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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20화 (120/212)

# 12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0화

* * *

“카나 님.”

공작 부인의 부름을 받은 카나가 규방에 도착하기 전 하녀 하나가 말을 걸었다. 카나는 별말 하지 않아도 그 하녀가 앤의 심부름으로 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걸 전해 드리면 된단다.”

가방에서 작은 옷상자를 하나 꺼내자 하녀가 잽싸게 받아 갔다. 옷상자에는 카나가 요 며칠 정성들여 만든 회심의 역작이 담겨 있었다. 카나는 앤은 물론이요 공작도 그 옷을 마음에 들어 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대체 왜 이미 임신하셨는데 그런 옷을 입히시지.’

임신한 후에도 부부 관계가 시들해지기는커녕 더 불타오르는 경우도 있다 들었다. 공작 내외의 금슬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았으나 공작 부인 몰래 일을 진행하는 게 어쩐지 수상했다.

―귀족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아도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게 좋아.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아남는 비결이지.

카나는 죽은 남편이 종종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고객에 한해서는 부인인 카나에게조차 함부로 말하지 않을 정도로 입이 무거웠다.

‘괜히 궁금해하지 말자.’

카나는 마음을 다 잡고 규방 앞에 섰다. 지금은 그런 걸 궁금해할 때가 아니다. 공작저에 다녀온 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서 공작 부인이 다시 불렀다. 카나는 혹 실수하거나 놓친 게 없는지 걱정스러웠다.

“마님, 마담 카나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그래.”

규방 문이 열리자 온화한 표정의 루비카가 카나를 맞이했다. 루비카는 갈색 머리를 예쁘게 말아 올려 깃털과 화단에 핀 야생화로 장식했다. 언제 봐도 참 센스가 대단한 분이라고 감탄했다. 그녀는 야생화를 저렇게 머리에 꽃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카나는 루비카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걸 배웠다. 수도의 화려한 디자이너도 그녀의 센스를 따라잡지 못할 거라고 새삼 평했다.

‘그에 비해 나는 한없이 부족하지. 색을 쓰는 것도, 레이스를 배치하는 것도 디자이너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에 한참 모자라.’

변명을 하자면 너무 오랫동안 옷 만드는 일과 멀리 떨어졌다. 그녀의 남편이 종종 재능이 아까우니 함께 옷을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권했으나 카나는 거부했다. 그녀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지나고 보니 참 아까운 시간이었다.

“부인, 오늘도 참 아름다우세요.”

하지만 카나는 지난 시간을 안타까워하기보다 루비카 앞에서 공손히 웃으며 인사하는 쪽을 택했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 대신 새로 담기 시작한 물을 소중히 여기자. 그녀는 그리 결심했다.

“예쁘다니 그렇지 않아.”

“지금 영지 내에서는 소문이 자자해요. 각하를 사로잡은 공작 부인이 정말 그렇게 예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처음 그런 소문이 났을 때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최근 공작의 행보로 인해 그 소문은 힘을 얻게 되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마님이 무척 예쁘다고 말씀드린답니다.”

“그런, 실제로 날 보면 실망할 텐데…….”

루비카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썩 기분이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 물론 공작 부인을 처음 본 사람은 그녀가 평범하기 짝이 없다고 평할 것이다. 하지만 카나는 루비카가 가지고 있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분위기와 가끔 붉게 반짝이는 적갈색 눈의 신비함은 어지간한 미녀도 가지기 힘든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부르셨나요? 드레스를 지으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혹시 그때 주문하지 못하신 게 있으신가요?”

하녀가 가방을 테이블로 옮기고 규방을 나간 뒤 카나가 질문했다. 그녀는 예전보다 접객을 좀 더 잘하게 되었다. 분위기를 온화하게 만든 다음에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른 이유를 슬쩍 떠 보았다.

“아, 그건 아니야.”

카나는 걱정하며 루비카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 먼저 운을 떼기가 두려웠다.

“카나, 저번에 우리끼리 디자인했던 드레스 말이야.”

“그 로열 블루 옷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기억하는구나.”

“그럼요.”

