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9화
그는 이를 갈았다. 자신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는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제일 빨랐다. 그녀도 한 번 그를 걱정하느라 밤잠도 못 자고 마차로 몇 시간을 달려오는 정도의 고생을 해야 했다. 이 빚은 이자까지 쳐서 받아 낼 거다.
“하여튼 지금까지는 평범했고, 뭐 특별한 이야기 없어? 결정적으로 반한 사건이라던가.”
대체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이게 아르망을 찾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결정적으로 반한 일이라면…….”
그녀를 위해 아르망이 몇 주를 공부해 비누를 만들어 준 일이 떠올랐다.
“일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 있었어.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편하고 좋은 거. 그 사람은 그 분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날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발명했어. 그걸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좋아졌는지 몰라.”
“발명이라고?”
“응, 원래 발명 같은 걸 하던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지 않아?”
“똑똑한 자였나 보군.”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망은 정말 아는 게 많았다.
“발명과 지식이라면 나도 지지 않아.”
왜 아르망 이야기를 하는데 그가 자기 자랑을 하는 걸까. 루비카는 아스파라거스를 한 입 잘라 먹으며 입을 삐죽였다.
“나보다 잘생겼어?”
그만 포크를 놓칠 뻔했다. 아까부터 질문의 수준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런 걸 왜 묻는 거야?”
“외모에 대한 정보는 사람을 찾는 데 가장 중요하잖아.”
“눈동자색이나 얼굴색 같은 걸 묻는 건 그렇다 치고 당신보다 잘생긴 게 중요해?”
“엄청 중요하지. 나보다 잘생겼으면 아마 일주일이 안 되어 찾을 수 있을걸?”
에드가가 팔짱을 끼며 당당히 말했다.
왕자병도 이런 왕자병이 없다. 하지만 슬프게도 진실이었다. 에드가 이상 가는 미남이라면 세상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만큼 잘생기진 않았어. 키는 컸지만 자세 때문인지 구부정했고 몸에도 상처가 많았어.”
얼굴에 흉터도 있었다. 코는 크게 다쳐 삐뚤어져 있었고, 턱도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아르망은 루비카에게 전쟁 당시 다쳐 그런 것이라고 알려 줬다. 어쩌면 루비카가 아는 아르망의 얼굴은 실제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과 상당한 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먼 이야기가 아닌 그곳에서 외모가 변할 정도로 다치는 사람은 흔했다.
‘외모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그를 찾는 게 더 힘들어질지도 몰라.’
아르망은 그녀가 상상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외모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루비카는 아르망의 외모에 대해 묘사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다.
“그 사람은 무척 똑똑했어. 세리토스 왕국어는 물론 성서에 주로 쓰인 고대어도 잘 읽었고, 샤르망어도 잘했어. 아! 제국어도 잘했어. 예전에 내게 아론의 아카데미를 다닌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
“제국어도 잘했다고? 아카데미를 다닌 적이 있다고?”
아론의 아카데미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막대한 교육비가 들고 역량이 모자란 자는 졸업하기가 쉽지 않다. 대륙의 모든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만약 아르망이란 자가 아론의 아카데미를 다녔다면 그를 쉽게 찾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그와 만난 거지?”
“……봉사하다 만났어.”
“봉사하다? 베르너 저택 근방에 있는 수도원에서 만난 건가?”
에드가의 눈썹이 올라갔다. 루비카는 모르지만 그는 이미 그녀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다. 루비카는 그녀의 어머니가 아프던 시절에 수도원에 가서 종종 기도를 했으나 삼촌 내외가 저택의 살림을 도맡은 뒤로는 전혀 가지 못했다. 아르망이란 사내는 어쩌면 그녀가 어린 시절에 만난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르망은 딸기를 좋아하고 계피를 싫어했어. 또,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어.”
에드가는 잠시 침묵하며 자기 접시의 딸기를 바라보았다. 그도 딸기를 좋아했고 계피를 싫어했으며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다.
“성실하군.”
“그렇지? 정말, 항상 언제나 일을 하고 책을 보던 사람이었어. 너무 열심히 살아서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 노력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
열심히 산 걸로는 그도 지지 않는다. 항상 치열하게 살아왔다. 뭔가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에드가는 포크로 눈앞의 딸기를 집어 먹었다. 아르망이란 사내도 좋아한다니 딸기가 전에 없이 맛없게 느껴졌다.
이후로도 루비카는 그에게 아르망이 어떤 책을 좋아했고 무슨 음악을 좋아했는지 조잘거렸다. 카나리아처럼 말하는 루비카는 귀여웠으나 그 내용은 심히 에드가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지하게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넣었다.
그중 그가 가장 주의 깊게 들은 것은 아르망이란 작자가 무엇을 할 때 루비카가 기뻐했고, 그의 어떤 점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는지다.
‘성실한 건 나도 원래 그러니 쉬워. 필요로 하는 게 있으면 그게 뭐든 발명을 해서라도 쥐여 주고, 힘들어할 때는 위로하고 그럼 되는 건가? 음…….’
설명을 종합해 보면 아르망이라는 사내는 소위 말하는 ‘다정한 남자’였다. 아무래도 루비카는 다정한 남자에게 끌리는 타입 같았다. 그리고 그건 에드가가 가장 자신 없어 하는 항목이었다.
‘하지만 그거 빼고 내가 그놈 보다 못한 게 뭔데?’
잘생겼겠다, 똑똑하겠다, 돈도 많겠다, 지위도 있겠다. 에드가는 아르망이란 사내가 자신을 제치고 루비카의 사랑을 받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정해지기만 하면 되겠군.’
