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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30화 (130/212)

# 13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30화

“재킷 오른쪽 주머니를 열어 봐.”

“아, 그 반지가 맞는군요.”

감격에 차 외치는 칼에게 에드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잘 됐습니다. 이제 마님께 말씀만 드리면 되겠군요.”

“그러지 마.”

“네? 각하, 지금은 한시라도 바삐 저주를 풀어야 합니다.”

“음.”

깜빡했다. 루비카가 사랑한 사람이 자신이란 사실이 기뻐 그는 그만 저주에 관한 것을 새카맣게 잊고 말았다. 그답지 않은 실수였다.

“급한 건 아니잖아. 루비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어. 뭔가 알았다면 만난 날 말했겠지.”

“하지만…….”

“급히 말을 꺼냈다가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하고 그녀에게 혼란만 줄 수 있어. 계획을 짜서 천천히 알아보는 게 나아. 그 반지는 하녀에게 몰래 있던 자리에 넣어 놓으라고 해.”

일리 있는 말이었다.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함구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명령하실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저거 좀 넣고 가.”

에드가는 나무 욕조 바로 옆 시종이 놓고 간 오일 병을 가리켰다. 머스크와 세이지, 우드를 섞어 만든, 그가 애용하는 오일이었다. 쉬고 싶으니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칼은 에드가의 명령을 수행한 뒤 방을 떠났다.

“계획이라…….”

몇 방울 떨어뜨린 오일에서 난 향기가 방을 꽉 채웠다. 에드가는 그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머릿속이 조금 상쾌해졌다.

“짜긴 짜야하지.”

그러나 그가 앞으로 짤 계획은 어떻게 하면 루비카에게서 저주의 풀 단서를 찾아낼지가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루비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녀가 내게 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정하게 굴려고 노력한 건 효과가 좀 있긴 했어.’

그에게 아르망에 대해서 늘어놓았던 루비카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찌나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던지 당시에는 질투가 나서 미칠 뻔했었다.

‘그런데 그게 나였단 말이지.’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그의 장점에 대해서 눈을 반짝거리면 말하던 루비카의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르망이 똑똑한 자 같다는 자신의 말에 그녀는 그 작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렸다.

‘내가 좀 똑똑하긴 하지.’

-날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발명했어. 그걸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좋아졌는지 몰라.

그 말을 하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리자 가슴 아래가 불이라도 난 듯 뜨거워졌다. 아,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진실을 밝히고 그 앙증맞은 입술을 훔치고 볼을 꼬집어 주고 싶다. 에드가는 자신이 괜히 스스로와 싸우느라 즐거운 시간을 미뤄 두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아니지, 아니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는데!’

아르망이 자신인지도 모르고 욕하고 질투했고 분노했던 나날, 떠올리기만 해도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무슨 정신인지 그는 의사 앞에서 사랑 고백 아닌 사랑 고백을 했다. 그 의사가 뒤로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 걱정스러웠고, 그 말이 루비카의 귀에 들어가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알게 되면 놀리겠지. 하, 루비카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

잠시 의사를 죽일까 고민했다. 범죄자가 아닌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한 건 처음이었다. 에드가는 또 감성의 지배를 받으려 드는 뇌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칼이 돈을 충분히 쥐여 줬으니 어디 가서 떠들진 않겠지. 의사에겐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 함구해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러나 그 서약은 의사에만 해당하고 조수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옆에서 에드가의 증상을 세세하게 기록하던 조수는 발이 넓고 입이 매우 쌌다. 이미 수도에는 클레이모어 공작이 부인에게 미쳐 있다는 소문이 쫙 났다. 심지어 조수는 공작 부인이 그런 공작에게 냉랭하다는 칼의 말까지 잊지 않았다. 하지만 수도와 에드가가 있는 저택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에드가는 이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앞으로 루비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혼란스러워하겠지.’

마영석 사건은 그와 루비카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흔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에드가는 그 이후 자신을 바라보는 루비카의 눈빛이 한없이 포근해진 걸 느꼈다. 미래의 그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지금의 그라도 못할 게 뭐가 있는가.

심지어 그는 그때보다 돈도 더 많고, 더 젊으며 더 잘생겼다. 이건 그가 유리하다 못해 지면 말도 안 되는 게임이다.

아르망인가, 에드가인가.

힘들고 어려울 때 그녀의 곁에 있어 줬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는 사람인가, 아님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인가.

루비카는 한없이 고민하겠지. 제대로 고백 한 번 해 보지 않은 사랑에 정절을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올곧은 루비카는 자신이 하는 게 배신이 아닌지 고민하겠지. 사실은 같은 사람인데.

“큭큭큭.”

에드가는 결국 욕조 안에서 참지 못하고 웃었다. 자신이 좀 사악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즐거웠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다 못해 속이 썩어 문드러졌는데 그녀도 이 정도쯤 곤란해해도 되겠지.’

에드가는 혼란스러워 하는 그녀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포옹하고 위로해 줄 계획이었다.

“아르망을 여전히 사랑해도 괜찮아. 날 조금이라도 좋아해 준다면 만족할게.”

그런 말을 하며 가증을 떨어야지. 그럼 루비카는 그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겠지. 그리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미래의 자신 대신 현재의 그를 선택하게 만들 것이다. 결국 사랑하게 되는 건 같은 사람인데 에드가는 전혀 다르게 느꼈다.

‘미래의 나, 미안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내가 차지한다.’

목욕을 마친 그는 거울을 보며 그리 선언했다. 그는 자신에게조차 그녀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지 않았다. 루비카의 마음은 온전히 지금 그만의 것이어야 했다.