워낙 특이했던 디자인이라 잊는 게 더 힘들었다. 그날 밤, 카나의 첫째 딸이 디자인화를 보고 감탄을 질렀다. 루비카가 만들었던 매듭을 보여 주자 딸은 무척 예쁘다고 드레스에 사용하지 않을 거면 자기 머리 장식에 써도 되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 드레스를 만들어 줄 수 있어?”

“네? 하지만……”

‘어차피 못 입잖아요.’라는 뒷말을 카나는 꿀꺽 삼켰다. 루비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기 때문이다.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가 차 모임이라는 걸 열려고 하는데.”

“차 모임이요? 차……, 그게 뭔가요?”

루비카의 말에 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나는 ‘차’라는 게 일단 뭔지 몰랐다. 사막을 넘어 해상을 통해 들어오는 차는 그 이름조차 못 들어 본 사람이 많았다.

“음,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저 먼 사막을 거쳐 온 매우 희귀한 말린 나뭇잎의 일종입니다.

칼에게 처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그는 무척 진지했지만 그 첫 마디를 듣자마자 루비카는 ‘뭐야, 나뭇잎을 우린 물을 마신다고? 내가 초식동물도 아니고.’라고 생각했다. 칼처럼 있는 그대로 설명하면 상대편에게 거북스런 반응만 이끌어 낼 뿐이었다.

“저 멀리 사막 너머에서부터 육로와 해로를 건너 온 무척 희귀한 재료야. 커피처럼 물에 우려 마시는 건데 훨씬 더 비싸고 구하기 힘들어.”

“아, 네.”

카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하다. 처음 듣는 음식에 대한 것인데 바로 알아듣는 게 더 이상하지. 거기에 커피는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여서 비교적 비싸지 않은 편이었다. 루비카는 좀 더 와 닿을 수 있게 설명하기로 했다.

“여기 내 주먹만 한 크기의 차가 금괴 하나 값이야.”

“네?”

그에 비해 커피는 마차 다섯 대를 가득 채워야 금괴 하나 값이 될까 말까 했다. 카나는 그처럼 비싼 음료를 마신다는 사실에 놀랐다. 역시 금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보다 적절한 게 없다. 좀 속물 같긴 하지만 칼처럼 향과 맛, 효능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 금이 더 와 닿을 것이다.

“무척 특별하고 좋은 음료지.”

“그렇군요. 그럼 차 모임이라는 건 함께 모여서 차를 마시는 건가요?”

“응, 하지만 커피를 마시는 것과는 달라.”

일상적으로 마시는 커피는 사실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진탕 논 남자들이 해가 뜨기 전 커피하우스에서 해장할 때 마시는 음료랄까. 그 커피하우스에 출입이 가능한 여자는 오직 매춘부뿐이었다. 그래서 커피를 일상적으로 소비함에도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차 모임이란 날이 좋은 날, 좋은 친구들을 불러서 차의 맛과 향을 논하며 명상을 하고 차를 통해 하늘과 대지의 기운을 느끼며…….”

루비카는 언젠가 칼이 그녀에게 한 일장 연설을 그대로 옮겼다. 카나는 루비카가 그랬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명상이니 하늘과 대지의 기운이니. 상대편의 혼을 쏙 빼놓기에 알맞은 말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친밀한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며 사교를 다지는 모임이야.”

“파티 같은 건가요? 하지만 농번기에 귀족들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여는 건 금지되어 있어요.”

“초청하는 귀족들에게도 화려한 옷은 지양해 달라고 부탁하고 문학이나 미술에 대해서 토론하자고 할 거야. 차 모임은 여태까지의 파티나 무도회랑은 전혀 다른 행사가 되게 하고 싶어.”

“문학이나 미술에 대한 토론이요?”

“커피하우스에서 남자들은 거기에 대해서 토론하며 밤을 지새우잖아. 삶을 살아가는 데 무척 중요한 주제라며 으쓱거리는 데, 내가 여는 차 모임에 대해 뭐라 하려면 당장 커피하우스부터 문을 닫아야 할걸.

