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3화
처음 에드가를 만났을 때, 루비카는 거짓말을 하기 전 정직의 신에게 사죄의 기도를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정직의 신에게 사죄하지 않았다. 그녀는 숫자를 세면서 거짓의 신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제발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거짓의 신은 그녀에게 화답했다.
“각하 덕분에 나도 ‘차’라는 것에 취미를 두기로 했거든.”
질레한이 눈을 끔벅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루비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잔머리에 한해서는 그 에드가조차도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했건만 공작가에 그보다 더한 고수가 있었다.
“그렇지, 칼?”
“네?”
융통성이 없는 집사의 대답은 긍정이 아닌 의문형이었다. 하지만 ‘네.’라고 하기는 했다. 루비카는 칼의 말끝이 올라갔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자기 할 말을 이었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데 임신 때문에 마실 수가 없으니 각하께서 권하셨네. 마셔 보니 향긋한 향기가 꼭 숲속에 있는 것 같고 정신이 맑게 깨어, 각하처럼 차를 마시기로 했네.”
숲속에 있는 것처럼 정신이 맑게 깨기는 개뿔. 루비카는 그 차라는 음식이 싫었다. 비릿한 풀 맛밖에 안 나는데 에드가는 뭐가 좋다고 그걸 마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차를 진짜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질레한이 알 바가 뭐냐.
“그, 음.”
칼의 입이 달싹였다. 마님은 결정적으로 잘못 아는 게 있다. 임산부에게 커피가 좋지 않은 건 맞지만 차도 결코 좋지 않다. 칼은 이 지식을 마님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적갈색 눈이 그에게 경고했다.
‘칼, 그대가 사랑해마지 않는 차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따로 할 것!’
칼은 차의 효능과 부작용, 마실 때 주의 점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는 입을 꾹 눌렀다. 마님은 차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질레한 경을 물리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상하군요.”
질레한 경은 마지막으로 헛된 몸부림을 쳤다.
“부인의 방으로 가져가려면 계단으로 갔어야 하지 않나요? 칼은 각하의 집무실 쪽으로 트레이를 운반했습니다만.”
“질레한 경. 이쪽으로 와도 내 방으로 올 수 있네.”
루비카는 자신의 재능에 놀랐다. 어쩜 이렇게 거짓말을 잘 할까. 그녀는 좀 더 일찍 거짓말쟁이의 수호신 키르네에게 몸을 의탁했어야 했다. 그럼 이렇게 과거에 돌아오기 전에도 세기의 거짓말쟁이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친척인 당신은 모르겠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공작저 아닌가.”
루비카는 꼭 비밀 통로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실제로 공작의 집무실에서 그녀의 침실로 오는 비밀 통로가 있는지 그녀는 모른다. 하지만 오래된 저택이라면 하나쯤 있을 만한 게 비밀통로였다.
“그렇지. 칼?”
“네, 네!”
이번에 칼은 확실하게 긍정했다.
“내게 차를 가져 올 겸 각하의 상태를 몰래 보고 오라고 했네. 일에 집중하느라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으셔서 말이야.”
칼과 앤이 홀린 듯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그녀의 태도에 공작저에서 십수 년 일한 그들도 모르는 비밀통로가 진짜 있는 것 같았다.
“질레한 경, 각하는 바쁘시네. 그분이 어떤 물건을 발명하는지에 따라서 왕국민의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의 질이 달라진다는 걸 명심하게. 각하께 경이 오셨다는 걸 말씀드릴 터이니 정확한 날짜를 잡아 내일 다시 오시게.”
‘왕국민의 식탁’, 루비카는 평소 에드가가 그 말을 운운하면 말이 탁 막혔다. 식량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는 참으로 신경 쓰이는 말이었다. 또한 면담 날짜를 따로 잡아 주겠다고 했으니 그녀는 질레한 경이 이쯤에서 물러날 줄 알았다.
