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4화
‘하지만 각하께는 연적이니.’
어떤 일이 닥쳐도 냉철했던 에드가가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몰랐다. 칼은 새삼 오래 살고 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각하, 그럼 마님의 이름이 적힌 쪽지는 어떤 이유로 그 자리에 있었던 걸까요?”
한참 침묵한 에드가가 ‘끙.’하고 신음했다.
“처음에 너구리 영감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내게 했던 말 기억해?”
“아, 국왕 전하 말씀이십니까?”
“그래.”
―에드가! 미래에 말이야. 자네가 사랑에 빠져서 그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닐까?
그때 에드가는 귀를 씻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 늙은 노친네가 눈까지 반짝이는 게 이게 무슨 주책이냐고 외치고 싶었다. 자기 일이나 잘할 것이지. 그 노친네는 남의 연애나 애정사에 관심이 많았다. 근엄한 표정으로 무도회에 참석해 누가 누구와 이루어질 것인지 소문을 수집하는 게 그의 취미 생활이었다.
에드가는 그의 그런 행동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국왕이 그나마 나라를 잘 다스리지 않았다면 그는 오래전에 너구리와의 관계를 파탄 냈을 것이다.
“그때는 헛소리 좀 그만하라고 외쳤는데 지금은 그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신이 사랑 같은 걸 할 리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믿기 힘든 일이었으나 사실이었다. 어쩌면 정말 미래의 그는 그녀를 위해 반지를 사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분명 그를 모르는 눈치였다. 루비카는 연기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안타깝게도 에드가는 루비카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칼, 혹시 모르니 베르너 저택을 수색해 봐. 푸른 반지 같은 게 없는지.”
루비카가 원래 살았던 베르너 저택은 현재 비워진 상태였다. 칼은 베르너 부부가 저택을 떠날 때 베개 하나 가져가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네. 그보다 각하, 마님께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직접 물어보라고?”
“그게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답 없이 에드가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칼은 조용히 그가 마음의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칼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에드가는 두려웠다. 님프의 저주에 대해서까지 밝히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간신히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흔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가 낮엔 걷지 못하는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만약 그를 끔찍한 괴물이라도 보듯 바라본다면?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는 한 절대 진실을 있는 그대로 고할 수 없었다.
“그것보다 먼저 그녀의 주변에 대해 좀 더 알아보지. 처음에 조사 했을 때는 분명 만나는 남자 같은 건 없다고 했는데 실제론 있었잖아. 놓친 게 분명 더 있어.”
에드가의 말에 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에드가가 루비카에게 물어보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아카데미에 간 사촌 동생의 편지가 도착할 때군.”
“네, 일반 편지를 사용했으면 지금쯤 도착할 때입니다.”
전서구를 통해 빠른 편지를 주고받는 건 재산이 넉넉한 귀족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론의 아카데미와 세리토스 왕국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여행 중에는 편지를 부칠 겨를이 없을 것이고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편지를 부쳤어도 이제야 도착할까 말까다.
“그녀가 보기 전 내게 먼저 줘. 혹시 놓친 정보가 없는지 알아보게.”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마님의 소지품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칼의 말에 에드가가 머뭇거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올 때 입던 옷 이외에 거의 가져온 게 없는 수준이었는데.”
“각하, 제 생각에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는 게 더 나쁜 행동인 것 같습니다만.”
정당한 지적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에드가는 입술을 닫았다. 사실 그가 지금 하려는 행동은 모두 나쁜 행동이었다. 루비카가 알면 분명 화를 내겠지.
‘하지만 그녀에게 바로 물어볼 수 없어.’
자신이 뭘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던 그녀와의 관계는 파괴될 것이다. 그게 좋은 변화라면 바랄 것이 없었지만, 나쁜 변화라면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았다.
‘안전장치가 필요해.’
그가 물어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실마리라도 찾고 싶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루비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최소한의 계산이라도 끝마친 다음에 감행하고 싶었다.
“루비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하녀들에게 살짝 떠보고 지나치게 일을 크게 진행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럼 하인들에게 마님께 특별한 일이 없는지 한번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험부담은 적을수록 좋겠지요.”
에드가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칼이 대답했다. 아마 칼이 말한 위험부담이란 루비카의 마음이 아니라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대한 것이겠지만, 에드가는 그 주제에서 한발 물러난 것만 해도 안심이었다.
‘초조해하지 말자. 아직 주어진 시간은 많아.’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화제를 전환했다.
“세사르 경의 수색은?”
“산맥 중턱에서 수색대가 야영을 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물건도 몇 개 떨어져 있는 걸 보아 오늘 내에 찾을 듯싶습니다.”
“좋아, 찾는 즉시 내 앞으로 데려오게.”
그리고 칼이 집무실을 나갔다. 에드가는 한숨을 쉰 다음 서랍을 열어 설계도 하나를 꺼냈다. 국왕과 오래전부터 이야기했던 무기에 대한 설계를 슬슬 시작해야 했다.
