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1화
처음 여는 행사였다. 루비카는 급한 마음에 당장 치르기보다 완벽하게 준비해서 모두를 매료시키길 바랐다. 초대하는 손님은 물론 내가는 식기, 차, 테이블보까지 모두 허투루 준비하고 싶지 않았다. 루비카는 이 기회를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싹 다 새로 샀다. 심지어 이야기를 들은 에드가는 한술 더 떠 의자를 새로 주문하자는 소리까지 했다. 역시 돈은 써 본 사람이 더 잘 쓴다.
“참, 드레스를 만들려면 매듭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야지. 카나, 알려 줄게.”
가방에 디자인화와 천을 정리해서 넣던 카나가 냉큼 길쭉하게 자른 천 두 개를 가지고 루비카의 옆에 갔다.
“자. 이걸 이렇게 잡고 반대편을 넣어 주고…….”
루비카의 말에 따라 손을 움직이자 순식간에 예쁜 매듭이 완성됐다. 설명이 쉽고 간단해 외우기도 좋았다. 카나는 매듭 서너 개를 연거푸 만들어 냈다.
“한두 번 해 본 걸로 외우다니.”
디자이너는 디자이너였다. 루비카는 새삼 감탄했다.
“과찬이에요.”
카나가 마지막으로 매듭 묶는 법을 메모한 쪽지와 완성한 것을 가방에 넣었다. 루비카는 테이블에 있는 작은 종을 흔들어 하녀를 불렀다. 하녀는 바로 카나의 가방을 대신 챙겨 나갔다. 그런데 하녀를 따라가야 하는 카나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었다.
“마담?”
“……저, 부인. 방금 상의했던 드레스요. 그건 누구의 디자인일까요?”
“누구의 디자인이긴 당연히 카나의 디자인이지.”
루비카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카나는 그 앞에 가만히 서서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카나,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네.”
그리 말하고 카나가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루비카는 하녀에게 단둘이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문을 닫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문이 닫힌 후 카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마님, 이 디자인은 제 디자인이 아니에요. 전 실루엣을 조금 손보기만 했어요. 가슴에 매듭을 달아 장식한다는 결정적인 아이디어와 그 매듭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은 마님인 걸요.”
카나의 말에 루비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네, 마님은 공작 부인이시지요.”
카나가 의기소침해 대꾸했다. 디자이너란 직업은 과부나 몰락 귀족의 딸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을 때 하기에 알맞은 직업으로 여겨졌다. 남편이 있고 또 지위 높은 귀부인이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귀족의 부인은 정성들여 만든 손수건이나 옷을 누군가에게 선물해야지 팔아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귀족이 자신이 만든 옷을 판다면 이는 귀족에게 무척 불명예스러운 일이며 몰락의 상징이다.
“나는 그 옷이 카나의 디자인으로 알려져도 괜찮아.”
그리 말했으나 카나는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카나의 입술 근육이 떨렸다. 루비카는 그녀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죄송합니다. 방금까지 들떠서 꼭 하겠다고 했었는데……. 이 디자인이 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카나의 말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쁜 옷을 소개하고 그걸 사람들이 입어 주기만 한다면 그 옷의 디자이너가 누구로 알려지든 상관없었다.
“난 상관없어.”
“저는…… 상관있어요.”
카나가 감정을 이기기 힘든지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녀는 최근 점점 디자이너로서의 품위가 태도에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카나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루비카는 어떤 사연이 있음을 짐작했다.
“마님, 저는 남편을 만나기 전 수도의 유명한 의상실에서 공부를 했어요. 결혼 이후에는 옷을 만들지 않았지요. 남편은 제 재능이 아깝다며 다시 해 볼 생각이 없냐고 권했지만……, 남편의 일을 도와주는 동안 줄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싫었어요.”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자신과 옷을 만들 때, 레이스에 대해서 의논할 때 카나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옷 만드는 걸 즐거워한 사람이 사실은 줄자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수도의 의상실에서 공부할 때, 무척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저보다 네 살 많은 그 친구는 재봉 솜씨도 뛰어났고 무척 활동적이고 야심도 많았어요. 저는 그 친구가 좋았고 그 친구가 가지고 있던 재능도 좋았어요. 분명 나중에 빛을 발할 거라고 믿었지요.”
카나의 얼굴에 아주 잠깐이지만 반짝거렸다. 루비카는 그 느낌이 뭔지 안다. 세사르 경을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품고 있는 꿈에 이끌렸다. 카나도 분명 그랬겠지.
“하지만 그는…… 재능에 비해서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마님도 아시겠지만 가끔 야심이 발목을 잡을 때가 있잖아요. 그 친구가 그런 편이였어요. 디자인을 할 때 비워 내는 법을 몰랐어요. 사이가 좋았던 저희는 승급 시험 준비도 같이 했답니다. 서로 디자인한 걸 보여 주고 조언하고…….”
카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얼굴에 점점 침통한 빛이 어렸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정? 아니면 야심? 그렇지 않으면 초초함?
“승급 시험 날 저보다 앞선 순번이던 그 친구는…… 제 디자인을 자기 것으로 발표했어요. 그 친구는 엄청난 호평을 받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것과 똑같은 디자인을 발표한 저는 친구를 따라 했다는 손가락질을 받았어요.”
