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34화
당장에라도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백까지 했는데 분위기를 타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었다. 그는 이제 겨우 그녀를 독니로 물었다. 통째로 삼키기 위해서는 그녀의 온몸에 독이 퍼지길 기다려야 한다.
“날 ‘연애 대상’으로 좀 생각해 줘. 응? 가능성이라도 열어 둬.”
그가 조심스레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발그레해진 그녀의 볼에서 그는 가능성을 보았다.
‘초조해하지 말자.’
아르망을 사랑했듯이 그녀는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다만 자신이 아르망이니까 자신을 사랑하는 그녀가 아니라, 지금 눈앞의 에드가를 사랑하는 그녀를 원했다.
“에드가.”
루비카가 다 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에드가는 큰 손으로 루비카의 양 볼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다가갔다. 루비카는 어쩔 줄 몰라 하다 결국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녀의 이마에 따스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잘 자, 내 사랑.”
짧은 굿나잇 키스를 할 때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제 자신이 혼란스러웠던 만큼 그녀가 혼란스러워할 때가 되었다. 그는 매혹적인 미소만을 남긴 채 침실을 떠났다.
* * *
갑작스러운 에드가의 고백에 누구보다 놀란 건 루비카였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 중 클레이모어 공작인 에드가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하지? 아, 그의 맘에 들 만한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를 밀어내지 않은 자신이었다. 이런 일은 겪어 본 적이 있어야지. 그녀는 그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도 짐작할 수 없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루비카는 곧 그 일에 대해서 더 생각할 수 없이 바빠졌다. 차 모임에 참석을 알리는 답장이 속속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참석자 명단에 따라 자리 배치를 하는 일만 해도 보통이 아니었다.
“마님, 편지가 왔습니다.”
겨우 마음에 드는 배치를 끝냈을 때 칼이 그녀를 불렀다. 이 귀찮은 일을 다시 하란 말인가. 울상이 되어 편지를 받은 루비카는 겉봉투의 이름을 보는 순간 환히 웃었다.
“안젤라!”
편지는 얼마나 긴 여행을 했는지 봉투가 너덜댔다. 어찌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봉투 안에는 자그마치 스무 장이나 되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루비카는 망설임 없이 편지를 읽었다.
「언니! 입학시험을 통과하자마자 편지 써.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좀 아슬아슬한 성적이지만 통과했어. 아직은 하위권이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꼭 수석을 할 거야.」
그리고 안젤라는 아카데미까지 가는 긴 여정 동안의 경험을 상세히 풀어 썼다. 다양한 나라를 거치고 많은 사람을 만난 그녀의 경험담에 루비카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도착해서 아이작 오빠를 만나려 했는데 날 피하는 건지 볼 수가 없어. 엄마는 오빠가 아카데미에서 엄청난 학생으로 칭찬이 자자하다고 했는데 어쩐지 반대 의미로 엄청난 학생인 것 같아. 교수님들이 나 보고 ‘아이작과 달리 성실하구나.’란 소리를 자꾸 해.」
아이작의 대목에서는 마음이 덜컥했다. 편지에는 일단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진상을 알아볼 테니걱정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아이작이 공부를 포기하고 빨리 아카데미를 나오는 게 모두를 위하는 일이야.’
그리고 그다음 내용은 루비카의 얼굴에 빛이 서릴 만한 것이었다. 다음 학기에는 전공을 결정하기 때문에 특별히 그 전에 긴 방학이 주어지는데, 그때 루비카를 만나러 가도 되냐는 내용이었다.
“마님, 많이 기뻐 보입니다. 좋은 소식이 가득 적혀 있나 보군요.”
“안젤라가 입학시험에 통과했대. 그리고 재미있는 친구도 많이 사귄 것 같아. 어떤 나라는 여왕이 다스리는데 여자도 관리가 될 수 있다고. 나중에 함께 가고 싶다고 했어.”
“역시 똑똑하신 분이군요. 곧 학기가 시작할 텐데 클레이모어 이름으로 책과 필기구 몇 개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학기가 되기 전에 여기에 들리고 싶다는데…….”
“언제든 안젤라 님이 원하실 때 클레이모어 저택에 오실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손님방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즉각 대답이 나왔다. 루비카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빙그레 미소 지었다. 벌써부터 안젤라가 그리웠다. 오게 된다면 뭘 입히고, 뭘 먹이는 게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그날이 기대되었다.
“그 외에 혹 지시하실 사항은 없습니까?”
편지의 내용 중 아이작에 대한 것이 걸렸다. 하지만 이런 일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쩐지 염치없게 느껴졌다. 그 일은 그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아니, 아…….”
“지시하실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루비카는 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칼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아카데미 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어. 전에 에드가에게 사람을 한 명 찾아 달라고 부탁한 적 있어. 아마 집사에게 지시를 내렸을 텐데…….”
“아.”
감탄사를 내뱉고 칼은 후회했다. 평정을 가장하고 모른 척하거나 각하께 물어보라고 했어야 했다. 하지만 방금 반응으로 뭔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루비카에게 들키고 말았다.
“금방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한 것치곤 소식이 없어서 궁금했어. 칼, 아는 게 있다면 이야기해 줘.”
