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25화 (125/212)

# 12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5화

* * *

엘리제는 이제 어느 정도 시녀 일에 익숙해졌다. 간단한 시중은 앤도 믿고 맡길 정도가 되었다.

‘마님이 쓰실 화장품과 비누, 그리고 향수는 이 정도만 구입하면 되나?’

아직 공작가 예산의 전체적인 흐름까지는 읽지 못하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생필품의 구입은 그녀가 담당하게 되었다. 엘리제는 혹시나 자신이 실수할까 봐 내일모레 올 상인에게 구입해야 할 목록을 몇 번이고 체크하고 또 체크했다. 엘리제의 옆에서 루비카는 한 달 정도 뒤에 열릴 차 모임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흠, 차 모임에는 달콤한 디저트 같은 걸 많이 내는 게 좋겠지.”

혼잣말 같은 소리에 엘리제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디저트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향기가 좋은 음료는 처음 마셔 봤어요. 그냥 차만 내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하, 하, 하.”

루비카가 어색하게 웃었다. 엘리제에게 차는 향기 좋은 음료였지만 다른 사람에겐 옆에 달콤한 케이크라도 두지 않는 이상 그 풀 비린내 나는 음료를 계속 마시는 건 고역이었다.

“칼이 그랬는데 차 모임에 디저트는 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어.”

칼은 사탕 하나, 과자 하나 정도라고 말했으나 루비카는 이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 희한한 음료를 마시려면 보상으로 케이크 한 판쯤은 줘야 한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런가요?”

엘리제가 느끼기에 차는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 더 좋을 듯싶었으나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무턱대고 우길 수 없었다.

“그럼, 그럼.”

루비카는 차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차’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칼도 차 모임에 대한 루비카의 질문에 일부분은 자신도 책으로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칼조차 잘 모르는 것을 다른 이들이 잘 알 리 없다. 루비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차 모임을 꾸려나가기로 했다.

‘원래 이런 문화라고 시치미를 뚝 떼야지.’

금값에 준하는 차를 내놓았는데 아무리 대귀족이라 할지라도 싫은 티를 내기 힘들 것이다. 거기에 맛있고 화려한 케이크로 사람들을 현혹할 계획이다.

“엘리제, 내일 나 연무장을 둘러볼까 해.”

“연무장이요?”

루비카는 내일 호위 기사들이 공작가 정원 귀퉁이에 있는 연무장에서 훈련한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난 그런 걸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

“엘리제, 마님께서 혼자 가시면 적적할 테니 함께 가서 구경하렴.”

앤이 능청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사실 엘리제가 오기 전 앤과 루비카는 먼저 호위 기사단에서 신분이 괜찮고, 물려받을 재산도 꽤 있는 기사들의 명단을 정리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잘생긴 남자를 추렸다.

―마님. 음, 제가 생각하기에 잘생긴 남자를 고르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나이가 있잖아요. 요새 젊은 여자들이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루비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가 때문에 요즘 그녀는 잘생긴 남자를 포착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어지간히 잘생긴 남자를 보아도 자꾸 에드가와 비교해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가 떨어진다고 평했다.

―어쩌면 좋을까. 놀러온 아가씨들 눈에 차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데.

루비카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참가한 아가씨들에게 차 모임이 기피하고 싶은 모임이 되면 아무 소용없다.

‘미남! 모두의 눈을 사로잡을 꽃 같은 미남이 필요해! 그것도 많이.’

스테판 경도 나쁘지 않지만 이왕이면 꽃은 많을수록 좋았다. 여러 종류의 다양한 꽃이 있어야 취향에 맞게 반하지. 루비카의 걱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앤이 한마디 내뱉었다.

―엘리제에게 고르게 시키는 건 어떨까요?

―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음, 엘리제야 말로 요즘 젊은 아가씨잖아요.

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엘리제는 시녀가 되기 전 별채에서 제 또래 아이들과 자랐다. 요즘 아이들의 유행이나 취향은 앤과 루비카보다 엘리제가 더 잘 알았다.

―하지만 엘리제는 수줍음이 많은데…… 미남을 골라 달라는 부탁을 하면 부끄러워서 거절할 거야.

