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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33화 (133/212)

# 13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33화

본관에 돌아와서 루비카는 시종에게 그게 무슨 소리였냐고 물었으나 다들 애매한 웃음만 지으며 별일 아니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에드가의 뜨끔한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그때 다친 것 같았다.

“매일 펜으로 글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해.”

걱정스런 마음에 루비카가 다가가 에드가의 오른손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에드가가 휙 손을 뺐다.

‘응?’

그로선 드문 일이었다. 루비카는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아, 아픈 팔을 잡으려 해서 그런 건가?’

상처를 자세히 살피고자 한 행동이었지만 에드가는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낄 수 있겠다 싶었다. 일단 그를 의자에 앉힌 뒤 상처를 보여 달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일단 자리에 앉아 봐.”

그렇게 말하며 루비카가 그의 왼손을 잡으려 하는 순간, 에드가가 또 잽싸게 손을 뺐다. 그리고 어색한 걸음걸이로 테이블 옆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루비카는 멍하니 그의 그런 행동을 바라보았다.

‘왜 저러지?’

가슴 한쪽이 콕콕 아팠다. 그는 애정 결핍 때문인지 뭔지 그녀와 닿지 못해 안달 난 남자였다. 틈만 나면 키스해 달라 상으로 포옹해 달라 아주 난리였다. 갑작스럽게 왜 저러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연, 우연일 거야.’

루비카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에드가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러자 에드가가 시선을 피했다. 그에 갑작스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런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친절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걱정돼서 그러는데 상처를 좀 볼 수 있을까?”

“주치의가 이미 봤으니까 괜찮아.”

그가 딱 잘라 거절했다. 여전히 시선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

이걸로 확실해졌다. 우연이 아니다. 그는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그래.”

루비카가 우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쯤이면 에드가가 무슨 속상한 일이 있냐고 물을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동안 실컷 다정한 연인처럼 굴더니 이제 질린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슬퍼졌다.

‘미치겠군.’

그러나 루비카의 상상과 달리 에드가는 다른 이유로 그녀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간밤에 목격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두운 촛불 아래 차마 묘사하기도 망측한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었던 그녀, 그리고 실수로 그의 손가락에 닿았던 지나치게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가 몰렸다. 그는 지금 필사적으로 자신을 제어하는 중이었다.

“엘리제, 이제 초대장을 정리해서 편지를 부치는 하인에게 전달하자.”

“네.”

루비카는 자신의 행동이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애쓰며 편지를 정리했다. 에드가가 거리별로 분류해 놓은 편지 중 하나를 집었다.

“스테판?”

“스테판 경도 차 모임에 초대하려고 해. 괜찮지?”

초대할 귀족에 대해서는 따로 조언을 얻었지만 기사단은 어차피 클레이모어가 내 사람이고 하니 따로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그놈은 왜 초대해?”

에드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왜냐니…….”

루비카가 뭐라 말을 하기 전 에드가가 다른 초대장을 더 끄집어냈다. 이놈도, 저놈도 전부다.

“잘생긴 놈들이네.”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는 만족 안 돼?”

루비카는 에드가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에드가는 그녀의 그런 태도에 더 화가 났다. 그녀가 예쁜 것을 좋아하는 건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연히 남편이 있는데 외간 남자를 초대하다니. 자신은 대륙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다. 거기에 그녀가 그토록 찾던 아르망이다. 왜 바로 옆에 님을 두고 다른 데서 뽕을 따려 하나.

“아하하하하하.”

갑자기 루비카가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웃지 마. 난 진지해.”

그렇게 말하니 더 웃겼다. 방금까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해 놓고 이렇게 나오다니. 사람 헷갈리게 하는 데는 선수다.

“하하핫, 에드가, 아니야. 하하하. 그게 아니야.”

설명해야 하는데 웃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에드가의 얼굴은 험악해졌다.

