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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10화 (110/212)

# 11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0화

그가 투정 같은 말을 하며 그녀를 안은 양팔에 깍지를 꼈다. 루비카는 어이가 없어 그를 밀칠까 하다가 용기를 내어 그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에드가는 짙고 푸른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키가 컸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내려다 본 그의 얼굴에는 보통 때와는 다른 우수가 차 있었다.

상처 입은 영혼 같은 그를 꼭 안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에게는 안 된다고 항상 거부했었는데 이럴 때가 되면 자신의 입술보다 더 붉은 입술에 입 맞추어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반칙이야.’

아름다운 그가 지독한 외로움을 보이는데 버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루비카는 충동에 굴복해 그의 입술에 입 맞추기 전 그의 고개를 잡은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그의 쇄골에 고개를 파묻었다. 혹여나 그가 그녀의 얼굴을 들어 눈을 확인할까 두려워 아예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머리 위에서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깍지 낀 손을 풀더니 조심스레 루비카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터질 것 같았던 심장 소리도 그의 다정한 손길에 점점 진정되었다. 의자 위의 그에게 안겨, 따뜻한 품속에서 루비카는 안정을 느꼈다.

그가 있지도 않은 그녀 뱃속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선언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르망의 아이가 아니라는 말에 에드가는 분노했다. 누군지 모를 자를 찾아 결투라도 벌일 기세였다. 그렇게 불같이 화내는 그는 처음 봤다. 그리고 그는 그 분노를 말리기 위해 입맞춤을 한 그녀의 입술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루비카는 부끄러운 감정을 누르기 위해 그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이전이었다면 그녀는 부끄러운 감정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에게서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아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불편해?”

목에 두른 손의 깍지에 힘이 들어간 걸 느낀 에드가가 조용히 물었다.

“아니.”

“그래.”

에드가는 그 이상 루비카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타닥타닥 벽난로에 장작이 타는 소리와 그와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루비카는 그녀의 생에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더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그의 품에 안겨만 있는데 방금까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던 따분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겨 숨소리와 따뜻한 체온, 그리고 향수 냄새 속에 섞인 쌉싸름한 체향 속에서 루비카는 전에 없이 안도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그와 함께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먼 미래 닥치게 될 전쟁에 대한 걱정도, 시끄러운 친척들에 대한 걱정도, 가짜 임신을 수습하기 위한 일에 대한 걱정도 그의 품 안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에드가의 품 안에서 깊이 안도한 루비카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에드가는 제 품에서 편안히 잠든 그녀가 숨쉬기가 곤란해질 때쯤 조용히 그녀의 고개를 돌렸다. 무슨 행복한 꿈을 꾸는지 입가에는 천사 같은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잘 때가 제일 예쁘군.”

에드가는 그녀를 따라 빙그레 웃었다. 루비카를 만난 이후 그는 웃음에 헤퍼졌다.

“하지만 좀 얄미워.”

그의 긴 손가락이 도톰한 그녀의 입술을 살짝 쓰다듬었다. 남의 타는 속도 모르고 이렇게 꼭 붙어서 잠든 그녀가 야속했다. 루비카의 입술을 한참 만지며 망설이던 에드가는 이윽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흉포한 갈증이 그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에 머무른 시간은 찰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짧았다.

루비카를 만나고 그는 제 안에 짐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짐승은 흉포하기 짝이 없음에도 그녀의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돌변했다. 그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한숨을 쉬면서 혹 그녀가 깰까 조심조심 양팔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 답을 알고 있는 여인은 깊이 잠들어 아무 대답이 없었다.

루비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침대 위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주 잠깐 잠든 것 같았는데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옷은 이미 잠옷 차림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에드가의 품에 안겼던 건 기억났다. 그리고 그 뒤의 기억은 없다. 설마 그대로 잠들어 버린 건가.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침대 옆의 설렁줄을 당기자 침실 문이 열리고 대기하던 하녀가 바로 왔다.

“마님, 깨셨나요? 많이 피곤하셨죠. 세숫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그, 어, 어제 내가 어떻게 침실에 왔지?”