* * *

지저귀는 새 소리에 루비카는 잠에서 깨었다. 어느덧 아침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앤이 심기일전해 주문한 잠옷은 쓰일 일이 없었다. 아니, 안타까워하지 말아야 하나.

‘기껏 이렇게 입고 잤는데 그는 오지도 않았지.’

그녀가 바랐던 상황이었다. 이런 옷을 입고 에드가는 만나는 건 심히 낯부끄러웠다. 하지만 왜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걸까. 대체 뭘 기대하고…….

‘이게 무슨 꼴이냐고 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에드가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미남이었지만 그녀는 평범한 편이었다. 평소에는 예뻐 보일 수도 있지만 에드가 옆에 서면 그녀도 인간보다 해양 생물과 비슷해 보이겠지. 아마 에드가가 이런 옷을 입은 루비카를 본다면 무슨 벌칙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냐고 진지하게 되물었겠지.

‘그래, 섭섭하긴 무슨. 오히려 다행이지.’

루비카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마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때 하녀의 소리가 들렸다. 침실의 문은 두껍기 그지없는데 어떻게 자신이 눈을 뜬 걸 딱 알아챈 걸까. 루비카는 아무 생각 없이 하녀에게 “들어와.”라고 말하려다가 제 몰골을 보고 입을 딱 다물었다.

‘이 꼴을 보여 줄 수는 없어.’

어두운 촛불 아래에서는 잘 몰랐는데 밝은 대낮에 보니 정말 야하기는 야했다. 카나가 이렇게 과감한 옷도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차라리 알몸을 보여 주는 게 낫다. 루비카는 황급히 평소와 같은 면 잠옷으로 갈아입고 속옷에 가까운 잠옷을 옷장 안에 넣었다.

“들어와도 괜찮아.”

말이 떨어지자마자 엘리제와 하녀들이 세숫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어머.”

하녀들은 전날 밤과 다른 잠옷을 입고 있는 루비카의 모습에 낮게 탄성을 질렀다. 루비카는 그들을 향해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기껏 앤이 야한 잠옷까지 챙겨 줬는데 남편인 에드가는 그녀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쯤 소박맞은 거나 다름없다. 그들은 자신이 안됐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곤히 잠든 루비카와 달리 하녀들은 간밤에 에드가가 다녀간 사실을 알았다. 대체 얼마나 화끈한 밤을 보냈기에 마님의 잠옷이 바뀐 걸까. 루비카의 민망한 미소는 그들에게 확인 사살을 해 주었다.

“마님, 오늘은 오후에 함께 연무장을 구경 가기로 하셨지요.”

하녀들의 숙덕거림을 막기 위해 엘리제가 재빨리 말을 걸었다.

“아, 맞아. 그랬지.”

엘리제의 말에 루비카가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준비해야지. 루비카는 아침을 먹은 뒤 흰 바탕에 수선화 무늬가 들어간 드레스를 고르고 이와 비슷한 머리 장식으로 꾸몄다. 엘리제는 바닥에 깔 돗자리와 도시락을 챙기고 쌍안경 두 개도 잊지 않고 바구니에 담았다.

“언제 봐도 마님은 참 예쁜 것 같아요.”

엘리제는 단장한 루비카는 보며 칭찬했다. 가만히 보면 평범한 듯 했으나 루비카는 마음먹고 꾸미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사람의 눈길을 잡아 끌고 바라볼수록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그런, 엘리제 나보다 네가 훨씬 더 예쁜걸.”

“아니에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귀에는 루비카의 말이 자신을 추어올리기 위한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루비카의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엘리제가 그동안 두텁게 쌓은 편견의 벽을 혼자 허무는 건 너무 어려웠다.

‘연무장에 가면 많은 기사들이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겠지. 어쩌면 너무 예쁘다는 찬양을 들을 지도 몰라. 그럼 조금 자신감을 얻을까?’

연무장에 가는 것은 미남을 선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다. 루비카는 여자를 유혹하려면 열심히 선물을 하고 눈도장을 찍는 방법이 아니라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돌진하면 다 될 줄 아는 멍청이가 기사단 중에 있길 바랐다.

“마님, 그럼 가실까요?”

“그래.”

루비카는 엘리제와 하녀 두엇과 함께 연무장에 갔다. 공작 부인인 그녀는 안쪽에 상전이 앉는 의자에 앉아 제대로 구경을 해도 됐다. 하지만 기사들의 훈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루비카는 연무장이 잘 보이는 정원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제는 햇볕에 그녀의 피부가 상할까 파라솔을 세우고 준비한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마님, 갓 짠 사과주스랑 자두 절임이에요.”

“고마워,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네.”

엘리제는 무슨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음식을 잔뜩 싸 왔다. 루비카는 신나서 그녀가 준 음식을 먹으며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았다. 마을 축제 날 연극이나 춤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다 셔츠를 제대로 입고 있네.’

공작 부인이 시찰 겸 자신들의 훈련 모습을 보러 올 것이라는 보고를 미리 받은 기사들은 나름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평소처럼 덥다는 핑계로 웃옷을 벗어젖힌 남자가 없었다. 참 아쉽기 그지없다.

“대시너, 오른쪽 다리.”

“시정하겠습니다!”

“조지! 자세가 흐트러졌다.”

“네!”

하지만 기합소리와 함께 점점 훈련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어느덧 기사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기 시작했다. 흰 셔츠가 촉촉이 젖어 그들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셔츠너머 근육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대로 맨살을 보이는 것보다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게 더 자극적이기 마련이었다.

‘몸만 보면 기사들이 훨씬 낫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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