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6화
‘누군지 앤에게 물어본 건 진짜 기억이 안 나서 그런 것 같았는데.’
놀라웠다. 정말 똑똑하단 소문만 들었지 이렇게 대단한 남자인 줄은 몰랐다. 관심도 없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기억할 수 있나? 같은 하늘 아래 태어난 똑같은 인간인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걸까.
“자.”
에드가가 다 작성한 종이를 내밀었다. 루비카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종이를 받았다. 솔직히 적힌 내용은 그녀가 일주일 내내 읽어도 외우기 불가능한 양이었다.
“정말 대단해.”
순수한 감탄이 나왔다. 에드가의 입꼬리가 참지 못하고 올라갔다. 자신의 뛰어남을 칭찬하는 사람을 여럿 만났지만 그는 한 번도 기쁘지 않았다. 똑똑하고 대단한 건 그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루비카가 칭찬하고 감탄하자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기뻤다.
“당신이야말로 대단하지.”
“나? 내가 뭘.”
“이렇게 좋은 모임을 열 생각을 했잖아.”
에드가가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루비카는 갑작스러운 칭찬에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자 에드가는 결국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자신을 칭찬해 준 게 무척 기뻤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머리를 굴려 그녀를 칭찬한 건데 그녀는 그가 별것도 아닌 걸 칭찬한 것처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아닌데……. 진짜 대단하다고 느껴서 칭찬한 건데.’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말주변이 형편없다고 느꼈다.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였다.
“아하, 하, 하하하하.”
루비카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갑자기 웃는 이유를 몰라 당황했다. 그녀는 의자 팔걸이를 치며 웃다 못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에드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왜 그래?”
짐짓 시치미를 떼며 말을 걸었으나 그 이유는 묻지 않아도 짐작할 만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며 표정이며 뭐 하나 어색하지 않은 게 없었다.
“아냐, 아냐. 그냥, 크윽, 그냥 아무것도 아냐.”
루비카는 치미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에드가의 고고한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아예 입을 막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우스웠나.”
늦었다. 이미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루비카 다른 개들에게 육포를 빼앗긴 라떼랑 비슷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또 다시 웃음이 치미는 걸 간신히, 간신히 참았다.
“아니, 절대 당신이 웃겨 보였다거나 그래서 그런 게 아냐.”
그녀는 겨우 평정을 되찾고 친절히 말했다.
“그럼 왜?”
“글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루비카는 심호흡하며 제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를 찾았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웃음이 터졌기 때문이다.
“언제나 차갑고 도도한 당신이 그런 말을 해서 처음에는 놀랐고 잠시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어.”
루비카의 눈에 에드가의 왼손이 들어왔다. 쥐었다 폈다 하는 모양새가 퍽 초조해 보였다.
‘이다음을 잘 설명해야 하는데…….’
그녀는 잠시 입술을 축였다.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진심을 전하면 그가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당신은 완벽하잖아. 못하는 건 하나도 없지.”
“그렇긴 하지.”
“그래서 가끔 나랑 같은 인간이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방금 당신 표정이랑 말이 음…… 당신도 잘 못하는 게 있구나. 아, 나랑 같은 평범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안심이 되기도 하고.”
루비카는 곁눈질로 에드가의 표정을 살폈다. 완벽한 그에게도 허점이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혹 기분이 상했을까 걱정스러웠으나 다행히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난 당신이 틀림없이 여자를 다루는 데 능숙할 거라고 생각했어. 마음만 먹으면 여자를 감동시키는 말 정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줄 알았어.”
말을 하다 보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루비카는 달아오른 뺨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게 오해였구나 싶어서 내가 우습기도 하고……. 아, 잘 표현을 못하겠어.”
에드가는 손 부채질하는 루비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기쁜 한편 그녀의 말 중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여자를 다루는 데 능숙할 거라는 말은 뭐야?”
“그야.”
루비카의 뺨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녀는 흘끗 주변의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데 꼭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비밀 이야기도 아니고 고작 몇 마디 하는 데 하녀들보고 나갔다 들어오라고 하는 것도 미안했다.
“당신은 잘생겼고, 뭐든 잘하니까 분명 많은 여자를 만나 봤을 거라고…….”
“아니야.”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에드가가 뚝 잘랐다. 분노로 얼굴에 피가 거꾸로 몰렸다.
“그럼 끔찍한 오해하지 마!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
“당신 정도 되는 귀족에 대한 건 사람들이 많이 떠들잖아. 당신은 항상 무도회에서 파트너를 갈아 치우고, 그런 당신에게 고백하는 여자들이 많다고…….”
에드가는 의자 팔걸이를 꼭 쥐었다. 나무에 그의 손톱자국이 남았다.
‘젠장, 국왕 영감탱이.’
그에게 목매는 여자들이 불쌍하니 춤 한번 춰 줄 수 없냐는 핀잔에 가까운 부탁에 응했더니 바람둥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진지한 관계는커녕 잠시 만나는 인연조차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루비카는 왕국의 변두리에 살던 하위 귀족이었다. 그녀에겐 떠도는 소문 외에 그에 대해 따로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미안해.”
“아니,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니야.”
루비카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에드가는 자신이 너무 크게 소리친 게 아닐까 후회스러웠다. 다정하게 대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화를 참거나 눈치 보며 살아 본 기억이 없는 그에게는 더 그랬다.
“그래, 차 모임에 쓸 차는 뭐로 정했어?”