“어머, 기억을 못하시는군요.”

하녀가 발그레해진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녀는 꼭 동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처럼 꿈꾸는 얼굴이었다.

“각하께서 직접 마님을 안아서 침대로 옮기셨습니다.”

“뭐?”

루비카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다정도 하셔라.”

부끄러움에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루비카와 달리 하녀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에드가의 행동을 칭찬했다.

“마님께서 깨실까 봐 어찌나 조심조심 옮기시던지 저희들이 숨을 참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냥 깨워서 옮겨도 됐다. 루비카의 뺨이 붉게 변했다. 그는 왜 자꾸 연극에 나오는 로맨틱한 기사처럼 구는 걸까? 자꾸 이런 모습을 보이면 소원한 관계를 핑계로 이혼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심지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알면서…….’

에드가의 속을 짐작할 수 없다. 루비카는 떨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했다.

“지금 몇 시지?”

“벌써 정오예요.”

“정오? 왜 안 깨웠어?”

이야기 도중 세숫물을 나르는 하녀가 왔다.

“그게…… 많이 피곤하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먼저 온 하녀가 루비카의 시선을 피하더니 세숫물을 나르던 하녀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다들 뭘 상상하는 건지 뺨이 발그레했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대놓고 물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루비카는 퍽퍽 소리가 나게 손을 씻었다. 그리고 잠옷에서 간단한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마님.”

루비카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알려졌는지 앤이 왔다. 그녀는 혼자 오지 않았다. 시종이 침대 옆 테이블을 정리하더니 음식을 올리기 시작했다. 번듯한 상차림에 루비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웬일이지?”

“당분간은 잘 드시는 게 중요한데 마님께서는 아침 식사를 잘 드시지 못하시잖아요. 저번 엘리제가 시중을 들 때 침실에서 편히 식사하셨다 듣고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이럼 안 되는데…….”

세리토스 왕국은 침실에서의 식사를 매우 게으른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했다. 망설이는 루비카에게 앤이 상냥히 웃었다.

“주치의가 이제부터 아침 식사는 침실에서 드시는 게 좋을 거라고 했습니다.”

맞다. 임신! 그걸 잊고 있었다. 임신을 하면 잠을 많이 자고 쉬 피곤해질 수 있기에 임산부에게 특권이 주어지는데, 그중의 하나가 침실에서의 식사였다. 하지만 그때 루비카가 아침을 넉넉히 먹을 수 있었던 건 침실이어서가 아니었다.

“엘리제, 이제 왔구나.”

아래층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엘리제가 식사가 다 차려질 때쯤 도착했다. 그녀는 오늘도 예쁜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그리고 쥐색보다 더 형편없는 벼룩색 드레스를 입고 왔다. 훨씬 더 예뻐질 수 있는 아이인데 어째서 저런 색 옷을 고집하는 걸까.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화려한 옷을 입히려면 역시 무도회 외에는 핑계거리가 없는 걸까?

‘아, 하지만 무도회 시즌까지는 한참 남았잖아.’

루비카는 한숨을 간신히 참았다. 엘리제에게 좋은 옷을 입힐 핑계가 없을까. 피크닉이라도 가 보자고 할까. 하지만 엘리제라면 다들 한껏 꾸민 피크닉에 수수한 옷을 입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등장할 게 틀림없었다.

‘하녀 연기를 하고 싶으니 공주님 분장을 해 달라고 해야 하나.’

루비카의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튈 때쯤 앤과 엘리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방을 나갔다. 시중을 들기에는 지나치게 단출한 인원이었다. 하지만 루비카는 개의치 않고 의자에 앉았다. 오히려 그녀는 기대가 되었다.

‘엘리제가 또 같이 먹어 주려나?’

어쩌면 엘리제가 ‘며칠 전 식사에서 마님과 자신이 함께 먹을 때 식사를 잘하더라.’고 앤에게 귀띔했을지 모른다. 어차피 그녀의 임신이 가짜라는 걸 앤과 엘리제는 알고 있었지만, 외부에 한두 달은 제대로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루비카의 희망일 뿐이었다. 앤이 잔에 물을 따라 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제, 규방에서 각하와 좋은 시간을 보내셨나요?”

