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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17화 (117/212)

# 11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7화

‘가만.’

플레누스 산에는 다양한 마물이 살고 있었다. 드래곤의 권역처럼 사람 수백을 죽일 정도로 강한 것은 없었으나 골치 아픈 종류의 것이 많았다. 클레이모어의 기사단은 강하긴 했으나 그런 마물을 다루는 데 전문적이지 못했다. 기사란 기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연마하는 존재다. 그에 반해 모험단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싸움에는 기사만큼 대단하지 못했으나 마물을 다루는 데는 능했다.

‘이것 참, 세사르 경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어쩜 이렇게 적시적기에 실종될 수가 있을까. 에드가는 세사르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괴짜인 그는 세로스 산맥의 식물도감을 집필하는 동안 이미 수십 번의 사고를 쳤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목숨이 열 개여도 모자랐을 텐데 세사르 경은 멀쩡했다. 죽음조차 세사르를 기피하는 것 같았다.

“어머, 어쩜 좋아. 거긴 정말 위험한데.”

하지만 세사르의 지난 일화를 모르는 루비카는 발을 동동 굴렀다. 걱정하는 루비카의 모습에 에드가는 어쩐지 입이 삐죽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게 정말 달갑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그간 세사르의 행적을 모르는 그녀는 에드가의 말에도 얼굴을 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계속 식사하는 건 불가능하겠군. 에드가는 시종에게 눈짓해 접시를 치울 것을 명령했다.

“마영석 때문에 계약한 모험단의 수색대를 보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세사르 경은 좀…… 칠칠치 못해 흔적을 많이 남길 테니 하루 이틀이면 찾아내리라 장담하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에드가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루비카의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에드가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 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따라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식사 중이었잖아.”

“나는 다 먹었어.”

루비카는 이렇게 식사를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는지 좀 고민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 부인인데 이렇게 행동해도 될까?

주위의 평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살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인이나 하녀가 ‘역시 마님은 현명하십니다!’ 같은 눈초리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하지만 에드가는 식사 순서 따위 상관없이 생선 요리부터 내오라고 했고. 음, 이렇게 자리에서 마음대로 일어났잖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데 왜 나는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 그것도 불량 공작 부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이런 마음가짐이니 자꾸 삐끗해서 현명한 공작 부인이란 소리를 듣는 걸까?’

루비카는 마음을 다시 다지기로 했다. 그녀는 사치스럽고 현명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겠다고 결심했다. 안 그래도 자꾸 주변에서 에드가와 자신을 잉꼬부부로 오해해 곤란하던 차였다.

“아니, 갈게.”

그녀는 결의를 다지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다짐과 달리 하녀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각하의 기분을 맞추느라 식사 중에 일어나셔야 하다니…….’

한번 완성된 이미지는 깨기 어렵다. 루비카는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씨 착한 부인으로만 보일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에드가는 그녀가 일어서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갔다. 루비카는 열심히 발을 놀려 그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발걸음을 빨리해도 에드가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기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세 걸음 걸을 거리를 그는 한 걸음에 걸었기 때문이다.

“에드가.”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가 그를 불렀다. 한참 앞서 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

그제야 그는 무슨 실수를 했는지깨달았다. 시종은 아주 짧지만 공작이 입술에 욕설 비슷한 것을 담는 걸 들었다. 남을 비난해도 항상 우아하게 비꼬던 공작이 하층민이나 쓰는 말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공작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루비카에게 다가갔다.

“내가 배려가 없었군. 사과하지.”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을 뿐 그는 누군가를 따로 사귀거나 호감 어린 관계를 유지한 적이 없다. 그래서 당연히 했어야 할 배려를 놓치고 말았다. 순순히 사과하는 에드가의 모습에 루비카는 화답하기는커녕 사색이 되어 외쳤다.

“당신 아까부터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친절하게 구는 이유가 뭐야? 이쯤에서 황새인 내가 뱁새 다리를 배려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날 놀려야 하는 거 아냐?

빠직. 시종은 에드가의 이성 한 귀퉁이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시종은 한순간 에드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분노를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머금고 루비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실수야. 넘어가.”

루비카는 겁에 질린 얼굴로 에드가를 바라봤다. 아직 죽을 때가 되기에는 이른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아까 먹은 농어구이에 요리사가 약이라도 탄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응?”

루비카가 손을 잡지 않자 그가 초조해하며 재촉했다. 루비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을 품은 맹수 같았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다정한 행동을 하는 게 당황스러웠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에드가의 주변에는 위험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지금 내민 손을 잡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손을 잡자 활시위처럼 팽팽했던 분위기가 천천히 이완되었다.

“그럼, 가지.”

그리고 에드가는 평소 보폭으로 걸으려다 멈칫했다. 또 아까와 같은 실수를 할 뻔했다. 그는 곁눈질로 루비카를 보며 속도를 맞추려 애썼다. 일평생 남의 걸음 속도 따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던 사람이다. 갑작스레 타인에게 맞추려니 걸음걸이가 엉망이 되었다. 어기적어기적 걷는 그의 요상한 걸음걸이에 그녀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귀엽네.’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무슨 속셈인지 의심스럽긴 했으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 따지면 제법 기분이 좋았다. 루비카는 자기보다 키가 한참 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옳지, 옳지, 잘한다.’ 라고 말해 주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그를 알면 알수록 이전에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이미지가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에드가가 그녀를 안내한 곳은 집무실 옆 서재였다.