이야기를 더 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그는 화제를 전환했다. 내려진 구명줄에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마 전에 친척들에게 낸 차, 그걸로 하기로 했어.”
“그건 제일 값싼 차잖아. 내가 저번에 내준 걸로 하지 그래? 그게 더 좋은 차인데.”
“값싸다고 해도 금값이랑 똑같잖아. 그리고 난 그게 더 맛있었어.”
에드가는 루비카가 제일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먹었으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본인이 싫다는 데 강요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더 권유하고 싶은 마음에 입술이 계속 달싹거렸지만 겨우 참았다.
“그런데, 음.”
“그런데?”
“당신, 차 모임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루비카가 에드가 쪽을 슬쩍 봤다. 에드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의도를 모르겠으니 어서 더 말해 보라는 뜻 같았다.
“음, 당신이 좋아하는 거니까 혹시 정식 참석은 아니어도 중간에 올 건가 싶어서.”
만약에 오고 싶다고 말하면 말려도 되는 걸까 그녀가 고심하던 때였다.
“……못 가. 바빠.”
한참 고민하던 에드가가 토하듯 말했다. 바로 그녀가 원하던 대답이었다. 그런데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 한창 바쁠 테니 그럴 수도 있지.”
목소리 끝이 떨렸다. 영 어색한 말투에 에드가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그는 한참 루비카를 바라봤다.
‘……섭섭하겠지.’
마음 같아서는 차 모임에 참석하고 싶었다. 많은 귀족에게 그녀가 자신의 부인이라고 정식으로 멋지게 소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안해.”
“아니, 나야말로 바쁜 당신에게 괜한 소리를 했어.”
루비카가 생긋 웃었다. 그가 참가하면 아가씨들의 눈을 홀릴 테니 곤란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든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러지, 나?’
이상했다. 처음 클레이모어 저택에 왔을 때 에드가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자꾸 그가 떠올랐다. 점심에 초대장을 선택하면서도 드문드문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일은 잘하고 있는지 머리는 아프지 않는지 걱정스러웠다.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4년 뒤 세리토스 왕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또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어떻게 되는지 그녀는 알고 있다. 이전의 그녀는 ‘클레이모어 공작이 권력에 눈이 멀어 타국과 결탁해 무기를 외부로 빼돌려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믿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 본 에드가는 비록 말버릇은 나빴지만 권력욕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공정했다. 그녀는 마영석에 대한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에드가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 부탁을 들어줬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를 구하고 싶어.’
그래서 그런 것이다. 종종 얼굴을 보고 싶은 건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가지는 막연한 불안함과 걱정 때문이라고 루비카는 결론지었다.
‘약속한 시일이 되어 떠나더라도 그를 구하거나 도울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건 정신병원에 갇힐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악몽과 현실을 착각한 거 아니냐며 실없는 사람 취급 받는 게 가장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게 있었다.
‘무기로 일어선 가문이야. 그리고 그 무기 덕에 세리토스 왕국민이 먹고살 수 있게 됐어. 그런데 무기를 개발하지 말라고 하면…….’
당장 식량이 떨어지게 된다. 전쟁이 나기 전에 모두 굶어 죽을 수 있다.
‘어쩌지…….’
그와 대화를 마무리한 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내내 루비카는 계속 생각했다. 미래에 닥칠 일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가 가엾었다. 대체 그가 왜 스텔라 같은 끔찍한 무기를 개발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해서 그를 구하고 싶었다.
* * *
만찬이 끝날 무렵 도착한 전령이 세사르 경의 소식을 전했다.
“그래, 어디서 찾았지?”
“술에 취해 숲속에서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직 깨지 않았는데 모험단 말로는 주변에 널린 술병 모양을 보아 아무래도 고블린이 만든 만든 술인 것 같다고 합니다.”
에드가는 한숨을 참지 않았다. 못 말리는 세사르 경이다. 이번에 깨서는 어디 고블린의 파티에 초대되어서 진귀하고 신비한 음식을 먹느라 그만 연락하는 걸 까먹었다는 소리를 할 것 같았다.
“루비카, 나는 세사르 경과 모험단 일을 처리하고 갈게. 먼저 침실에 가서 쉬어.”
“응.”
식당을 나가기 전에 루비카는 잠시 고민하다 한마디 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작은 격려였다. 하지만 그 순간 에드가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의도하고 어색하게 짓는 웃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예쁜 웃음이었다. 루비카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간혹 보여 주는 저 웃음, 이상하게 낯설지 않아. 아르망이 생각나지만 그가 아르망일 리 없고…….’
목욕하는 내내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혹시나 그녀의 지난 삶에서 에드가를 스쳐 지나간 적이 없는지 꼼꼼히 체크해 봤다. 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처럼 잘생긴 남자라면 한 번 스쳐 지나갔어도 그녀는 기억했을 것이다.
‘조금 아르망과 비슷했었나.’
목욕이 다 끝날 때쯤에 그런 생각을 했다. 고생을 많이 한 아르망은 실제 나이인 일흔세 살보다 여든 살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몸에는 상처가 가득해 에드가만큼 잘생겼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외모에 대한 루비카의 평가는 엄격했다.
‘그것 말고도 비슷한 점이 꽤…… 꺄아!’
루비카의 생각은 앤이 가져온 옷을 보는 순간 끝났다. 그림으로 봤던 카나의 야한 잠옷이 눈앞에 있었다.
“그, 그거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