“아니긴! 오늘만 해도 연무장을 시찰하고 싶다기에 영지 일 때문에 그런가 했더니, 기사들 얼굴 보기 바빴잖아. 쌍안경으로 몰래 훔쳐본 거 다 알고 있어. 시, 심지어 스테판을 향해 웃어 주기까지 했잖아.”

갑자기 스테판 경을 부른 건 그 일 때문이었단 말이야? 뭐야, 그럼 갑자기 들린 소리랑 저 붕대는……?

더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루비카는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음 같아서야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에드가가 자신의 얼굴을 하루 종일 보지 않으려 들 것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주변의 시녀와 하녀들도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에드가, 그게 아니야. 이 사람들을 초대한 건 함께 초대하는 다른 아가씨들 때문이야. 절대 내 눈요기 때문에 초대하는 게 아니라고.”

루비카는 ‘눈요기’라는 표현을 쓰고 아차 했다. 이제 그녀가 얼굴을 밝히는 걸 사람들이 다 알게 됐다. 지난 삶에서는 한 번도 들통난 적이 없었는데…….

“아니라고?”

하지만 진지하기 짝이 없는 에드가의 표정을 보자 그런 걱정은 넣어 두기로 했다. 지금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그런 점 따위는 기억할 거리도 아니었다. 똑똑하기 짝이 없는 공작의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멍청이 같은 행동이 두고두고 기억되겠지.

‘아, 이런 보물 같은 남자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지는 건 좀 아까운데.’

루비카는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함께 웃음거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옆에 이렇게 훌륭한 눈요깃거리가 있는데 내가 왜 딴 데 한눈을 팔아.”

그녀의 바보 같은 남편은 그 말에 웃었다.

“그렇지?”

눈요깃거리가 되어서 기쁘단다.

이래서는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그의 이미지만 더 추락할 뿐이었다.

“그래.”

반쯤 포기하는 기분이 되어 수긍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진 에드가가 초대장을 정리하는 걸 도와줬다. 그러다 서로의 손가락 끝이 또 스치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자리에 일어섰다.

“먼저 식당에 가지.”

그리고 사라지다시피 뛰어갔다.

“각하께서 왜 저러시지?”

“글쎄.”

눈요기 취급에 좋아하는 걸 봐서 그녀에게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후로도 에드가는 루비카와 몸이 닿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고 더는 닿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다.

‘대체 왜 그러지?’

그가 어제 자신의 잠옷 차림을 봤다는 사실을 모르는 루비카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와 접촉하지 않는 건 바라는 바였으나 눈까지 맞추지 않는 상황은 바라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참기만 하는 건 루비카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참고 또 인내하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는 믿음을 그녀는 진작에 버렸다. 그런 건 동화에나 있는 일이다. 불만을 꾹 참으면 불만이 없는 줄 알았고, 인내하면 호구 취급을 당하는 게 그녀가 겪은 현실이었다.

“에드가, 나한테 화났어?”

침실에 단둘이 남자마자 루비카가 물었다. 평소와 달리 그녀의 곁이 아닌 멀찍이 떨어진 벽난로 옆 소파에 앉은 에드가가 그 말에 두 눈을 깜박였다.

“화라니?”

정말 황당하다는 듯이 그가 반문했다. 여전히 벨벳처럼 짙고 아름다운 속눈썹 아래 푸른 눈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화난 것 같은데…….”

“아니야.”

“그럼 왜 자꾸 시선을 피해?”

그 말에 에드가가 발끈 화가 나 루비카를 똑바로 바라봤다. 치켜뜬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꼭 델 것 같아 루비카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잠자는 맹수를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왜 자꾸 시선을 피하냐고?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지.”

그가 의자 손잡이를 꽉 틀어쥐었다. 화가 단단히 났다는 뜻이다. 이유를 모르는 루비카는 당혹스럽기만 했다.

“사람을 있는 대로 유혹해 놓고 이렇게 나오다니…….”

“유혹?”

“어제 그 옷은 왜 입었어?”

그가 도전적으로 질문했다.