남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커피하우스는 계절에 상관없이 상시 영업 중이다. 커피하우스에 들락거리는 게 삶의 낙인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만약 커피하우스를 폐쇄시키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럼 확실히 불만이 있어도 문제 삼기 힘들겠군요.”

“우리가 그때 디자인했던 그 드레스는 보석을 많이 달지 않아도 충분히 화려하고 예뻤어. 오히려 보석을 달면 장식이랑 합쳐져서 너무 과하게 느껴질 거야. 하지만 실내복이나 산책 드레스보다 화려해서 기분을 낼 수 있지. 산책 드레스보다 보석을 덜 단 옷은 욕하기 어려울 거야.”

“네, 그 드레스는 가슴에 브로치 같은 장식을 많이 달지 않아도 되니, 확실히 마음먹으면 보석 하나 달지 않고 옷을 만들 수 있지요.”

“아예 색다른 행사에 색다른 드레스니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뭣 모를 테니 ‘원래 차 모임에는 이런 옷을 입는데요.’라고 설명하면 다들 믿을걸?”

루비카는 카나에게 귀여운 사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여전히 망설이는 그녀에게 미끼를 던지기로 했다.

“차 모임에 초대한 귀부인들이 드레스에 대해 궁금해하면 네 의상실을 소개할게.”

팔랑팔랑 카나의 귀가 흔들렸다. 돈 앞에 장사 없다. 특히 카나처럼 한참 돈이 필요한 사람은 더 그랬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혹여나 혹평을 받으면 마님께서 곤란해질 텐데.”

“걱정 마. 많은 사람은 초대 안 하고, 공작가에 호의적인 사람만 초대하기로 했어.”

루비카는 호언장담했다. 그녀는 이 차 모임을 성공시키기 위해 나름의 계략을 짰고, 성공시킬 자신 있었다.

“탕트 백작 부인을 초대하기로 했어.”

“탕트 백작 부인이요?”

카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탕트 백작 부인은 수도 사교계에까지 이름이 날 정도로 명망이 있었다. 백작 부인과 연이 생기면 사교계 시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카나에 대한 입소문이 날 수 있다. 게다가 백작 부인에게는 올해 사교계에 데뷔할 예정인 딸이 있다. 데뷔를 준비 중인 소녀는 많은 드레스와 모자, 장갑이 필요했다. 카나는 루비카의 유혹에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해 볼게요, 부인!”

루비카는 덥석 자신의 손을 잡고 눈을 빛내는 카나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귀여운 사기를 칠 차례였다.

“좋아, 그럼 내 옷도 그때 우리가 디자인한 것과 비슷한 스타일로 준비하자. 엘리제에게는 드레스를 완성한 다음에 보여 주고 입기 싫다고 하면 억지로 권하지 말자.”

루비카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먼저 보여 준 다음에 설득하기로 결정했다. 백 마디 말보다 그게 더 낫다. 이미 루비카에게 넘어간 카나는 앞뒤 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카는 일단 카나가 들고 온 천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로열 블루 색의 천에도 뒤지지 않을 천을 찾아냈다. 하얀색 바탕에 큼직하게 이국적인 꽃이 그려진 천이 단번에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운데에는 엘리제 님의 드레스처럼 매듭을 다는 게 좋겠어요. 밝은 빨강이랑 녹색을 교차해서 하는 건 어떨까요?”

“무늬에 빨간색이랑 녹색이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아. 그냥 같은 색으로 통일하는 것보다 재미도 있고.”

“너무 똑같으면 심심할 테니 스커트의 레이스나 프릴은 좀 다른 방식으로 달아 볼게요. 염색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루비카와 카나는 의욕이 넘쳤다. 둘은 순식간에 드레스에 맞춰 구두와 장갑, 부채의 디자인을 정했다. 내친 김에 앤의 것도 했다.

“세 벌 완성하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보석을 달지 않으니 생각보다 시간은 많이 안 걸릴 것 같아요. 스커트의 디테일에는 손이 좀 가겠지만, 가봉까지는 일주일이면 충분해요.”

“그럼 그때 보도록 하자.”

“네, 이후에 옷을 완성하는 시간까지 고려해서 차 모임 날짜를 잡아 주시면 좋겠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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