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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22화 (122/212)

# 12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2화

구두는 격식 있고 고상한 느낌이 들지만 신발은 그냥 아무렇게나 신고 벗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희가 이 매듭에 이름을 붙여 주는 게 어떨까요? 크리스 씨의 이야기도 해요. 그분의 아내 이본느의 이름을 딴 ‘리본’ 어떤가요?”

“리본.”

루비카는 카나의 말을 따라해 보았다. 부드럽고 동글동글한 발음은 무척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본느의 이름을 땄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크리스는, 그녀가 미래에 만나게 될 크리스는 이 사실을 알면 기뻐할까?

‘아내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기쁜 표정을 지었지. 일찍 죽는 바람에 항상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했었어.’

매듭을 묶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자 부끄러워했던 크리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루비카에게 죽은 아내도 이 매듭을 봤다면 그녀처럼 예쁘다고 할지 계속 물었다.

“그 이름으로 하자.”

어쩌면 이번 생에 이본느는 죽기 전에 크리스가 만든, 자신의 이름을 딴 매듭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부인, 저는 일주일 후에 완성된 옷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카나가 후련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녀가 떠난 후 루비카는 잠시 쉬었다. 그리고 한참 자수 바구니에서 요리조리 뭔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님, 뭔가 찾는 게 있으신가요?”

어느새 할 일을 끝내고 돌아온 앤이 질문했다.

“일전에 수놓았던 손수건이 안 보여서.”

“각하의 머리글자를 수놓은 손수건이요?”

앤이 경악해서 되물었다. 에드가의 머리글자를 수놓기는 했다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지적당하니 심히 부끄러웠다.

“그렇긴 한데…….”

“꼭 찾아야지요!”

루비카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하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들은 규방은 물론 침실과 면담실까지 싹싹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손수건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손수건은 집무실에 있는 테이블 한가운데 고이 모셔져 있었다. 에드가는 일하는 중간에 손수건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루비카를 비롯한 하녀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들은 소파까지 옮겨 뒤지다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귀신이 숨긴 건가.”

하녀 하나가 중얼거린 말에 앤이 마님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다며 화를 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까지 찾았는데 안 나오면 어쩔 수 없지 뭐.”

루비카는 생각보다 커진 일에 당황하며 그들을 말렸다. 소일거리 삼아 대충 만든 손수건. 엘리제의 부추김에 에드가의 머리글자를 넣긴 했으나 차마 부끄러워서 줄 수 없었다. 이렇게 사라진 게 다행이다 싶었다. 어쩌면 강아지들이 가지고 놀다 물어뜯어 형체도 없이 사라진 걸지도 모른다.

“……마님.”

하녀들은 자신을 탓하지 않는 루비카의 행동에 감격했다.

“아니,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그거 그냥 소일 삼아 만든 거니까.”

하녀 하나는 손수건에 눈물을 찍기까지 했다. 어째서 매번 이런 식이 되는 걸까. 이 감동의 물결을 어떻게 하면 잠재울 수 있을지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서든 화제를 전환해야 했다.

“앤, 차 모임에 초대할 분들 말인데.”

“네. 더 초대하고 싶으신 분들이 있으신가요? 제가 최대한 엄선하기는 했는데…….”

앤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히 관심사는 바로 넘어갔다. 앤은 나름 차 모임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음, 초대한 분들에게 결혼 적령기가 된 딸이나 아들, 조카가 있으면 함께 초대하도록 하자.”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앤이 반문했다.

“우리 기사단 중에서 얼굴이 반반한 사람을 몇 명 고르고. 아, 아직 미혼인 학자분들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으려나?”

“마……님?”

루비카가 앤을 향해 짓궂게 웃었다.

“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비싼 비용을 치르며 무도회를 열고 무도회에 참석하려는 줄 알아?”

“그야 위세와 권위를 자랑하고, 무엇보다 무도회를 통해 서로 안부를 전하고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이지요. 또…….”

다음 말을 이으려던 앤이 루비카의 의도는 눈치챘다.

“사윗감 사냥?”

앤은 그만 사교계에서 부인끼리 몰래 쓰는 은어를 써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루비카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지. 미혼 남녀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이 싹틀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이지.”

무도회에서 싹트는 욕망 중 그것만큼 강렬하고 직접적인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결혼은 적령기 자녀를 둔 부모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결혼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건 비단 여자만이 아니었다. 미혼 남성 또한 신분 좋고 지참금 많은 여인과의 사랑을 꿈꿨다.

‘좋은 아이디어야.’

앤은 루비카의 전혀 다른 시각에 신선함을 느꼈다.

‘나이 있는 부인들은 자식들의 결혼에 열을 올리지. 어떻게 하면 미혼남녀를 엮을 수 있을까 쥐가 날 정도로 머리를 굴려. 만약에 차 모임에서 서로 이루어지는 커플이 하나라도 나오면…….’

다들 다음 차 모임에 자신들도 초대해 달라고 난리가 날 것이다. 루비카를 사교계의 명사로 만드는 데 이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없었다. 앤은 루비카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사단이나 학자들 중에도 작위를 받은 사람이 있잖아.”

“그렇지요. 이른바 ‘대어’는 없지만 부인들의 마음에 찰 사람들이 많지요.”

백작 이상 가는 미혼의 작위 계승자는 결혼 시장에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가장 큰 사냥감이었던 에드가는 현재 잡힌 물고기가 되었다.

“이왕이면 잘생긴 남자로.”