“마영석 건도 왕국민의 식탁이 달린 일입니다. 모험단의 관리와 경비 또한 쉽게 다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질레한은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공작이 왕성으로 떠나리라 짐작했다. 국왕과 공작은 정치적 동반자였다. 질레한은 공작이 마영석 건으로 국왕과 무슨 협상 중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칙령이라도 떨어지면 곤란해.’
할 수 있는 한 에드가를 미리 만나 그가 보장받을 수 있는 이익은 전부 받는 게 좋았다. 또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단서를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 중요한 사항이니 길게 이야기를 나눠야 되겠군. 면담 날짜를 제대로 받으실 수 있도록 각하께 말할 테니 그대는 이만 돌아가시게.”
“부인.”
질레한은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괜히 그가 친족 회의 때 의견을 주도했던 것이 아니다. 잔머리도 잘 돌아가면서 눈치도 빨랐다. 그는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놓고 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미 고용한 모험단의 처리 등 촉각을 다투는 일이 산재합니다. 각하께서 정녕 마영석을 구하지 않을 계획이라면 이 대금 처리도 빨리해야 합니다. 만약 구하지 않겠다고 하셨다가 나중에 구하겠다고 말을 바꾸시면 중간에 끼인 제 입장이 뭐가 되겠습니까.”
질레한은 에드가가 나올 때까지 루비카를 붙잡고 있을 속셈이었다. 처음에 공작 부인인 그녀가 나왔을 때 야단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였다. 질레한은 이대로 루비카를 쭉 잡고 늘어질 속셈이었다. 그럼 에드가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오리라.
“왜 이렇게까지 각하를 뵙지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군요. 부인, 혹시 내일 아침 날이 밝자마자 각하를 왕성으로 출발시킬 계획이신 것 아닙니까?”
루비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질레한은 루비카의 손끝이 아까부터 떨리고 있던 걸 눈치챘다. 당당한 척했지만 공작 부인은 분명 긴장하고 있었다. 공작 부인도 핑계거리가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우위에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눈치가 빠르고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판을 저질렀다. 그는 자만해 자신이 여기서 루비카를 끝장낼 수 있다 믿었다. 한마디로 입을 잘못 놀렸다.
“질레한 경, 지금 무척 무례하네.”
“혹 며칠 전 저희 앞에서 각하를 말리시느라 눈물까지 흘리신 건 사실 연기이고 부인께서 각하를 꼬드기신 건 아니신지.”
루비카가 분노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질레한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이 생각해도 제대로 비꼬았다. 아닌 게 아니라 에드가는 원래 마영석 문제에 무관심했다. 예산이 비록 많이 책정된 일이긴 했으나 산재하는 업무에 시달리는 에드가에게 그건 겨우 정원을 꾸미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공작 부인이 새로 온 다음에 태도를 바꿨다.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문제였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마님께서는 그날 각하를 말리시다가 눈물까지 보이셨어요.”
앤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하지만 질레한은 앤의 경고를 무시하고 루비카를 거만하게 쳐다보았다. 어디 네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라는 투였다.
“뭐, 부인께서 저 때문에 심적으로 힘들고 배가 아프시다면 제가 물러날 수밖에 없지요.”
루비카는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화가 나서 아까의 긴장까지 다 잊었다. 지금 질레한 경은 그녀에게 임신을 핑계로 배가 아프다는 억지를 부리며 이 상황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비꼬았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친척들 성격 한번 고약하네.’
만약 루비카가 정말 배가 아프다, 현기증이 난다라고 하면 그는 일단 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 임신이 벼슬인 양 군다고 소문내겠지. 이런 놈들이 제일 짜증나는 점은 진짜 임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인들의 고통도 연기 취급한다는 거다. 저도 열 달 동안 어미 뱃속에서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고 태어난 주제에.
“호위!”
루비카는 더 이상 질레한 경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기로 했다. 체면을 차려 줬더니 그는 루비카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려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명색이 공작 부인인데 이건 정도가 있지 않는가.
