬 선물의 레퍼토리가 떨어질 때도 됐다. 루비카는 깨끗한 침실을 보며 안심했다.
‘참, 세상에 사치품이 그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어.’
그녀는 진주가 촘촘히 박힌 슬리퍼를 내려다보며 한숨 쉬었다. 이 슬리퍼도 에드가가 구두 장인을 불러 마음대로 주문한 물건 중 하나였다. 돈 많은 귀족이 제대로 돈을 쓰겠다고 마음먹으니 저 같은 서민은 따라잡지도 못할 정도로 사치를 부렸다. 자칼 은행으로 옮긴 그의 개인 재산이 반은 남아 있는 걸까?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에드가가 자신에게 돈을 그만 썼으면 좋겠다.
“마님,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들어오라고 해.”
또 상인을 주렁주렁 매달고 오진 않겠지. 루비카는 여상히 대답했다. 그러나 에드가는 상인 대신 시종을 잔뜩 데리고 들어왔다.
“세상에!”
시종이 한가득 안고 온 화분을 본 루비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화분에 가득 핀 꽃은 언젠가 세사르가 루비카에게 호언장담했던 장미였다. 꽃의 중심은 눈처럼 새하얗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피처럼 붉어지는 장미는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 크기는 어찌나 큰지 일반 장미의 두 배쯤 되어 보였다.
“꽃이 나오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되는 줄 알았는데…….”
감동으로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루비카는 장미가 시들까 차마 꽃잎을 건드리지 못하고 근처의 잎만 떨리는 손으로 슬쩍 건드렸다. 그러자 흔들리는 꽃 사이에서 짙은 향내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향기조차 다른 장미보다 월등히 좋았다.
“마음에 들어?”
에드가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