행사에 참가할 부인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쥐고 있는 건 다른 아닌 딸들이었다. 그리고 한창때인 처녀들이란 남자의 얼굴에 끌리기 마련이다.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은 부인이라면 제 딸을 데려갈 남자가 일 년에 수익을 얼마나 내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신분을 보장해 줄 작위가 있는지 주판을 튕기겠지만 사랑에 빠질 소녀들에게는 그런 것이 웬 말이냐. 일단 잘생겨야 마음이 동하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본인은 아무리 해도 마음이 가지 않는데 조건이 좋다며 못생긴 남자를 들이밀면 역효과만 날 뿐이다.

“잘생긴 남자요?”

“응. 아, 맞아. 스테판 경은 미혼이었던가?”

“네. 미혼이 맞습니다.”

“그럼 그분도 명단에 올리자.”

에드가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호위기사단장인 스테판도 사실 꽤 미남이었다. 게다가 공작가의 호위기사단장이면 남작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모든 백작의 딸이 자신과 신분이 비슷하거나 높은 남자와 결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스테판 정도만 되어도 나쁘지 않은 혼사였다.

“그 이외에 얼굴이 괜찮은 남자가 더 없을까?”

루비카는 심각한 얼굴로 클레이모어 공작저에 있는 동안 보았던 미남자의 명단을 추리려 애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추릴 수 없었다. 서쪽 별채 연구소에서 안내를 맡았던 학자가 괜찮았지 하고 생각하려 하면 옆에 에드가의 잔상이 떠올랐다.

‘음, 그러고 보니 그때 본 사람 얼굴은 잘생겼지만 에드가에 비해서 키도 작고 너무 말랐어.’

학자들에게는 남성미가 부족한 것 같아, 이번에는 기사들이 정원에서 연습하던 모습을 떠올리고 그중에 미남자를 추리려 애썼다.

‘적발에 갈색 눈이었던 그 사람 키도 크고 몸매도 좋았어. 하지만 눈이 좀 더 아몬드 형으로 갸름했으면……. 그래, 그러니까 꼭…….’

에드가처럼…….

이번에도 에드가의 잔상이 그녀의 눈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큰일이다. 아무리 잘생긴 남자를 봐도 그 옆에 비교를 에드가로 두면 생선이나 두족류로 보였다.

“끄응, 앤.”

한참 궁리를 하던 루비카가 앤을 불렀다. 앤은 옆에서 차 모임에 참석시킬 만한 미혼 남성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던 중이었다.

“혹시 에드가가 차 모임을 함께하고 싶다고 할까?”

“음, 각하께서도 참석하시면 좋겠네요. 아, 하지만 무척 바쁘셔서…….”

“아냐, 아냐. 참석하길 바란 건 아냐.”

루비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는 에드가의 참가를 바라지 않았다. 만약 그가 참가한다면 모임에 초대받은 처녀들은 그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 남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곤란하게도 지나치게 잘생겼다.

‘음, 하지만 에드가도 칼만큼이나 차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어. 내가 싫어한 뒤로 두 번 다시 권하지 않긴 하지만 매일 마시고 있고.’

어쩌면 차에 대한 칼의 지나친 애정은 에드가로부터 유래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참석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지만 만약이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루비카는 차 모임을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에드가를 꼭 불참시켜야 했다.

‘이따 저녁때 이야기해 봐야지.’

그녀가 그리 결심을 굳혔을 때 앤은 루비카를 보며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각하께서 바쁘셔서 쓸쓸하신 게 틀림없어.’

어지간해서는 에드가가 일하는 시간을 방해하려 하지 않는 루비카였다. 루비카는 에드가가 마영석에 관한 폭탄선언을 하고 다음 날 바로 왕성으로 올라갔을 때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를 위해 침착하게 친척들을 돌려보낸 그녀의 행동에 내심 탄복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에드가가 야속했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질레한 경의 행동에 대해서 에드가가 후에 혼쭐을 내줬다고 듣긴 했으나 애초에 그가 집무실 밖으로 나와 한 마디만 했어도 끝날 사안이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이 일에 대해 따로 에드가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앤이 보기에 에드가는 너무했고, 루비카는 바보 같을 정도로 착했다.

‘저렇게 착한 분이라도 에디가 계속 이기적으로 굴면 마음이 떠날 거야.’

루비카의 마음이 돌아서기 전에 서로를 끈끈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최고는 역시 ‘아이’다. 루비카가 들으면 기겁할 내용이었지만 앤은 내심 자신의 계획이 뿌듯했다.

‘부끄럼 많은 마님을 대신해 나라도 힘내자.’

앤은 오늘밤 카나에게 전달 받은 옷을 루비카에게 꼭 입히기로 결심했다.

*

에드가는 수도에 올라가야 했다. 수도에 올라가서 밀린 일도 처리하고, 남부 왕국의 개발권과 관련된 외교 협상에도 관여해야 했다. 사실 이렇게 충동적으로 내려와서는 안 되었다.

“음, 당분간 올라갈 수 없다고 해.”

하지만 에드가는 국왕의 부름을 간단하게 거절했다. 칼이 당장 곤란해했다.

“국왕 전하께서 노하실 수 있습니다.”

“그 너구리가 노하는 건 대부분 다 연기야. 괜찮아.”

에드가는 그리 대답하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두통이 또 도졌다. 국왕을 구워삶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한 건 한 여인이었다.

―혼자서는 식사를 잘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멍청하게도 그는 그 사실을 어제야 알았다. 알아보니 그가 수도로 떠난 며칠간 그녀는 식사를 잘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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