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32화
부인이 자기 기사단에게 보내는 미소조차 이제 넘어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괜히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어떤 꼬투리가 잡힐지 모른다. 스테판은 서둘러 본관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경, 나도 이만 물러나지. 연습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루비카가 또 싱긋 웃었다. 또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아주 미세해서 스테판만 눈치챘다.
‘하, 웃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는 연무장에서 가장 선임자인 부하에게 훈련을 맡기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엘리제, 우리도 이만 자리를 정리할까?”
“네.”
루비카는 스테판 경도 자리를 떠났는데 계속 있어 봤자 불청객 취급을 받을 것 같아 말했다. 엘리제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녀들과 함께 파라솔을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파라솔은 설치하기는 쉬웠는데 치우는 건 어려웠다. 파라솔이 잘 접히지 않아 끙끙 애를 쓸 때였다.
“제,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까부터 엘리제를 힐끔힐끔 쳐다봤던 대시너가 툭 튀어나와 말했다. 스테판 경이 있다면 부인에게 말을 거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작의 부름을 받아 자리를 떴다. 대시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비록 얼굴은 붉고 땀은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어머, 멧돼지 씨.’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싶었던 저돌적인 남자가 나타났다. 얼굴은 그럭저럭 생겼지만 몸은 봐 줄 만했다. 루비카는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기기로 했다.
“그래 주면 고맙지.”
대시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금세 큰 손으로 파라솔을 휙휙 정리했다. 여자 셋이 붙어도 접혀지지 않았던 파라솔을 그는 한 번에 접었다. 그리고 파라솔이 다시 펴지지 않도록 노끈으로 꼼꼼히 감았다.
“감사합니다.”
엘리제가 여상히 말하고 파라솔을 받으려 할 때였다.
“시녀님!”
멧돼지 씨가 결국 용기를 냈다. 루비카와 하녀들은 흥미진진하게 대시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아, 하녀들은 탄식했다. 이왕 용기를 낸 김에 아직은 멀었지만 무도회에서 같이 춤을 춰 주지 않겠느냐 같은 말을 하지 저런 멋없는 말을 하다니. 여자들의 평은 그랬지만 연무장의 기사들은 그가 정말 대단하다 여겼는지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부는 자도 있었다.
‘엘리제가 뭐라고 대꾸하려나. 역시 부끄러워하겠지.’
엘리제는 예쁘지만 아직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처럼 무도회에서 댄스 신청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루비카는 이 일로 엘리제가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저는 마님을 시중들고 있습니다. 공무 중에 사적인 말은 걸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엘리제는 평소에는 시켜야 간신히 하던 도도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대시너의 용기를 단칼에 잘라 버렸다. 찬바람이 냉랭히 흐르다 못해 얼음이 얼 지경이었다.
“우, 우와.”
지켜보던 기사들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시너는 이제 불타오르는 멧돼지가 됐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기사들 속으로 줄행랑을 쳤다. 엘리제는 주위 기사들의 수군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비카에게 말을 걸었다.
“마님, 햇빛에 오래 계셔서 피곤하시지요. 빨리 돌아가요.”
“그, 그래.”
루비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루비카나 하녀들이 예쁘다고 하면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엘리제는 낯선 기사의 말에 전혀 수줍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나빠 보였다.
* * *
루비카는 초대할 사람에게 어울리는 잉크로 초대장을 쓰며 엘리제를 슬쩍 보았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다 쓴 초대장을 봉투에 넣고 밀랍을 녹여 봉하고 있었다. 무척 집중한 듯했는데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저기, 엘리제.”
“네?”
“아까 연무장에서 기분 많이 나빴어?”
엘리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사님은 널 칭찬한 건데…… 어디가 기분 나쁜 거였지.”
안타까운 마음에 루비카가 중얼거리는 듯 말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는 엘리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루비카는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들으면 엘리제가 자신감을 회복할 거라 믿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효과를 봤다. 하지만 엘리제는 겨우 자신이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받아들인 정도였다.
“왜 기분 나빴냐면요.”
“응.”
“그 기사님, 예전에 저 보고 못생겼다고 하신 분이에요.”
엘리제가 봉투 위에 떨어뜨린 빨간 밀랍 위에 클레이모어 문장이 들어간 도장을 꾸욱 눌렀다. 아까보다 확연히 힘이 더 들어간 동작이었다.
“뭐라고?”
그 멧돼지가 진흙 속의 진주도 못 알아보고 그런 망발을 지껄였단 말이지? 이번엔 루비카가 화를 냈다.
“절 기억도 못하고 마님도 뻔히 계시는 앞에서 그런 수작을 벌이니 화가 나더군요. 상사가 있는 앞에서는 입도 뻥긋 못하던 주제에. 스테판 경보다 마님이 훨씬 더 높은 분인데.”
“당장 네 앞에 불러서 사과하라고 할게!”
흥분한 루비카에게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벌써 일 년도 더 된 일이에요. 그보다 그 사람이랑 말 섞고 싶지 않아요.”
“그래. 이제 두 번 다시 연무장에 가지 말자.”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초대장을 쓰는 데 집중했다. 마지막 초대장을 다 쓰고 엘리제에게 넘긴 뒤 기지개를 쭉 펴고 발아래에 있는 강아지들을 쓰다듬었다. 거친 손길에 개들은 싫어하기는커녕 더 좋아했다.
“마님, 있잖아요.”
“응?”
“저 예쁜가요?”
편지를 다 정리한 뒤 말을 거는 엘리제의 모습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예쁘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이제 좀 믿어 줘.”