어렵겠지만 못할 게 또 뭔가. 그는 뭘 하든 우수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상 최고로 다정한 남자가 될 자신이 있었다. 다정한 말을 할 때 소름이 좀 돋긴 하겠지만 원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불편과 노력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에드가는 결심을 굳히고 루비카가 말하는 정보를 머릿속에 모조리 집어넣었다. 그녀가 언제 기뻤는지, 언제 감동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
“그 아르망이란 사람이랑 키스는 언제 해 봤지?”
“뭐?”
접시 위에 에드가가 덜어 준 음식을 다 먹고 빵을 찢고 있던 루비카는 놀라서 빵을 떨어뜨렸다.
“어쩜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지?”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키스 정도는 할 법하잖아.”
“했을 리가 없잖아!”
그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떴다.
“안 했다고?”
“당연히 안 했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짓말을 대체 왜 해? 그 사람과 나는 순수했던 관계였어.”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키스 정도는 할 법하잖아.”
루비카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아냐, 안 했어. 그 사람은 내가 자길 좋아하는 줄도 몰랐단 말야.”
“정말? 정말 안 했다고?”
질문을 하는 에드가는 기쁜 맘을 숨기지 못했다. 루비카는 울상이 되어 말을 늘어놓았다.
“아르망은…… 그냥 나 혼자 몰래 좋아했어. 고백도 제대로 못했다고.”
에드가는 확신했다. 아르망은 루비카를 좋아했다. 어쩌면 그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깊이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좋아하지도 않은 여인이 울고 있다고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더듬더듬 꽃다발을 만들어 선물을 했겠는가.
어쨌든, 그녀는 아르망과 키스하지 않았다. 그와는 벌써 몇 번이고 했는데!
그녀는 그가 그랬듯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처럼 단단한 사람이 그에게 입술을 허락하려면 아주 약간의 호감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아직 풋사랑을 잊지 못해 그에 대한 마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사랑에 대한 수많은 속설 중에 ‘결국 곁에 있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이 있다. 이 싸움의 승리자는 결국 그가 되리라.
그래서 그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끔찍한 바람둥이로 그려지고 있다는 걸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정도 정보면 충분하겠군.”
“정말? 이 정도로도 찾을 수 있어?”
루비카가 의심스러워 반문했다. 대화가 즐겁기는 했지만 그녀는 아르망에 대한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만 했다. 아르망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에드가는 그녀가 아르망의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에드가의 목적을 몰랐다.
“충분히 찾을 수 있어. 눈이 멀었고 이름은 아르망이라고 했지? 아론의 아카데미를 다닌 사람 중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해? 눈에 이상이 생겨서 아카데미를 그만둔 사람 중에서 찾아야겠군.”
“눈에 이상이 생겨서 아카데미를 그만뒀을 거라고?”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아카데미 입학은 불가능하지. 그리고 나랑 동갑이라며? 내 입학 동기들 중에 아카데미를 졸업한 건 반절도 안 돼. 나머지 삼분의 이는 아직 공부 중이고 삼분의 일은 매년 치르는 시험에 탈락해서 학교를 떠났지.”
에드가의 말에 루비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르망은 그녀에게 원래 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설마 거짓말이었던가?’
아르망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루비카는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에드가의 말대로 후천적으로 눈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언제 잃었는지, 무슨 경우였는지 일일이 말하기 귀찮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호, 혹시 모르니까 눈이 멀지 않은 사람 중에도 아르망이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
루비카의 말에 에드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미 식사를 다 마친 그는 오른쪽 다리를 꼬아 올렸다.
“수상한데?”
“뭐? 뭐가?”
“당신, 아르망이란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말이 오락가락해. 성이 뭐냐고 하니 안 물어봐서 모른다고 하질 않나. 머리색에 대해서는 어물쩍 넘어가고, 아까는 장님이라더니 지금은 눈이 멀지 않는 사람 중에 있는지 찾아봐 달라질 않나.”
루비카는 화끈 거리는 뺨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차가운 식기를 만진 덕에 손가락에는 적절한 냉기가 머물러 있었다.
‘어떡해, 말을 너무 많이 했나 봐.’
원래 꼬리가 길면 밟힌다. 루비카는 그가 이 일을 길게 물고 늘어져 그녀의 비밀이 들통날까 두려웠다.
“뭐, 됐어.”
그녀가 안절부절못하자 에드가가 한 발 물러섰다. 어차피 이 대화의 목적은 아르망을 찾는 게 아니었다. 찾아서 루비카의 곁에 두 번 다시 얼씬도 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일단 찾아보고 없으면 그 뒤에 생각해 보지.”
“고마워.”
안도한 루비카가 싱긋 웃었다. 에드가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의자를 돌려 양팔을 벌렸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그가 손을 까딱거렸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고마우면 상을 줘야지.”
“상?”
“여기까지 와 봐.”
그가 쭉 뻗은 다리 끝의 구두를 바닥을 툭툭 쳤다. 루비카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대신 아르망을 찾아준다는 그에게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상을 운운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말한 자리까지 간다고 그녀가 다리를 다치는 것도 아니었다.
루비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말한 곳까지 갔다.
“깍!”
그녀가 도착한 순간, 에드가가 긴 팔을 쭉 뻗어 한 번에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넘어질 듯 덜컹거렸지만 에드가의 단단한 다리 덕에 곧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상.”
쇄골 아래에서 그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루비카는 숨 막히는 긴장에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까의 짜릿했던 키스의 여운이 아직 입술에 남아 있다. 그의 쌉쌀한 침엽수림 같은 체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루비카는 자신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
그녀가 몸을 빼려하자 에드가가 팔에 힘을 주며 여유 없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속삭였다. 너무 간절한 목소리였기에 루비카는 멈칫했다.
“멀리서 오느라 힘들었으니 충전 좀 하게 해 줘.”