―굳이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요. 기사들이 훈련하는 데 가서 저 기사는 어떤 것 같냐, 저 기사는 어떠냐고 한번 떠보세요. 대답을 하지 않고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수줍게 볼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면 십중팔구 잘생긴 거고요. ‘꽤 잘생기셨네요.’라고 대답하면 그저 그런 거예요. 물어볼 때 황당한 듯 웃기만 하는 놈은 제치면 되고요.

―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이럴 때만은 루비카와 앤의 장단이 잘 맞았다. 과보호가 문제여서 그렇지 앤은 기본적으로 루비카의 뜻을 이루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선수였다. 그리고 둘은 현재 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으로 엘리제를데려가기 위해 공작을 펼치는 중이었다.

“기사들이 훈련하는 걸 보고 싶으시다고요?”

“응, 예전부터 궁금했어. 그런데 혼자 가기는 너무 부끄럽고.”

남자들이 득실득실한 연무장에 가는 건 앤에게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기사들은 훈련 중에 가끔 웃옷을 벗기도 했다. 일이 있어 그 앞을 지나쳐야만 할 때면 자꾸만 돌아가는 시선을 내리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엘리제, 시간이 된다면 내가 마님과 함께하겠다만 그날 일이 있구나.”

앤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루비카가 엘리제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의 합동 공격에 엘리제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그럼 제가 대신 갈게요.”

“고마워, 엘리제.”

“고맙다니요.”

기뻐하는 루비카의 모습에 엘리제가 수줍게 웃었다. 엘리제는 하고 있던 일을 정리한 다음 하녀에게 내일 연무장을 구경하러 갈 때 필요한 돗자리와 양산 등을 챙기라 지시했다. 앤은 그 모습을 루비카만큼이나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엘리제에게도 좋은 기회야.’

앤은 루비카가 시녀로 데려온 엘리제에게 나름 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설프고 모르는 것도 많아 난감했지만 가르치니 곧잘 해내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일에는 점점 자신감이 붙은 듯한데 한창 때의 아가씨가 자신의 외모에 영 자신 없어 하는 것도 신경 쓰였다. 엘리제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말하지 않았지만 엘리제가 좀 더 화려하고 예쁘게 꾸몄으면 좋겠다는 루비카의 말에 동의했다.

‘좋아하는 남자라도 생기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는 것보다 스스로 하는 게 효과가 좋다. 앤은 엘리제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변하기를 기대했다.

“아. 기대된다, 정말.”

루비카는 다양한 초대장 샘플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각각 다른 것보다 통일하는 게 좋겠지?’

마음 같아서는 초대한 손님마다 그에 어울리는 개성 있는 초대장을 보내고 싶었으나 무도회도 아니고 지나치게 튀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초대장은 그냥 간단하게 클레이모어 문장이 들어간 것으로 하자.’

대신에 루비카는 초대하는 손님에 따라 각각 다른 잉크로 이름을 쓰고 말린 꽃잎을 동봉하기로 했다.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탕트 백작 부인은 어떤 옷을 입고 올까?’

이제 씨 뿌리는 시기가 지나가 한창 바쁜 농번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치스런 무도회를 열기에 적절할 때는 아니었다. 루비카는 초대장에 ‘차 모임은 ‘명상’을 하고 서로 안부를 나누며 심도 깊은 대화를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보석으로 꾸민다던지 하는 사치스런 차림은 지양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기대가 되었다.

‘샤틀레 자작 부인의 딸이 무척 예쁘다고 하던데.’

소문으로만 듣던 사교계의 명사를 만날 생각에 루비카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차 모임에 참석을 권유할 예정인 연구자와 기사들의 마음도 이보다 뛰지는 못하리라. 루비카는 오늘부터 주책 떨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게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마님,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의 말이 들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앤과 엘리제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루비카는 들고 있던 종이를 모두 내려놓고 문 쪽을 바라봤다.

“에드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루비카가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가기 전 에드가가 성큼성큼 그녀 곁으로 걸어왔다.

“뭐 하고 있었어?”