설마 했던 가정대로였다. 루비카는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뒤 저는 쫓기듯 고향으로 돌아와 남편을 만나 결혼했어요. 그리고 두 번 다시 디자인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사람이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면 뭐든 할 수 있게 되더군요. 하지만 마님, 제가 하지 않은 디자인을 제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루비카는 잠시 침묵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이 디자이너로서 카나가 버릴 수 없는 양심이자 자존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그랬구나. 그럼 그 친구는 지금?”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지요.”
“설마?”
“네, 크리스토퍼예요.”
루비카의 눈동자가 커졌다. 크리스토퍼는 지난 삶의 그녀도 알 정도로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특히 그가 디자이너로 데뷔하면서 내놓은 폭 넓고 풍성한 레이스로 가녀린 팔목을 강조하는 앙가장뜨 스타일 소매는 많은 극찬을 받으며 유행했었다.
“설마, 크리스토퍼 하면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그 소매 디자인을……?”
“네, 제가 했어요. 그렇게 말하면 다들 질투에 눈이 멀어 없는 사실을 날조해 동기를 헐뜯는 사람 취급하지만요.”
카나가 자조하며 대답했다. 루비카는 그녀 앞에서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끼고 사랑했던 친구가 카나의 디자인을 훔쳤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카나의 디자인을 입으면서 크리스토퍼를 칭송했다. 아무도 카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설사 듣다 하더라도 성공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에 그러는 것으로 취급했다.
“카나.”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없어 루비카는 잠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카나는 울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심장에는 수백 개의 바늘이 꽂혔었다. 그 일에 한해서는 어지간한 자극에도 담담했다.
옷 만드는 일은 이제 하지 말자고 생각했으면서 생계가 들이닥치자 결국 줄자를 잡고 가위를 들었다. 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크리스토퍼 같은 일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훔치지는 않았어도 루비카가 한 디자인을 자신의 것이라 발표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마님. 한다고 해 놓고서……, 제 디자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제가 그래서 아직 이 모양인가 봐요.”
누군가는 기꺼이 양심을 팔아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었다. 하지만 카나는 기회 앞에서 차마 그것을 던지지 못했다.
‘억울해.’
카나 같은 사람이 손해를 보는 세상이 싫다. 크리스토퍼 같은 이는 떵떵거리는데……. 루비카는 제 일처럼 안타깝고 서러웠다. 이대로 날려 버리기에는 기회가 너무 아까웠다.
“카나, 네 이름 진짜가 아니지? 크리스토퍼도 마찬가지고.”
“네.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고객이 외우기 쉽도록 예명을 써요.”
“나도 그럼 되지 않을까? 공작 부인이 아니라 디자이너로 소개하는 거야.”
“네?”
“네 친구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줬다고 하자. 사정이 있어서 얼굴을 드러내 놓고 활동은 하지 못한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뜻밖의 아이디어에 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 부인인 루비카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예명을 쓰다니. 그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음, 예명은…… 그래, 외우기 쉽게 ‘베리’가 좋겠다.”
“‘베리’요?”
“응,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과일이야.”
루비카가 말한 좋아하는 사람이란 아르망이었다. 하지만 클레이모어 공작이 딸기 종류를 좋아하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카나는 뜻밖의 애정 행각에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 그것 참 좋은 예명이네요.”
“그리고 나도 네게 고백할 게 있는데……, 사실 매듭을 묶는 방법은 내가 처음으로 고안해 낸 게 아니야. 선원이 내게 가르쳐 줬어.”
“네?”
그처럼 고상하고 예쁜 매듭을 거친 바다 일을 하는 선원이 알려 줬다는 게 불가사의했다. 그보다 선원은 대체 어떻게 만난 걸까?
‘참, 마님은 무역상 집안 출신으로 항구와 가까운 곳에 살고 계셨지.’
그래도 준남작가 집안 출신 여식과 선원이라니 조합이 이상하다. 하지만 카나는 루비카의 성품을 봤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고 홀로 납득했다.
“크리스란 선원이었는데 아내가 그의 매듭을 좋아했었대. 그래서 아내가 죽은 뒤에도 심심할 때마다 매듭을 만드는 방법을 이것저것 고안 했대. 그가 내게 그걸 가르쳐 주고 나는 조금 더 쉽게 묶는 방법을 생각해 냈을 뿐이야.”
“그럼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아.”
지금쯤 크리스는 갓 열 살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항구에서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선원일을 배우고 친구들과 낚시를 하고 있겠지.
“만나는 건 불가능해. 연락이 끊겼거든.”
만나도 크리스는 매듭 묶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게 본인이 고안해 낸 방법이라는 소리에 두 눈을 끔뻑이며 ‘미치셨나요?’라고 반응할 것이다.
“아내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이본느. 예쁜 이름이지?”
“그럼 마님,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카나가 규방에 있는 자수 바구니에서 끈을 꺼내 루비카가 알려 준 방식대로 예쁜 매듭을 묶었다.
“사실 디자인에서 이름은 무척 중요해요. 아무리 예뻐도 부인들에게 ‘매듭’이라고 소개하면 그건 그냥 매듭이에요. 닻을 묶거나 나뭇가지를 묶기 위한 것이 먼저 연상되지요. 어쨌든 그게 첫 번째 매듭의 사용처니까요. 하지만 이 매듭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 주면 그건 오직 귀부인을 꾸며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지요.”
카나의 말에 루비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알 듯 말 듯 아리송하다.
“구두와 신발이 다른 것처럼 말이에요.”
“아.”
조금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