“네, 마님.”
“불청객 질레한 경은 내게 무례를 저질렀으니 쫓아내게.”
질레한은 입을 딱 벌렸다. 그와 함께 온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그는 말싸움에만 신경 쓰느라 중요한 걸 잊고 말았다. 집사도, 시녀장도 가지지 못한 공작 부인의 특권. 요 몇 년 공작가의 안주인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만 잊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집사를 지팡이로 때리고, 시녀장에게 말로 무례를 저질러도 그들은 공작의 호위를 시켜 그를 쫓아낼 수 없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다르다. 공작 부인은 공작의 호위를 자신의 호위 다루듯이 명령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가…….”
“집주인을 모욕할 경우 집에서 쫓아내도 된다고 귀족 지침서에도 나와 있네.”
얕봤다. 공작 부인을 지나치게 얕봤다. 질레한은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젠 너무 늦고 말았다. 그는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에게 양팔이 잡혀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부인, 저는 공작가의 친척으로서…….”
질질 끌려가면서 질레한이 마지막 항의를 하려는 순간 그를 잡고 있었던 오른쪽의 기사가 옆구리를 단도 검집으로 쿡 찔렀다. 기사의 갈색 눈동자는 ‘닥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결국 질레한 경은 입을 합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부인, 이건 좀……”
질레한이 쫓겨나가는 모습에 기가 질린 듯 남자 친척 하나가 입을 여는 순간 그의 부인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지당하신 처사 같군요.”
다행히 그는 부인의 뜻을 알아들어 질레한과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았다.
“저희가 그만 가문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질레한 경을 말리지 못한 잘못이 큽니다.”
루비카는 남겨진 친척들을 보았다. 방금까지 질레한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던 그들이 이제는 질레한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사과보다 변명에 가까운 그 말을 들어 주자니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이 자들을 또 어찌 쫓아내야 하나.
“마님께서 피곤해하시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지요.”
조무래기 정도는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듯 앤이 나섰다. 그녀는 루비카가 임산부라는 사실을 은근히 내세웠다. 그래도 어물쩍 남으려는 친척들을 다 돌려보내고 나니 어느새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지금쯤이면 에드가가 일을 끝낼 시간이지 않아? 오늘 난리 때문에 차 한 잔도 제대로 못했을 텐데…….”
칼은 혀를 찼다. 그만 루비카를 돕는데 바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각하에 대해서 잊고 말았다. 에드가도 집무실 밖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그가 따로 챙겼어야 했다.
“집무실에 내가 가도 괜찮을까?”
“네, 해도 졌으니 괜찮을 겁니다.”
칼은 대답하고 아차 싶었으나 다행히 루비카는 그의 대답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그럼 차를 가지고 가 볼까.”
루비카는 오늘은 먼저 에드가를 찾아가고 싶었다. 항상 그가 먼저 그녀를 찾아온다. 한번쯤은 반대가 되어도 재미있겠지. 그리고 어제는 그만 일찍 잠드는 바람에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했다. 앞으로 있을 일과 질레한 경에 대해서 에드가와 의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무실 앞에 당도한 그들을 반기는 것은 활짝 열린 문이었다. 에드가는 집무실에 없었다.
“에드가는?”
“각하는?”
토끼 눈이 되어 외치는 그들에게 시종이 조용히 답했다.
“방금 전에 스테판 경과 호위를 데리고 급히 나가셨습니다.”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이 소란을 피해 떠난 것 같았다. 각다귀 같은 친척들을 피해 빨리 왕성으로 가라고 루비카도 권하고 싶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출발할 필요가 있나. 이야기 정도는 나누고 내일 아침 출발해도 되잖아.
루비카는 다소 시무룩해져서 침실로 돌아갔다. 오늘 만찬은 혼자 먹어야 한다. 정말 싫었다. 에드가가 양심이 있다면 그녀와 함께 밥은 먹어 주고 떠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