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4화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질레한 경의 대여 마차에는 한숨이 가득 찼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양팔이 잡혀 질질 끌려 나가다니. 그가 철이 들고 공작저를 들락날락한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여인이 그랬다.
‘내가 왜 결혼에 찬성했을까.’
차라리 높은 집안 출신의 여인이 와서 이러면 억울하지도 않지. 잔머리라면 자신이 있었는데 그만 자신과 호각을 다툴 여인이 공작 부인이 될지 몰랐다. 거기에서 호위를 불러 버리다니 우악스럽기 짝이 없다.
‘아직 수습할 방법이 있을 거야. 있고말고.’
자신이 실례를 하기는 했으나 거기서 바로 쫒아낸 루비카의 행동도 정당하긴 했으나 문제가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그랬다. 여인의 제일 가치는 상냥함이라고 하지 않는가. 질레한은 그녀가 상냥하지 않았다고 여론을 만들 궁리를 했다.
‘아이도 곧 태어날 텐데, 임신한 여자가 그러면 신이 화내실 거라고 할까.’
요리조리 궁리하는 사이에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그의 집과 공작저의 거리는 상당했다. 어느덧 바깥은 어둑어둑 땅거미가 졌다. 그가 집 문을 열기도 전에 부인이 쪼르르 나왔다.
“여보, 여보.”
부인이 그에게 손짓한 뒤 속닥거렸다.
“각하께서 오셨어요.”
“뭣, 에드가가?”
집무실 앞에서 보자고 난리를 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공작이 갑작스럽게 그의 집에 왔을 줄이야. 질레한은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어떻게 온 걸까? 어떻게 자신보다 빨리?
질레한의 눈에 그제야 자신의 저택 반대편에 서 있는 휘황찬란한 마차가 들어왔다. 불이 다 꺼져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다. 그건 마석마차였다.
“그, 그래. 어디로 안내했나. 응접실로 제대로 안내했고?”
“그럼요. 들어오실 때 당신이 평소처럼 크게 소리치실까 봐 이리 먼저 나온 거예요.”
“고맙소.”
질레한은 손을 비볐다. 이렇게 공작과 단둘이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다니 차라리 잘됐다. 어쩌면 공작 부인보다 공작이 더 다루기 편할지도 모른다. 그는 귀찮은 걸 딱 질색한다. 질레한은 그 속성을 이용해 몇 번 이득을 봤었다. 이번에도 공작 부인에 대해서 걸고 늘어지며 귀찮게 굴 의사를 만만히 보여 주면 공작은 물러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부인이니 그 정도쯤은 해야지.
질레한은 서둘러 응접실로 갔다. 응접실의 가죽 소파에 앉은 에드가가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눈동자만 옮겨 질레한을 바라봤다. 집주인이 왔음에도 그는 인사는커녕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응접실에는 허리춤의 칼도 풀지 않는 그의 호위가 있었다. 질레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장한 호위까지 응접실에 끌고 오다니 너무했다.
“질레한 경, 살기 편한가 보지.”
공작의 입에서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질레한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공작은 얼굴값을 하려고 그러는지 원래 입이 거칠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끌려 다가갔다 잔인한 말에 상처받는 사람이 많았다. 질레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스무 살 때 그 경험을 마쳤다. 그는 사람 좋게 웃었다.
“다 공작인 자네가 잘 돌봐 준 덕분이지.”
질레한은 공작가의 친척이었고 에드가에게는 육촌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각하라고 불렀으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어느 정도 편히 말해도 되었다.
“다시 말하게.”
에드가가 꼰 다리를 펴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질레한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끔벅였다.
“다 공작인 자네가 잘 돌봐…….”
질레한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호위가 성큼 다가와 질레한의 복부를 때렸기 때문이다.
“각하께 무례합니다.”
호위는 매우 사무적인 어조로 말한 뒤 뒤로 물러났다. 질레한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방금 전에는 공작 부인에게 모욕을 당했는데 이제는 에드가가 그를 모욕했다. 부부가 쌍으로 왜 이러나.
“내가 네게 뭘 잘못했다고 이러지?”
“각하라고 제대로 호칭하십시오.”
옆에서 호위가 다시 엄중하게 경고했다. 질레한은 나는 공작의 육촌 아저씨뻘이라고 외치려다 관두었다. 아랫배의 통증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각하, 제게 왜 이럽니까?”
“알 텐데.”
에드가가 등을 푹신한 소파에 기댔다.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기 짝이 없다.
“이 소파, 무척 편안하군. 가죽이 꽤 비싼가 보지? 테이블 위도 유리로 장식하다니 사치스럽군. 응접실을 장식한 화병 전부 샤르망 왕국의 수입 산이군.”
공작가의 복도에 장식되어 있는 물건에 비해서 한참 질이 떨어지는 것이었으나 모두 만만치 않은 사치품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비싼 사치품을 축적해 놓은 경우는 두 가지가 있었다. 돈이 넘치도록 많거나 자금을 세탁할 필요가 있는 꺼림칙한 돈이거나. 질레한은 후자였다.
“스테판, 팔 힘은 자네가 제일 세던가?”
에드가가 바로 옆에 있는 스테판에게 질문했다. 클레이모어의 호위기사단장인 그는 우람한 근육과 에드가 못지않은 큰 키를 자랑했다. 그는 많은 여성의 가슴을 떨리게 한 단단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각하, 저는 이 자리의 모든 사람보다 힘이 셉니다.”
스테판의 대답에 에드가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호위단장은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이럴 때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지도 알고 있었다. 에드가는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스테판에게 넘겼다.