모른다고 말하면 그는 물론이고 에드가에 대한 신뢰마저 바닥날 위기였다. 칼은 루비카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공작 각하는 마님의 마음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겠다고 하셨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피 말린다. 지름길이 있는데 왜 그리 멀리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에드가는 아르망을 가리켜 용기 없는 멍청한 놈이라고 했지만 칼이 보기엔 피장파장이었다. 하지만 에드가의 성격을 보았을 때 설득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님이 먼저 깨닫게 된다면?’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나 힌트쯤은 줘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사랑이 이루어지면 마님에게도 좋은 일이 아닌가. 언젠가 각하 또한 그러지 않았나.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마. 루비카를 중심으로 생각해.
마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하루빨리 마님이 찾는 그 아르망이 바로 각하라는 사실을 아는 게 낫다. 그러니 이건 공작 각하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그의 명령에 따르는 일이다.
“아론의 아카데미에 연락해 본 결과 아르망이란 이름을 가진 눈 먼 사내는 졸업생 중 없었습니다.”
“아…….”
“실망하실까 봐 각하께서 차마 전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루비카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침묵한 후 칼이 진지하게 말했다.
“마님, 문득 궁금해서 그러는데 말입니다.”
“무슨 일인가?”
“각하의 풀 네임을 기억하십니까?”
“풀 네임? 에드가 테일러 클레이드 윈드모어.”
칼은 그것 말고 진짜 공작의 풀 네임에 대해서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거기까지 언급했다가는 공작에게 경을 치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설마 그 종이 서너 페이지는 거뜬해 보였던 풀 네임 말하는 건가?”
다행히 똑똑한 마님은 금방 그가 원하는 대답을 찾았다. 칼은 활짝 웃었다.
“나중에라도 시간 나시면 한번 봐 주십시오. 클레이모어의 역사가 담긴 이름입니다.”
칼은 곧 에드가에게 ‘차’를 대접할 시간이라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
“편지는 잘 전했나?”
칼이 집무실에 들자마자 에드가가 황급히 질문했다.
“네.”
“별 소리는 안 했고? 필적이 이상하다거나 편지지가 어색하게 마모된 것 같다거나.”
“전혀, 편지를 받고 기뻐하시기만 하셨습니다.”
“다행이군.”
사실 루비카가 받은 편지는 교묘한 복사본으로 진짜는 에드가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안젤라의 편지를 먼저 몰래 읽은 에드가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안젤라는 열 줄에 한 번 꼴로 공작이 루비카를 학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계속 물었다.
「공작이 언니를 무시하고 그러면 참지 말고 화내야 해.」
「힘들면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나한테라도 말해, 언니. 내가 바로 공작가로 갈게.」
거기에 ‘아카데미에서 에드가가 똑똑하긴 했지만 오만하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 유명하다.’는 소식까지 전했다. 그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동급생이 삼 년을 내리 낙방한 시험에 대해 ‘뭐가 어렵지? 한 달만 공부하면 충분할 텐데.’라고 말한 사건까지 편지에 다 적어 놓았다.
「잘생기긴 했지만 성깔이 있어 보이더니 세상에 그런 성격파탄자일 줄이야. 언니, 조금만 참아. 나 열심히 공부할게. 그리고 꼭 성공해서 언니가 공작가에서 나오면 내가 먹여 살릴게.」
그 문장에 에드가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편지를 전문적으로 위조하는 사람을 불렀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모두 빼고 편지를 다시 쓰도록.
위조범의 솜씨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오랜 시간 배편을 통해 온 편지 봉투의 닳음조차도 완벽하게 구현했다.
―안젤라 님께서 공작저에 오시면 결국 들통나지 않을까요?
복제 편지를 받은 칼의 지적에 에드가는 한참 침묵했다.
―그 전에 우리 편으로 만들지. 내 이름으로 아론에 선물이랑 용돈도 두둑이 보내. 아, 하녀랑 호위 기사도 보내도록 하지. 공작가 친척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
칼은 안젤라가 돈에 현혹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삼켰다. 어차피 공작의 귀에 경 읽기다. 그는 대신 최대한 각하에 대해서 좋은 말과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는 하녀를 보내겠다고 대답했다.
다행히 루비카는 전달받은 편지가 가짜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편지를 읽고 뭔가 부탁은 하지 않았나?”
“아무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에드가가 테이블 위에 놓인 진짜 안젤라의 편지를 내려다봤다. 루비카에게 간 것은 스무 장이었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버전은 서른 장 정도였다. 즉 열 장 정도는 에드가에 대한 욕이었다.
“아이작과 관련되어서 적어도 알아봐 달란 소리 정도는 했어야 하는데.”
그 말썽꾸러기에 대해서는 이미 정보를 다 입수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바로 조치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가족의 일이니 제게 말하기 민망하신 게 아닐까요?”
“하긴 좋은 일도 아니고…….”
“각하께 직접 말씀하시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에드가의 미간 주름이 조금 펴졌다. 칼이 맞다. 그런 민감한 일을 어찌 집사에게 말하겠는가. 적어도 남편 정도는 되어야 말할 수 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해.’
루비카는 자기 입으로 자신이 천애 고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가족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멀리 있는 안젤라와 자신뿐이다. 그녀가 힘들고 기대고 싶을 때 그가 아니면 누구에게 기대랴.
그녀가 고통을 토로한다면 에드가는 어떤 고민이든 다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참, 각하. 전부터 궁금했습니다만 요즘 뭘 만드시고 계신 겁니까?”
테이블 어디에도 설계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철사와 나무 조각, 톱밥으로 어지러웠다. 에드가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로 끝이다.”
“끝…… 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