입 안에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루비카는 분명 먹던 것을 다 뿜었을 것이다.

“좋은 시간이라니?”

“아하하하, 아시면서.”

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루비카는 그제야 에드가가 정신없이 키스할 때 문이 열렸다 닫혔던 걸 기억해 냈다.

아, 하녀들이 세숫물을 나르며 그녀를 향해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키득거린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루비카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앤은 아니었다. 그녀는 물 잔 옆의 컵에 주스를 따르며 콧노래를 불렀다.

“어쩌면 주치의랑 연기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두 분 사이가 이리 좋으시니.”

연기할 필요 없이 진짜 임신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도가 분명한 말이었다. 그 말에 루비카는 덜컥 겁이 났다. 에드가의 품에서 잠들었다 눈을 뜨니 침실이었다. 설마 같이 침대에서 잔 건 아니겠지? 요즘 들어 에드가는 자신 같은 신사가 세상에 어디 있냐는 듯 굴었다. 하지만 역시 처음에 멋대로 키스하고 침대에서 그녀를 안고 잔 것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았다.

“그, 음…….”

아직 어린 엘리제가 있는데 이런 질문을 해도 될까? 루비카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열일곱이면 알 건 알 나이이니.’

그녀와 에드가 사이에는 정말 별일이 없었다. 있어도 엘리제 앞에서 거론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키스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걸 고민해야 하는 사실이 서글펐다. 하지만 이 억울함을 말해 봤자 누가 믿으랴. 그녀와 에드가는 결혼한 사이였고, 불행히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모습만 연출되었다.

아, 아르망은 그가 찾아 준다고 했으니 한시름은 놓았는데 이리 되면 어찌 이혼할까. 역시 돈을 있는 대로 펑펑 써서 한 가문을 망하게 한 악녀 소리 듣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까.

“그냥 침대에 옮기기만 한 거지?”

“어머? 마님도 참, 엘리제도 있는데 못하시는 소리가 없으셔.”

앤이 저도 모르게 루비카의 등짝을 쳤다. 그 바람에 루비카는 들고 있던 스푼을 떨어뜨릴 뻔했다. 앤은 자신이 한 짓에 화들짝 놀라 루비카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뭘 상상한 건지 몸을 배배꼬며 한동안 웃었다.

루비카는 에드가가 혹 무슨 짓을 한 건 아닌지 애가 탔다. 어제 무슨 정신으로 그의 품 안에서 안도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에드가가 그대로 안고 침실까지 옮겼다니 남들 보기에 민망해 뺨이 달아올랐다.

“그냥 옮기기만 하고 갔지?”

“호호호호호.”

안절부절못하는 루비카와 달리 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부부사이가 아주 돈독하다 못해 서로에게 애걸복걸이다. 앤은 이 상황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각하께서는 마님이 주무시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시다가 가셨어요.”

앤 대신 엘리제가 대답했다.

“그, 그래? 그 외에 다른 건 안 했지?”

“네, 뭐가 부끄러우신지 마님의 옷을 갈아입힐 때 등을 돌리기까지 하셨는걸요.”

심지어 공작은 등을 돌린 채 눈을 가렸다. 그리고 빨리 갈아입히라고 하녀들을 재촉했다. 그 뒤 잠든 루비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사랑스러움만 남아 있었다. 엘리제는 그 광경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자신도 사랑을 한다면 공작 내외와 같은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다행이다.”

별일 없었다. 하지만 안도와 함께 불만이 고개를 불쑥 들었다. 루비카는 마른 편이 아니었다. 그녀를 안고 일어서는 순간 에드가가 느꼈을 무게감을 떠올리자 창피했다.

‘깨우지.’

그럼 루비카는 순순히 일어나 침실로 갔을 것이다. 왜 그는 사서 고생을 했는지 몰라.

‘나눌 얘기도 많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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