에드가는 안부를 묻는 것도 잊고 성급하게 질문했다. 테이블에 놓인 수북한 초대장들이 신경 쓰였다. 그녀의 편지를 받을 운수 좋은 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차 모임에 초대할 분들에게 보낼 초대장을 고르던 중이었어.”

“아, 차 모임.”

칼에게 대략 보고는 들었다. 루비카의 옆자리에 앉은 에드가는 테이블에 놓인 초대장을 훑어보았다. 그는 그녀가 차 모임을 연다는 소식에 내심 기뻤다.

‘차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나 보군.’

‘차’는 난이도가 있는 음식이었다. 처음에는 에드가도 생소했었고, 별맛 없는 따뜻한 물이라 느꼈다. 그러다 두 번째 마셨을 때 향기가 제법 좋다고 느꼈고, 세 번째 마셨을 때 몸이 푸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네 번째에는 칼이 청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차를 찾아 마셨다.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루비카도 그가 그랬듯이 ‘차’라는 음료에 매료된 걸까. 그녀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늘었다고 생각하자 기쁜 마음이 들었다.

“어떤 걸로 결정했어?”

“이거.”

“딱 적당하군.”

모임에 초대할 사람들은 대부분 에드가와 안면이 있었다. 앤이 특별히 클레이모어 공작가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로 엄선했다. 공작가에 호의적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제외했다.

“에드가, 탕트 백작 부인은 어떤 사람이야?”

루비카는 앤에게서 그들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습득했다. 하지만 함께 대화를 나누고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아직 부족하다. 에드가는 수도 사교계에 나갈 일이 많고 또 유력한 사람들과 교류할 일이 많았다. 루비카는 그가 자신에게 조언해 주길 바랐다.

“탕트 백작 부인이라…….”

루비카의 질문에 에드가는 한참 뜸을 들이다 앤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긴 여자였지?”

“붉은 머리에 금빛 장신구를 많이 하시고 오른쪽 눈 밑에 점이 있는 부인이요.”

“아, 그 말 많은 여자.”

앤의 말에 에드가는 간신히 탕트 백작 부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야?”

“시끄러운 사람이지. 요즘 유행이니 뭐니, 이국에서 온 물건이 어떻고 하며 별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곧 해 대는…….”

“유행? 무슨 유행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 이국에서 온 물건은 또 뭐였어?”

루비카가 눈을 반짝이며 에드가에게 질문했다. 에드가는 불쾌한 표정이 되더니 잠시 침묵했다.

‘그딴 여자에 왜 관심을 보이지?’

탕트 백작 부인에게 관심을 가질 시간에 자신에 대해서나 궁금해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뭘 좋아하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기억 안 나.”

사실 마음만 먹으면 뇌 한쪽에 잠들어 있는 기억을 깨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심통이 난 에드가는 일부러 다리를 꼬며 모른 체했다.

“뭐?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냐. 어쩔 수 없이 참석한 무도회에 피곤해 죽겠는 사람을 데리고 주야장천 떠들어 대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까지 내가 왜 기억해야 해?”

루비카가 입을 삐죽였다. 에드가는 그 살짝 나온 입술이 손가락으로 잡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당신이 얼마나 똑똑한데. 내가 그냥 지나가듯이 한 말도 다 기억하잖아.”

“뭐?”

“그럼 아니야? 왕국 최고의 두뇌, 클레이모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그가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이다. 식상하디식상한 말. 하지만 루비카가 그 말을 입에 올리자 그의 귀 끝이 타오르듯 붉어지고 말았다.

“그 정도는 기억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천재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루비카는 반쯤 놀리는 어투였다. 하지만 에드가는 눈치채지 못했다.

“펜.”

그가 말하자 앤이 재빨리 잉크 묻힌 펜을 종이와 함께 건넸다. 에드가는 무서운 속도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탕트 백작 부인이 좋아하는 음료, 날씨, 친척 관계, 그리고 그녀의 딸과 아들들의 특징, 최근의 관심사,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인상을 쓰는 버릇 등 그녀의 특징을 빽빽이 적어 내려갔다. 그 손을 보던 루비카는 혀를 내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