“마님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 보고 예쁘다고 했었죠. 그때 저는 아무리 봐도 못생긴 아이였는데……. 그래서 마님의 말이 기뻤지만 믿을 수 없었어요. 내가 너무 기죽어 있어서 힘내라고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구나, 거짓말이지만 정말 기쁘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예뻐서 그랬어.”
억울한 듯 외치는 루비카의 모습에 엘리제가 웃음을 참았다. 왜 이렇게 별것 아닌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는지 참 이상한 마님이었다.
“있잖아요, 마님. 전에는 저 보고 못생겼다고 한 기사님이 저를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용기를 내서 한 말이 아름답다는 칭찬이었잖아요.”
“그 멧돼지는 기분 나쁘니 이야기하지 말자.”
아차, 그만 마음속으로 지었던 별명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결국 엘리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멧돼지라고요?”
“응, 닮지 않았어?”
“닮긴 닮았네요. 하하하하.”
엘리제는 한참 웃더니 따뜻한 물을 마시고 겨우 진정했다. 그래도 자꾸 대시너의 얼굴과 멧돼지가 떠오르는 지 종종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하려던 이야기는 뭐였어.”
“아, 그게, 음. 있잖아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나는 자신이 모욕을 준 사람 얼굴도 기억 못하는 그런 사람들의 춤 신청을 받지 못했다고 그렇게 슬퍼했던 건가. 그러니까 그동안 의기소침해 있던 게 엄청 바보 같이 느껴지는 거예요.”
엘리제의 얼굴에 그 나이대 처녀가 짓는 거라고 믿기 힘든 쓸쓸한 미소가 서렸다.
“예쁘다는 게 대체 뭘까요? 대체 뭐길래 저는 그것 때문에 상처받고,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변하는 거죠?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인데…….”
당연히 예쁜 게 좋다고 생각했다. 특히 여자라면 예뻐지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배웠다. 무도회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에게 춤 신청을 받고, 얼마나 많은 남자에게 청혼을 받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고 배웠다. 나이가 들어서 그것만이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전쟁으로 모든 부와 행복이 파괴된 후였다. 그 이전에는 그것은 당연히 추구해야 할 가치로 여겼다. 엘리제는 그 고정관념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거냐고.
“음.”
이런 때가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루비카는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성서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생각을 잘 정리 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과거의 뛰어난 사람이 한 말은 엘리제에게 정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리제, 휴의 성서에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휴 신은 사랑의 신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거기에 왜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사랑과 아름다움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여튼 그 책에서 말하기를 ‘아름다움의 신은 추하다’고 했어.”
“아름다움의 신이 추하다고요? 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 아니고요?”
“응, 아름다움의 신은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잖아. 무언가를 추구하려면 그게 결핍되어야 해. 만약 아름다움의 신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면 그걸 추구할 필요가 없지. 그러니 아름다움의 신은 추하다고 했어.”
처음 듣는 말에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의 신인 휴의 성서는 그렇게 중요한 취급을 받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결혼의 맹세나 연인에 대한 맹세가 널리 알려졌을 뿐이다. 그 성서의 중간에 나온 아름다움에 대한 말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루비카도 휴의 수도원에서 생활한 덕에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추한 것은 아름답다고 했어. 추하기 때문에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거라고.”
“추하기 때문에 아름답…… 다.”
엘리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추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니,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추한 것은 나쁜 것이고 배척해야 할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줄곧 비참했다. 나는 왜 예쁘지 않은가, 나는 왜 이리 못났는가. 거울을 보면 우울해했고 슬퍼했다.
“저는 그럼 그냥 아름다웠던 건가요? 예전에 다들 못생겼다고 했을 때도요?”
“그럼.”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엘리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해 줬다. 그때는 위로처럼 들렸던 말이 왜 지금은 진심처럼 들리는 걸까.
“그러니까 주변의 시선에 상관없이 네가 입고 싶은 대로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꾸몄으면 좋겠어.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전부터 계속 권한 건…….”
“사실은 부러운 눈초리로 계속 보고 있었기 때문이죠.”
엘리제가 루비카의 말을 이어 받으며 웃었다.
‘아.’
이전과는 다른 미소였다. 남들 앞에서 자신감 있게, 도도하게 웃으라고 시킬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건 진정으로 자신감이 차고 넘치는 웃음이었다. 진심으로 웃는 웃음은 억지로 웃는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루비카는 마음이 한없이 벅차오르는 동시에 슬퍼졌다. 무도회에서 춤 신청을 받지 못하고 ‘벽에 핀 꽃’이란 조롱을 받는 건 엘리제만이 아니었다. 매해 데뷔탕트 무도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 애들은 자신감을 잃고 집에 가서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겠지. 가족이 위로나 해 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시집을 어떻게 가겠냐고 구박하며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갈가리 찢어 놓겠지. 각자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이 다 다른데 남자들에게 춤 신청을 받지 못했다고 순식간에 부정당한다.
‘그 남자들도 대시너 같은 놈들이 대부분인데.’
엘리제가 그러하듯 그 아이들도 주변에 상관없이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발아래에 있던 라떼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문 쪽으로 뛰어갔다.
“마님,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개 코는 못 속인다더니,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가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에드가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당신, 손이 왜 그래?”
에드가가 말을 꺼내기 전 루비카가 붕대를 칭칭 감은 그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에드가는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뒤로 가렸으나 이미 루비카가 다 본 뒤였다.
“별일 아냐.”
“아, 연무장에 구경 갔을 때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혹시 그때 다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