“와.”

루비카는 처음 들어온 에드가의 서재에 놀랐다. 꼭 오래된 수도원의 도서관을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끝없는 장서들과 검고 튼튼한 책장은 예사물건이 아닌 듯 보였다.

“여기 있는 건 자주 보는 것들뿐이야. 서쪽 별채에 책이 더 많이 있어.”

에드가가 덧붙인 설명을 듣고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꽂힌 책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아, 그 책은…….”

“이 금박 무늬 너무 예쁘다!”

책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려던 에드가는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그녀가 관심을 가진 것은 표지지 내용이 아니었다. 루비카는 홀린 듯 책을 바라보았다. 네모난 사각형 안에 꽉 들어찬 아름다운 무늬는 그녀를 황홀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그녀는 한참을 책장에 꽂힌 책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참, 여긴 왜 데리고 온 거야?”

못 말리겠군.

하지만 꼭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에드가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는 서재 귀퉁이에 처박혀 있던 상자 하나를 꺼냈다. 딱 봐도 우울한 느낌이 드는 상자를 열자 온갖 잡동사니가 나왔다. 그는 그중에서 작은 화분 하나를 꺼내 루비카에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예쁜 식물은커녕 퀴퀴한 냄새가 나는 흙만 있었다.

“이건 세사르 경이 처음으로 실종되었다가 돌아왔을 때 들고 온 거야. 선물이라며 내게 주더군.”

“선물이라고?”

“그래, 이런 축축한 흙만 담긴 걸 오크의 축복을 받은 거라고 내밀더군.”

“오크의 축복을 받은 거라고?”

루비카는 믿을 수가 없어 그가 한 말을 바보같이 되풀이했다. 오크는 사람에게 무척 공격적이다. 그리고 항상 기분 나쁜 냄새를 풍겼다. 오크의 축복이라는 말은 저주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그를 찾는 일주일 내내 기사단은 온갖 고생을 했는데 정작 찾았을 때 그는 어찌나 태평한 낯짝이던지.”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예쁜 장미꽃을 만들 테니 네가 투자해야 된다고 자신을 찾아왔던 그를 떠올렸다. 정말이지 사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치는 친척이었다.

“그리고 이건 고블린에게 선물받았다는 포도주. 아, 따지 마. 실험한 결과 안에 유독한 물질로 가득 차 있다고 했어. 그리고 이건 세이렌에게 선물받았다는 오르골. 참, 내. 요즘 세상에 세이렌 같은 게 살아 있다니. 정말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믿는 척할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에드가는 서재 귀퉁이 상자에서 별별 특이한 물건을 다 꺼냈다. 하나같이 쓰레기로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이게 모두 실종된 그를 찾았을 때 들고 있던 물건이야.”

“세상에!”

에드가의 말을 들으니 세사르는 단순한 괴짜 수준을 넘어, 마물들의 친구쯤 되어 보였다. 루비카는 그렇게 수많은 마물을 만나도 죽지 않고 선물까지 받아온 사람의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 자식…… 아니, 세사르 경은 식물도감을 집필하는 동안 수없이 많이 실종이 됐어. 처음에는 우리도 신경을 좀 쓰고 걱정했지만 그를 찾으면 언제나 하는 말이 ‘아, 내가 한참 오크의 파티에 초대돼서 즐기고 있는 중이었는데 당신들이 찾는 통에 쫓겨나고 말았잖아.’ 그런 이상한 소리뿐이었지.”

실종이 한두 번이어야지. 참다못한 선대 공작이 호위라는 이름의 감시자를 붙이고서야 그 기행은 끝났다.

―아, 드래곤의 권역에는 온갖 희귀한 식물이 난다고 하더군. 드래곤아이처럼 알려진 것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아. 개중에는 무척 좋은 향을 내는 나무 같은 것도 있다고 들었어. 내 두 눈으로 보고 이에 대해 기록하고 싶은데…… 그럼 식물학계에 길이길이 남을 업적이 될 거야.

세사르는 때때로 그리 말했다. 한번은 마영석을 찾으러 드래곤 이베르의 권역에 가는 모험단에 자신도 포함시켜 달라는 황당한 요청을 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사선을 넘나드는 모험단에게 그 같은 사고뭉치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드가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도 드래곤의 권역에 혼자 가는 미친 짓까지 벌일 정도는 아니라고 안심했는데.’

그런데 플레누스 산에 가 버렸다. 조금 화났지만 한편으로 거기 가서 이상한 마물 친구나 잔뜩 만들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내가 그를 걱정하지 않는 이유야.”

“그, 음…….”

루비카는 한동안 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세사르 경과 장미꽃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 무척 즐거웠다. 그래서 조금 특이했던 그의 첫인상은 희미해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대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운이 아주 좋은 분이구나.”

그녀는 가까스로 적절한 감탄사를 찾아냈다.

“그보다 죄 없는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남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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