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5화
에드가가 손톱에 약을 다 바를 때쯤 기사의 손동작이 멈추었다. 에드가는 얼굴이 퉁퉁 부은 질레한을 바라봤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원래 냉정했다. 필요악이라는 것을 배우며 자란 그는 동정심 많은 루비카와 정반대 타입이었다. 수백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한 명의 목숨을 버리는 것에 망설여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억울한가?”
에드가의 질문에 질레한은 고개를 저었다. 본심은 억울했으나 그런 말을 내뱉으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 억울해하지 말아야지. 모독죄에 따른 처벌을 했을 뿐이니.”
어린 나이에 공작이 된 에드가는 본때를 보여 줘야 할 때는 확실히 보여 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설프게 누르면 질레한은 꿈틀거릴 것이다. 그리고 이 잔꾀 많은 친척은 감히 에드가를 건드리지 못하고 루비카에게 손을 대겠지. 그 전에 확실히 밟아 주어야만 했다.
“개발 중인 무기를 대륙 남쪽 나라에 지원하기로 했다. 신무기를 지원해 주는 대신 새로 개척할 땅의 개발권을 받기로 했지. 그 일을 담당하면 고작 모험단을 중개하는 것보다 몇 배에 달하는 돈을 굴릴 수 있을걸? 마영석은 시간이 지나면 빛을 잃는 재화지만 개발권은 이야기가 다르지.”
질레한은 무역으로 벌어들일 어마어마한 돈을 계산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그 일은 자연히 자신에게 맡겨질 터였다. 그러나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각하, 공작 부인께 잘못했다는 이유로 오래 일한 친척을 내쳤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바라던 바야.”
질레한의 무의미한 발악에 에드가가 입꼬리 한쪽을 슬쩍 올리고 웃었다. 비열한 미소조차 그가 지으니 무척 매혹적이었다.
“부디 주변에 내가 공작 부인을 싸고 돈다는 소문을 내 주길 바라네. 그래야 벌레들이 그녀를 못 괴롭히지.”
질레한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욕설을 가까스로 참았다. 에드가와 눈이 마주치자 뱀 앞에 선 생쥐처럼 소름이 돋았다. 소문을 빌미로 에드가를 압박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여태까지 그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고 여겼던 것이 오판이었다. 에드가는 그의 삿된 장난질을 봐주었을 뿐이었다. 이제 보니 그는 악명을 즐기는 타입이기까지 했다.
용무를 마친 에드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을 떠나려던 그의 눈에 질레한 부인이 들어왔다. 루비카와 사이가 괜찮은 편인 그녀가 생계의 어려움에 대해 하소연 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루비카가 그대를 동정하지 않도록 생계는 유지하게 해 주겠다. 하지만 그녀에게 하소연하면 그때는 국물도 없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질레한은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가, 각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에드가는 이미 몸을 돌려 휑하니 저택을 나간 뒤였다.
한때 클레이모어 가문 내에서 제법 실력을 행사하던 그는 이제 빌빌거리는 친척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실력보다 탁월한 입담으로 여론을 주름 잡아 한자리 차지했던 그는 자신의 입담을 지나치게 믿은 죄로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다.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에드가는 기분이 퍽 좋았다. 낮까지만 해도 그는 집무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루비카의 목소리만 듣고 있어야 했다. 가슴이 아프고 시려서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다. 그는 무척 비참했다.
집무실의 소란이 잠잠해진 후부터는 분노가 그를 잠식했다. 오후에 일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해가 지자마자 그는 응징을 위해 질레한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그 결과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갔다.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친척들에게 너무 무르게 대했나 보군…….’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뱀, 지나칠 정도로 공사를 구분하는 자식.
에드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악평을 한 순간에 부정했다. 너무 물렀다. 그가 진작 친척들을 잡았다면 그들은 루비카 앞에서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지 않았을 것이다. 에드가는 앞으로 그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귀찮다는 이유로 좌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질레한 경, 각하는 바쁘시네. 그분이 어떤 물건을 발명하는지에 따라서 왕국민의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의 질이 달라진다는 걸 명심하게.
한차례 분노가 가라앉자 루비카가 질레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척이나 단호한 어조였다. 키가 큰 그에 비해 루비카는 작고 가냘파 보였다. 그의 주변을 지키는 호위들과 달리 그녀의 손과 허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루비카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그를 지켜 주었다. 그조차도 상대하려면 가끔 골머리를 앓는 질레한에게 당당히 제 할 말을 했다. 마지막에 호위를 불러 아예 쫓아내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멋진 여자.
멋지다는 말은 오직 남성을 수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에드가는 그때 루비카에게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지키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는 광대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각하께서 집무실에서 일하실 때는 나조차 함부로 연락하지 못하네. 그분은 어제도 바쁘고, 오늘도 바쁘고, 내일도 바쁜 사람이니까.
루비카가 했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건 그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했던 말이었다. 그는 가끔 자신이 보였던 비정한 태도를 떠올리며 이불을 발로 찼다.
그가 그 말을 내뱉었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면 자신을 잘난 척 심한 재수 없는 종자라고 평했겠지. 에드가는 그때 자신이 했던 모든 행동과 말을 저주했다.
하지만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루비카가 입에 올리는 순간, 저주스러웠던 시간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그에게 다가왔다. 심장이 벅차올라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이게 사랑인 걸까?
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 그를 지배했다. 제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었으나 기분이 좋았다. 그녀 때문에 속상하고 심장이 아플 때조차도 그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이렇게 기분이 널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 알았다.