“그 옷……. 아!”

순간 루비카는 그가 무얼 지칭하는지 깨달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잘 익은 홍당무처럼 변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 잠옷을 에드가가 봤단 말이야?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민망했다. 자신이 그런 옷을 입어야 하는 게 우스울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이 남자가 봤단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여기는 그녀의 방이다. 뛰어나가 봤자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 꼴을 당신이 보다니.”

“그 꼴이라니? 엄청 예뻤는데…….”

“뭐?”

촛불의 희미한 빛 아래 에드가의 푸른 눈이 번쩍였다. 루비카는 등이 긴장으로 굳는 걸 느꼈다. 그에게서 지독히도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왜 입었어?”

만약 그녀가 정말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서 입은 거라면 그는 망설이지 않을 예정이다.

“그, 그게…… 그날 앤이 부탁했어.”

“하.”

웃음 같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그가 머리를 헝클어뜨릴 차례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앤은 하지 않아도 될 참견을 하는 게 특기이다.

“시녀장을 갈아 버려야지.”

“앤은 나쁜 뜻은 없었어. 그녀는 나름대로 생각해서 한 일이야.”

그의 말에 루비카가 펄쩍 놀라 두둔했다. 에드가는 소파에서 물끄러미 루비카를 바라봤다.

‘둔하다.’

둔해도 너무 둔하다. 그녀는 지금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겠지.

‘하긴 눈 먼 놈이 손을 더듬어서 꽃다발을 만들어 온 것도 그냥 우정으로 한 일인 줄 아는 여자니.’

그리고 멍청한 자신은 그녀에게 고백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그녀를 좋아하는 건 온 저택 사람들이 다 안다. 심지어 저택에서 키우는 개조차도 알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유혹이니, 엄청 예뻤느니 같은 소리로 힌트를 줘도 영 딴소리를 했다.

“루비카.”

에드가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떠올랐다. 루비카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어쩐지 그가 무척 사악한 말로 자신을 뒤흔들 것 같았다.

“고백할 게 있어.”

예전에 그는 칼에게 호언장담했다. 루비카가 그를 좋아하는 걸 알면 그는 바보 멍청이처럼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그녀가 좋아하는 아르망은 바로 그다.

에드가는 미래의 자신처럼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바보 같이 고백도 못하는 놈이 되고 싶지 않았다.

“고백?”

“말하지 않으면 당신이 눈치를 못 챌 것 같아서 해야겠어.”

루비카는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영 모르겠다는 듯 루비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지금은 거절하겠지.’

그리고 나중에 그녀는 이불을 발로 뻥뻥 찰 것이다. 에드가는 기꺼이 차여 주기로 했다. 할 수 있다면 슬픈 척 연기도 해야지.

“좋아해.”

그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없는지 루비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정의 의미가 아니야. 남자로서 당신을 좋아해.”

그녀가 그의 말을 멋대로 해석하기 전 그가 쐐기를 박았다.

“마, 말도 안 돼.”

“남편이 부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 되는 소리가 세상에 또 없지.”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알아. 그 소리는 지겹게 들었어.”

루비카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사정을 다 알면서 자신을 좋아한다고? 심지어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놀리는 거 아니지?”

“난 그런 농담 안 해.”

“하지만…….”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혹 그녀가 자신에게서 달아날까 두려웠지만 에드가는 지금이 유혹해야 할 때임을 알았다.

“루비카.”

그녀는 그가 머리를 쓰다듬는 걸 막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 도망치는 것조차 잊었을지도 모른다.

“좋아해. 당신을 볼 때마다 그 잠옷을 입은 모습이 아른거려서 시선을 피했어. 손가락이 스치기만 해도…….”

실수로 그녀의 몸을 만진 이야기까지는 할 수 없다. 에드가는 더운 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나랑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야. 내게 기회를 주겠어?”

“기회?”

자신이 내뱉은 말을 따라 하는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보며 에드가는 씁쓸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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