“그럼 내가 하는 것보다 자네가 하는 게 더 효율이 좋겠군. 부탁하네.”
“명을 받겠습니다.”
스테판이 서류를 들고 질레한에게 다가갔다. 위압적인 기사의 몸짓에 질레한은 뒷걸음질 쳤다. 스테판과 에드가의 대화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찰싹!
곧 서류가 엄청난 속도로 질레한의 뺨을 때렸다. 종이로 맞은 게 정말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아픔이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질레한은 팔랑팔랑 아래로 떨어지는 종이를 바라봤다.
‘설마!’
질레한은 아픔도 잊고 땅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거기에는 그가 여태껏 벌인 횡령에 대해서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증거가 명명백백했다. 거기까지였으면 그리 겁먹지 않았을 것이다. 에드가에게 어떻게든 빌어서 친족의 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서류의 말미에는 국왕에게 이 사실을 고한다고 되어 있었다.
“에드…… 각하! 이 무슨, 이를 고하면 저만 다치는 게 아닙니다. 공작가의 명예에도 누가 됩니다.”
에드가는 감흥 없는 눈으로 질레한을 바라보았다. 육촌 아저씨라는 칭호도 해 주기 귀찮은 질레한은 세 치 혀를 잘 놀렸다. 귀찮기도 했지만 종종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그의 부정을 눈감아 줬다. 질레한은 횡령을 하기는 했으나 정도를 넘어서지 않았고, 공작가의 재정은 그 정도에 휘청거리지 않았다.
“질레한 경, 예전에 나라면 자네의 그 말에 넘어갔겠지.”
에드가의 푸른 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자넨 건드려선 안 될 걸 건드렸거든.”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이 무언인지 자명했다. 다만 질레한은 에드가가 이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 공사 구분이 명확한 공작이 이렇게 예민하게 굴 줄이야.
“저는 가신으로 해야 할 충언을 드린…….”
“그 충언에 내 부인을 망신 줘도 될 권리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군.”
질레한은 우직하게 앉아 복잡한 수식과 싸우는 일은 잘 못했다. 하지만 아주 얕은꾀나 임기응변에는 능했다. 세사르 경처럼 괴팍한 학자 스타일이 많은 클레이모어가에서 그의 그런 특성은 나름 도움이 되었다. 이윤을 따져야 하는 일에 에드가는 질레한을 배치했다. 그가 몰래몰래 돈을 착복하긴 했으나 그보다 얹는 이득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직하고 정직한 인물을 질레한이 맡았던 일에 배치하면 그들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헤집거나 사표를 던지기 일쑤였다.
“질레한, 내가 왕성에 가 있는 동안 국왕 전하와 무슨 협약을 하는 건 아닌지 아주 심장이 쫄깃했겠군.”
에드가는 질레한이 뭘 걱정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걱정대로 일은 진행 중이다. 모험단을 해체하고 마물이나 드래곤의 권역에 가까운 나라나 상단과 협약을 맺어 개발 중인 무기를 시험하는 것이다. 국왕은 당연히 반겼다. 이를 빌미로 나라 간의 계약이나 협약을 맺을 때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이런 속내를 숨기고 곤란한 척하며 현재 공작을 이런 저런 일에 뺑뺑이 돌리고 있는 중이였다.
‘그 너구리같은 영감이 빨리빨리 처리해 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왕성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가슴에 울분과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루비카가 그의 품에 안겨 잠드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던 그 감정은 질레한을 보는 순간 생생이 되살아났다.
“그렇다고 간을 배 밖으로 내놔서야 쓰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질레한을 잡고 있던 호위가 복부를 강타했다. 엄청난 아픔에 질레한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에드가는 무심히 그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야 질레한을 직접 구타하고 싶었다. 그럼 마음의 분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잘 훈련받은 기사가 더 효율적이다. 그들은 질레한을 죽기 직전까지 흠씬 패 줄 수 있다. 에드가는 잘못했다가는 질레한을 죽일 수 있었고, 혹 그가 죽을까 봐 망설이느라 제대로 때리지도 못하는 상황이 도래하는 것도 싫었다.
폭력은 전문가에게. 그의 오랜 지론이다.
“가, 각하. 제게 어찌.”
에드가는 질레한의 항변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제 손톱을 바라봤다. 오른쪽 검지와 중지 끝이 흉측할 정도로 깨져 피딱지가 생겼다. 아무래도 루비카가 보면 무슨 일이냐고 걱정할 것 같았다.
“스테판, 상처에 좋은 약이 있나?”
“여기 있습니다.”
질레한의 비명 소리를 배경으로 에드가는 손톱에 약을 꼼꼼히 발랐다. 이 상처는 따지고 보면 질레한 덕이었다. 문 너머에서 에드가는 질레한이 루비카를 모욕할 때마다 의자 끝을 쥐어뜯고 책상을 긁었다. 분노로 날 뛰는 가슴을 그렇게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손톱이 깨지는 아픔이라도 없었다면 그는 진작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당장에라도 문을 박차고 뛰어가서 루비카에게 모진 말을 퍼붓는 질레한의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패대기를 치고 싶었다. 채찍이 있다면 피가 나올 때까지 휘두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태양이 하늘 위에 있는 한 그의 두 다리는 자리에서 일어서기를 거부했다. 루비카가 질레한을 쫓아낼 때까지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문 너머에서 숨죽이며 그 소리를 듣고 있어야 했다. 평생 살면서 그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지독히도 무능력했다.
그래서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자마자 에드가는 마석마차를 달려 질레한의 저택으로 왔다. 일반 마차와는 비교도 못할 속도를 자랑하는 마석마차는 질레한보다 더 일찍 그를 도착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