‘그나저나 처리할 일이 한둘이 아니군.’
질레한의 주장으로 계약한 선발대의 처리 등 촌각을 다투는 일들이 산재했다.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랐다. 에드가는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의 리스트를 꼽으며 시간을 체크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만찬이 시작되고도 남았잖아.’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저택을 나오기 전에 다시 돌아올 거란 언질을 하지 못했다. 루비카를 비롯한 주변 사용인들은 그가 국왕의 급한 연락을 받고 수도로 출발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루비카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이미 식사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식사 시간에 오물오물 음식을 먹는 그녀를 보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것 같아 시선을 필사적으로 돌렸다. 그리고 곁눈질로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워낙 티를 내지 않았기에 그가 그 시간을 좋아한다는 건 충실한 집사 칼도 몰랐다.
에드가는 욕설을 삼키며 마부에게 마차를 빨리 몰 것을 명했다.
“각하, 어차피 저택까지의 거리는 채 십 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깝습니다.”
“닥치고 빨리 몰아.”
마석마차의 연료가 아까울 정도로 짧은 거리였다. 마부는 어리둥절했지만 공작의 다급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답은 정해져 있고, 그는 대답하기만 하면 되는 분위기였다.
“알겠습니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 에드가는 초조하게 발을 까닥였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튕기듯 일어서서 화살처럼 뛰어갔다. 평소와 다른 에드가의 행동에 호위 기사들마저 당황하며 그를 따랐다.
“각, 각하!”
“수도로 가신 게 아니었습니까?”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그와 마주친 시종들이 화들짝 놀라 인사했으나 에드가는 본체만체하고 뛰어갔다. 공작이 뛰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겨도 그는 언제나 우아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잊으신 물건이라고 있는 걸까?”
“각하께서 친히 뛰실 정도니 보통 일이 아닌가 보구나.”
호위 기사와 시종들은 공작의 목적지가 집무실이리라 생각했다. 그가 직접 챙겨야 할 정도로 중요한 기밀 서류를 깜빡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숨이 찰 정도로 뛰어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다.
“에그머니나!”
“각하!”
갑작스런 에드가의 등장에 식당에 있던 사용인들 모두 놀랐다. 음식을 나르던 시종은 깜짝 놀라 손에 든 접시를 놓칠 뻔했다. 루비카 또한 만만치 않게 놀랐다.
“에드가, 왕성에 간 게 아니었어?”
눈을 동그랗게 뜬 루비카의 질문에 에드가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답 없이 성큼성큼 걸어 그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시종들은 무척 당황했으나 재빨리 식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슬쩍 루비카 쪽을 쳐다보았다. 시종이 막 치우려던 그녀의 접시엔 요리가 반 이상 남겨져 있었다. 루비카가 음식을 이만큼이나 남기는 건 그에게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그녀가 식사를 거른 것은 마영석 일로 한참 힘들어 할 때뿐이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에드가는 튀어 나가려는 말을 목구멍에 욱여넣었다.
안 좋은 일은 많았다. 오늘 그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다. 에드가는 일단 시종이 유리잔에 따라 준 물로 입을 축였다. 루비카 앞에서 볼썽사납게 헉헉대며 말을 걸고 싶진 않았다.
루비카는 대답 없는 그의 모습에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야속하게 대답도 안하고 모른 척할 줄이야.
“돌아올 줄 알았으면 기다렸을 텐데…….”
섭섭한 마음에 그녀가 한마디 했다. 그제야 숨을 고른 에드가가 황급히 대답했다.
“당신에게 인사도 안 하고 내가 왕성에 갈 리 없잖아.”
“그럼, 대체 어딜 그렇게 간 거야?”
감히 당신에게 말대꾸를 한 질레한에게 본때를 보여 주러 갔어.
에드가는 황급히 말을 삼켰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루비카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다. 솔직히 인정하자. 그가 질레한에게 한 처벌은 좀 과격하고 잔인한 면모가 있다. 질레한의 집에 갔다는 사실을 루비카가 알면 그가 한 짓까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아, 난 늦었으니 생선 요리부터.”
에드가가 마침 전채 요리를 가져 온 시종에게 말을 걸었다.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기술에 루비카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언질 하나 주지 않고 자리를 비운 건 자기면서 ‘당신에게 인사도 없이 왕성에 갈 리 없잖아’라니. 저 섭섭한 말투는 뭐야.’
에드가가 시종이 내온 농어 요리를 해치우는 사이 루비카도 어떻게 디저트 접시 위의 케이크를 먹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섭섭함 때문인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왜 그래? 맛없어?”
깨작거리는 모습에 에드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아, 아니. 맛있어. 나 캐러멜도 좋아하고, 케이크도 좋아해. 잠깐 생각 좀 하느라 그랬어.”
무슨 재료가 싫다는 티를 내면 다음 식사 자리부터는 그 음식은 놀랍도록 자취가 사라졌다. 루비카는 좋아하는 캐러멜을 두 번 다시 못 먹는 불상사만은 막고 싶어 황급히 대답했다.
“아까 접시의 요리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게……, 음.”
루비카가 쑥스러워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대답하기 한참 망설이는 눈치였다.
‘낮의 일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그렇다고 말하면 사과하자.’
어쨌든 그녀가 친척들을 상대할 동안 집무실 안에 숨어 있다시피 한 건 그가 잘못한 거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집무실 앞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화가 나 입맛이 없었다고 물꼬를 트면 사과할 심산이었다.
“혼자서 먹으면 입맛이 없어.”
하지만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가 한 말은 뜻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