국왕은 왕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래곤 이오스가 있는 황금 평원을 노리고자 했다. 클레이모어의 신무기를 남부의 왕국에 지원하는 문제에 그가 적극적으로 나온 이유였다. 신무기 지원을 핑계로 군대를 파견해 마물과 드래곤의 권속과 싸우는 전략을 훔쳐오기 위해서였다.
‘드래곤의 권역에서만 자라는 식물에 대한 조사도 해야겠지.’
어쩌면 세사르 경의 소원이었던, 드래곤의 권역에 대한 식물도감을 만들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에드가는 그 가능성에 픽 웃었다. 칼은 국왕의 부름에 그가 응하지 않으면 무슨 불이익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으나 실상 고삐를 쥔 건 그였다.
국왕은 지룡인 이오스를 상대로 하늘에서 공격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에드가는 화가 나면 국왕을 너구리라고 부르고, 국왕 또한 심심하면 감정도 없는 뱀이라고 손가락질 했지만 둘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사이였다.
―하늘에서 드래곤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라니 나를 얼마나 갈아 마실 생각입니까?
―하하하, 하긴 자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거기까지는 무리겠지?
국왕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너구리 같으니.’
에드가는 그에게 화를 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가 거절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저러는 거다. 하지만 입이 열 개여도 못한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집중하자. 빨리 완성해야 해.’
에드가는 설계 도면을 꼼꼼히 보기 시작했다. 하늘을 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시도였다. 아카데미에서도 몇몇의 과학자들이 시도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하지만 공중전이 아니면 이오스를 이길 도리가 없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클레이모어의 저력.
에드가는 그를 가르친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새가 하늘을 나는데 인간이라고 못할 리는 없다. 일단 그는 과거 아카데미 학자들의 연구에서 참고할 만한 것이 없는지 먼저 체크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설계도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먼저 하늘을 날 수 있는 동력장치에 대해 연구하고 테스트를 할 생각이었다.
‘최종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는 기밀로 하는 게 좋겠군.’
무기의 이름은 ‘스텔라’로 짓기로 했다. 어두운 세리토스 왕국의 앞날에 밤하늘의 별처럼 길잡이가 되어 달라는 바람을 담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한 무기였다. 황금 평원에서 드래곤 이오스를 쫓아내면 에드가는 완성한 무기를 폐기할 생각이었다.
만약 정복에 욕심 있는 자의 손에 그 무기가 들어간다면?
훗날은 그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세르토스 국왕의 관심이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에만 있어서 다행이었다.
할 수 있다면 그가 살아 있을 때 무기를 만들고, 평원을 무난히 손에 넣은 다음 무기를 비롯해 모든 설계도면을 파괴할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하루빨리 완성해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그의 손은 바삐 움직이고 있으나 쓰고 있는 문장은 연구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일하는 데 필요한 물건,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편하고 좋은 거.
그는 계속 그 문장을 썼다. 루비카가 아르망에게 결정적으로 반한 건 그녀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편리한 물건을 발명해 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게 뭔지 궁금했다.
―그걸로 많은 사람이 편해졌어.
그는 이제 동그라미를 그리고 별을 치기까지 했다. 빨리 설계도를 그리는 데 집중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잡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무슨 물건이지?’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루비카가 평소에 무슨 일을 하고 또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공작저로 온 뒤로 그녀는 크게 어려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추론을 하려고 해도 정보가 없으니 쉽지 않다.
“휴.”
에드가가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손수건을 바라봤다. 루비카가 손수 수놓는 광경을 상상하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그는 그 손수건으로 땀을 닦을 엄두도 나지 않아 곱게 모셔 두기만 했다. 이렇게 네 모퉁이마다 클레이모어 문양을 수놓았으니 보통 정성이 아니다.
‘가만.’
이거야 말로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아!
그는 즉시 자수에 필요한 물건을 써 내려갔다. 바늘, 실, 가위, 천, 수틀 등등. 그 뒤 자수를 하는 데 있어 어려운 점이 뭔지 썼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편하고 좋은 거.
그는 그걸 찾아내서 발명할 생각이었다. 그는 어느덧 스텔라의 설계도를 테이블 한쪽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물론 왕국의 앞날은 중요했다. 만약을 위해 반드시 발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부터 좀 살고 보자!’
어차피 그가 지금 발명하려는 건 발상이 중요한 것으로 시간을 길게 소모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스텔라는 삼사 년은 잡고 진행해야 되는 개발이었다. 그렇다면 사나흘 늦춰져도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여태까지 집중을 못했는데 갑자기 될 리가 있나. 그보다 더 신경 쓰이고 그에게 시급한 발명을 하기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에드가는 평생 처음으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나태한 합리화를 했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편하고 좋은 거.
그걸 찾기 위한 그의 기나긴 여정이 이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